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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과 죽음이 함께하던 철로
    유년의 기억 2006. 3. 29. 11:51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두부모처럼 딱 잘라버려도 좋을 만큼 명확한 명제이기도 하다.
    누구나 죽는것은 분명 하기는 하지만 언제 죽느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이 언제쯤 죽을 것이다 안다는 것은 오랫동안의
    사는 일에서 제법 녹녹치 않은 일이다.


    누구나 죽기 위해 태어난다.
    이 말은 누구나 죽을 것이기 때문에 태어난다는 것은 죽을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과 상통해 있는 말이기도 하다.


    가끔씩 금반지 한 돈으로 만들어진 반지를 가지고 참석해야 하는 돐잔치도
    가만히 따지고 보면 결코 즐거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 세상 삶의 길이에서 일년만큼 짧아 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날을 즐거워 해야하는 이유는 일년동안 그의 존재함으로 인해
    많은 즐거움을 누리게 해주었기 때문이며 그에 대한 감사의 뜻이다.


    나는 어릴때 부터 많은 주검들을 보아왔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 보다 환경적으로 더 많이 접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초등학교인 국민학교 시절은 한달에 두어번씩의 주검을 보았다.
    그래서 그 시절을 같이 지낸 동창들이 출가하여 승복을 입은 친구만
    무려 넷이나 된다.
    한 학년에 3개반인 시골학교에서 4명이면 작은 숫자는 아닐 것이다.


    나는 강원도 황지못에서 출발한 낙동강이 봉화를 지나고 안동을 지나고
    대구를 거쳐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구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일본사람들이 만들었다는 구포둑은 낙동강 하구언이 있는 곳에서 출발해서
    사상과 모라..그리고 구포다리를 거쳐 굽어진 철로를 만나면서 끝이 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끝난게 아니라 건널목을 지나 구포 시장통을
    초승달처럼 끌어 안으며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데 거의 끝날 무렵에
    학교가 하나 있었다.
    해방되던해에 지어져서 육이오때는 후방의 야전병원으로 사용이 되었던
    그런 곳이라 우리 학교에 떠도는 수 많은 이야기들은 그들의 죽음과 연관이
    되어 있었고 학교를 지을 당시에 불도저 기사가 죽인 승천못한 이무기의
    한이 늘 회자 되고는 했다.


    구포둑을 관통하는 건널목과 학교의 거리는 1키로가 조금 안되는 그리 길지
    않은 거리였고 볼것에 대한 충족이 덜 되던 때라 그 건널목을 건너서 여름엔
    불어난 홍수구경..겨울엔 윗 지방에서 떠내려 오는 유빙들의 구경을 하러
    다녔다.
    건널목을 건너 강쪽으로 만들어진 둑의 축대에는 넝마주이들이 살았고
    시장쪽으로는 아버지가 다니던 영남제분이라는 밀가루 공장이 있었다.


    조금 더 가서 만덕에서 흘러 내려오는 샛강과 낙동강의 본류가 만나는
    갈대밭이 있었는데 이곳은 우리 할머니가 내 태를 묻은 곳이기도 하다.
    우리 할매는 토속신앙의 일종인 용왕님께 특히나 치성을 드렸고 가끔씩
    할머니를 따라 절에 갈라치면 늘 용왕당에 가장 먼저 절을 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강을 환장하게 좋아한다.
    바다의 댓바람보다 강가를 거닐때가 마음도 편안해 지는 것이다.
    나의 배냇강이라 할 수 있는 낙동강은 늘 나에게 방향과 지침을 주는 아버지와
    같은 강이다. 섬진강은 늘 어머니같은 푸근함을 느낀다.
    낙동강에는 돌을 던지거나 하면 왠지 불경을 저지르는 것 같은 마음이 들고
    섬진강은 발을 담그거나 납작한 돌로 물수제비를 놓거나 해도 부담이 없다.
    나에게 있어서 강은 늘 내 인생이 흘러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거울같은 것이다.


    철이 들때까지 구포둑과 건널목은 삶의 대부분을 차지 했었다.
    학교를 파하고 가방을 집에다 던져 놓고는 바로 우르르~ 모여서 강으로 갔다
    해걸음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 오는데 늘 건널목이 경계의 이쪽과 저쪽을
    그렇게 구분 지어주고는 했었다.


