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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행시<금메달>-江村시절 추억 몇 조각
    삼행詩 2023. 2. 14. 14:48

    江村시절-추억 몇 조각

     

    -강변에 서면

    금을 긋는 강의 이쪽과 한 뼘 너머 저쪽

    메숲진 그림자 아롱아롱 흔들리는 물결

    달풀잎 바람길 따라 유장히 흐르는 저 강

     

    -남루했던 시간

    금빛으로 물드는 들판의 해거름

    메뚜기 잡아 소주병 채우던 남루한 소년

    달려간 세월의 뒤란, 아득한 추억의 물길

     

    -내가 살던 집

    금방 울 것 같던 먹장구름 가득한 하늘

    메아리에 터진 산처럼 비꽃을 쏟아낸다

    달달달 함석지붕이 밤새 울던 적산가옥

     

    -강물처럼 흘러간 그녀

    금모래 반짝이던 낙동강 강촌마을

    메꽃 같던 그녀는 머릿속 유리구슬

    달가당 흔드는 세월, 오늘도 저만치...

     

    **메숲진: 메숲지다.산에 나무가 우거지다.

    **달풀: 볏과의 다년초.8~9월에 자주색 꽃이 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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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고향은 부산 구포라는 곳이다. 칠백리를 흘러온 낙동강이 바다로 헤어 들기 전 마지막 몸을 푸는 곳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식 다음 날 비둘기호 새벽기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하여 살았던 3년여를 제외하고 결혼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아직 본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유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구포라는 지역의 특성이 강의 하구와 면하다 보니 강둑이 유난히 길었다. 예전에는 전국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 규모가 컸던 구포시장의 끝 작은 개울부터 시작된 강둑은 철길을 만나고 본류를 만나서 사상을 거쳐 바다가 있는 삼락동을 쭉 이어 그 길이가 상당했다.

     

    경부선 철길은 종착역 부산을 앞두고 정차하는 거의 마지막 큰 역인 구포역을 불과 이백여 미터 앞두고 강둑을 가로지르는데, 이 건널목은 전국에서 사고가 많기로 유명했다. 건널목에서 둑을 타고 내륙으로 또 오백여 미터 정도에 우리 집이 있었고 집 뒷길과 면한 초등학교가 있었다. 집이 학교 정문 길 옆 탱자나무 울타리 집이었다. 스무 그루 쯤의 탱자나무 울타리는 주변의 어느 집도 갖지 못한 우리 집만의 아이덴티티였고, 나는 어릴 쩍 탱자나무집 큰 아들이라 불렸다. 그 집은 일본사람들이 남기고 간 소위 적산가옥이었고 지붕은 루핑(두터운 종이에 콜타르를 바른 후 내구성을 위해 모래를 뿌린)이 삼분지일, 바람이 갉아먹어 구멍이 숭숭한 함석이 삼분지일, 최신식(당시로는) 스레이트가 삼분지일로 구성이 되어 있어서 비오는 밤이면 서로 다른 재질이 빗방울에 제각각의 화음으로 화답하는 작은 오케스트라의 향연이 펼쳐지고는 했다.

     

    구포에서 북행하는 곳에 간이역도 없던 화명, 금곡 같은 동네가 있었고 그곳의 아이들은 십여 킬로의 거리를 걸어서 통학을 했다. 가장 지름길이 기찻길이어서 이 길을 오갈 때 사고가 많이 있었다. 특히 귀가 어둡고 반사신경이 느린 노인들이 사고를 많이 당했다. 밤에는 건널목에서 신변을 비관한 자살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동반자살하는 사례도 있었다. 일 년을 셈하면 최소 십 여번 정도 그런 일이 있으니 나라에서 건널목을 없애고 벽돌로 높게 담을 쌓은 후로는 십 여년 사고가 없다가 새마을 열차사고로 수십 명이 한꺼번에 갔다. 구포사람들 입에 한동안 귀신이 없다고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오르내렸다.

     

    집에서 걸어서 10여분 가면 철길과 가깝게 논이 있었다. 논이라야 겨우 네 마지기로 일곱 식구 입치레가 힘들어 부친는 밀가루 공장에 다니면서 농사를 병행했고, 모친은 심십리 산길을 매일 다니며 땔감을 해서 장에다 팔았다. 가을 초입부터 나는 학교를 파하면 1리터 큰 소줏병(댓병이라 불렀다)을 들고 논으로 가서 메뚜기를 잡았다. 그렇게 잡아온 메뚜기는 다음 날 아침 잘 볶고 적당히 소금을 쳐서 도시락 반찬이 되었다. 참 빈한한 삶이었다.

     

    건널목을 건너 본류 쪽으로 첫걸음 둑 밑에는 넝마주이들의 터전이 있었다. 커다란 대바구니를 등에 매고 쇠집게를 철컥거리며 다니는 그들은 어린 눈으로 보기에는 위협적이었다. 우는 아이 달랠 때도 자꾸 울면 넝마주이한테 팔아버린다고 할 정도였다. 열차사고를 당한 주검들은 처참하다. 경찰도 수습의 엄두가 나지 않으니 그 일은 모두 넝마주이들이 도 맡아서 했다.

     

    안동댐이 없던 시절 경북지방에서 홍수가 나면 낙동강 하구까지 오는 데는 며칠이 걸렸다. 이 물과 밀물이 강을 타고 올라오는 길에 서로 만나면 한 달 이상 가뭄에도 갑자기 물이 불어나 구포 일대가 물에 잠기곤 했다. 그런 때는 구포사람들이 죄다 강둑으로 나가 물 구경을 하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쯤일 것이다. 같은 반에다 옆자리에 앉았던 구포에서 제일 큰 재재소 딸이 물 구경을 하고 오던 길에 건널목을 건너다 넘어져 분기레일 사이에 발이 끼었고 달려오던 열차에 치어 갈댓잎이 되어 강물을 타고 떠내려 갔다. 나는 한동안 옆자리의 부재에 심하게 마음앓이를 했다.

     

    나도 어른들 사이에 끼여 그 길을 다녀왔던 터였고, 그 자리에서 수많은 주검들을 보아왔지만 그 친구의 주검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당시 활명수 병따개로 철사를 물음표처럼 굽히고 끝을 납작하게 눌러 길쭉한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그 구멍에 실을 묶고 돌을 매달아 철로위에 올려놓으면 기차가 지나가면서 납작하게 눌러 놓으면 신기하게도 자석이 되었다. 우리는 몇몇이 어울려 다니며 자주 철길로 가서 이렇게 자석을 만들며 놀던 곳이기도 했는데... 눈웃음이 꽃처럼 화사했던 그녀의 시간은 멈춘 것일까? 아니면 내 생각속에 살아 있으니 그녀의 시간은 현재 진행형인 것일까?

     

    오랜만에 강변마을에 살던 그 시절의 추억 몇 조각을 엉거주춤 더듬어 보았다. 시간은 역류가 없다고 하지만 마음속 추억들은 여전히 현재를 흐르고 있다. 시간의 패러독스 인가.

     

     

    오래전에 그렸던 그림이다. 활명수 병따개로 철길에서 놀던 그 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위험 천만이다. 오래전 블로그 글을 참고하시라.

    삶과 죽음이 함께하던 철로 :: 김대근시인의 블로그 "반디불의 똥꼬"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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