    건널목 너머에는 늘 새로움이 넘쳤다.
    까만 양철지붕의 학교 건물보다 커 보이는 쇠로 만든 배들이 모래를 가득싣고
    불보라를 일으키며 상류로 부터 하류도 다니고 하나뿐인 구포다리는 바깥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통로였으며 구포항에는 빨간색 루즈를 진하게 바르고
    꽃무늬 팬티가 보일똥 말똥 짧은 치마를 입은 누나들이 뱃사람들을 유혹라는
    그런 진풍경을 늘 볼수 있는 그런 곳이기도 했다.


    건널목을 넘기전 풍경은 늘 회색빛 어둠이였다.
    배고픔이 있었고 가난이 있었고 참고서 한 권 사갈 돈이 없어서 맞아야 하는
    매와 눈물도 있었다.
    시간에 맞추어 풀을 뜯어와 먹여야 하는 토끼도 있었고 회사로 나무하러
    그렇게 집을 비운 아버지와 엄마를 대신해서 동네를 돌면서 냄새나는 돼지죽을
    얻어와 먹여야 하는 돼지들도 있었다.


    그 건널목은 회색빛 현실과 무지개빛 솔롱고스를 넘나드는 통로였다.


    그러나 그 건널목은 죽음이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어느날 오는 것이란걸
    깨우쳐 주는 스승이기도 했다.
    그냥 어느날 문득 태어나 내곁으로 오던 동생들처럼 그렇게 죽음이라는 것도
    늘 우리들의 일상처럼 그렇게 오는 것이란 걸 나는 어려서 깨쳐버렸다.
    아니 나 뿐만이 아니고 어쩌면 같이 얼려다니던 친구들도 같은 생각을 가졌는지
    모르는 일이기도 하다.
    내 동기들 4명이나 출가를 감행한 것을 보면 말이다.


    꽤액~~~~끼이이이이~~~~~~~익.......
    칠판에 한참 판서중인 담임선생님의 어깨위로 멀리 기차의 기적소리가
    제동장치의 미끄러지는 마찰음과 같이 섞여서 오후의 햇살과 같이 덮히면
    우리들 몇 몇은 냅다 창문을 열고 폴짝 뛰어내려 건널목을 향해서 달린다.


    "이놈들이!!!"
    담임선생님의 날카로운 소리를 뒤로 하고 한참을 달려서 건널목에 닿으면
    어김없이 보이던 주검...
    경부선 철로중에서 가장 사고가 많기로 알려졌던 그곳은 한달에 두어번도 넘게
    우리들에게 그런 처참한 주검들을 보여 주기도 했다.


    우리들은 늘 역무원 이나 경찰관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을 했다.
    곧이어 도착한 역무원이나 경찰관들은 항상 자기 키 정도 되는 대나무 막대를
    가지고 다녔다.
    그 대나무 막대기의 용도는 우리들을 마구 패서 현장에서 물러나게 하는 거였다.
    그래도 우리는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늘 자리를 지켰다.


    기차에 그렇게 당한 주검은 처참하다.
    그때마다 동원되는 사람이 바로 건널목 너머 살던 넝마주이들이였는데 그들은
    종이 줏을때 사용하는 집게로 여기저기 흩어진 살점들을 모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수습이 되면 철로의 한곁에 가마니를 깔고 그위에 주검을 놓고
    다시 가마니로 덮었다.
    그때서야 우리는 자리를 털고 학교로 돌아 오곤 하는데 담임선생님의 가혹한
    체벌이 뒤따랐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하루정도 지나면 동네 아줌마들을 통해서 어제 그 건널목에서 주검으로 변한
    사람에 대한 신상과 사연이 돌게 마련인데 어찌 그리 하나같이 애절한 사연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


    아직도 기억나는 애절한 주검은 공군빠이롯트와 바의 호스티스의 자살이였다.
    김해에 공군비행장이 있었는데 구포는 이곳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베드타운 역활을
    했으므로 미군들과 공군들이 흔하게 보였다.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임관한 공군빠이롯트니 아마도 그당시에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엘리트였을 것인데 사랑의 화살은 본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꽃이는 것이어서
    그와 호스티스가 사랑을 나누었더란다.
    뭐 호스티스에게도 순정이 없으란것도 아니고 사랑이란거 필이 통하면 서로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세상에는 항상 당사자보다도 주변이 난리인
    경우가 많지 않는가 말이다.


    암튼지 간에 앞길이 구만리 같은 엘리트인 자식이 호스티스와 사랑한다고 결혼을
    하겠다고 설치면 어느 부모가 호락히 허락을 하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당연히 반대가 극심했단다.
    이에 비관한 두 남녀가 택한 길이 신분의 고저도 나이의 격차도 아무런 편견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고 한다.


    철길에 나란히 벗어 놓은 장교구두와 뾰죡구두...그리고 반병쯤 남은 댓병 소주..
    하얀 봉투한장(아마 유서가 들어 있었다지..)이 누구보다 빨리 도착한 우리눈에
    뜨였고 그 풍경은 아주 오랫동안 기억세포속에 남아있었다.


    5학년때 좋아했던 여자애가 있었다. 합판공장 사장의 딸이 였던 그 애는 키가 컸다.
    얼굴도 뽀얀 우유빛이어서 늘 환해 보였는데 좋아하는 마음은 늘 그애를 괴롭혀
    관심을 받고자 했다.
    그애가 고무줄을 하기만 하면 가서 끊어버리고 개구리를 잡아다 가방속에 슬며시
    넣어 두어서 기겁을 하게 하기도 했다.
    죽을만큼 싫었던 것은 칠판 모서리에 육성회비 안낸 사람으로 적히는걸 그녀가
    보는 것이였을 정도 였다.


    그때는 아마 추석이 임박했던지 아니면 조금 지났는지 모르겠는데 동네 어른들이
    웅성이며 서넛씩 모여서 건널목이 있는 강쪽으로 바삐들 움직였다.
    "아제~ 어데 가는데예..."  먼 친척뻘인 동네 아저씨는 바쁜 걸음에도 답을 주었다.
    "물이 들어서 난리아이가...물 구경간데이.."


    두어달 가물었는데 왠 물이람...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에 안동댐이 없던 시절이라 안동에서 크게 비가 와서 홍수가
    났는데 며칠이 지나서 낙동강의 하류인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초갓집도 둥둥~~ 떠내려 가고 나무 평상도 떠내려 가고..그 위에 돼지가 꽥괙대고..
    낙동강의 홍수는 늘 그렇게 하루로 흘러가는 거대한 블랙홀과 같았다.


    석양이 마침내 붉은 황톳물을 더 붉게 물들일 즈음에야 우리는 돌아 왔다.
    물구경을 제대로 하려면 구포다리위가 제격이다. 그러나 그 구경은 남보다 좀더
    많이 걸어야 한다.
    돌아 오는 길에 건널목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대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또 사고구나~ 하고 어른들 사이를 비집고 머리를 들이밀었는데 이미
    상황은 종료되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서 저녁먹고 나서 마실 나갔다온 엄마로 부터 합판집 딸래미가 건널목
    사고의 주인공이란걸 들었다.
    그날밤에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었다.
    아마도 여자 때문에 울어 본 것이 이때가 처음이였을 것이다.


    철로는 주검만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는 놀이 시설이기도 했다.
    철로위에 귀를 대고 있으면 따그락...따그락...따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소리가 그렇게 들리면 머지 않아 이곳으로 기차가 지나간다는 것이다.
    점점 커지는 따그락...소리는 신기했고 태양에 달은 철로의 따스함은 아직도 남은
    아름다운 추억의 단편들이다.

     

     

     

     

     

    구부러진 철사에 끝부분이 납작해진 활명수 따게..
    가장 흔한 약이 활명수였고 활명수 병 뚜껑의 끝에 조금 튀어 나온 부분을 구부러진
    철사로 만든 따게의 구멍에 넣고 돌려서 따는 병따게는 흔하게 줏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 병따게를 줏어서 구멍에다 명주실을 묶은 다음에 철로의 침목에 박힌
    큼직한 못에다 다시 묶어서 병따게를 레일위에 두고는 둑 아래 앉아 볕쪼임을 하며
    기다린다.


    꽤액~~ 덜커덩~ 덜커덩~
    늘 사고가 많이 나는 곳이고 이때쯤 우리들이 그런 장난을 한다는 것을 아는 기관사는
    경적을 한번 울려준다.
    이어서 지나가는 기차바퀴들의 덜컹임....


    제일뒤에 매달린 차장차가 뒷모습을 보이며 굽어진 철로를 멀어져 가면 우리들은
    우르르 철로변으로 간다.
    그리고는 각자의 위치에 묶어놓은 병따게를 회수 하는데 온통 납작해져 버린 따게는
    어느듯 자석으로 변해져 있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가 보면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따르는 사람을 보게 되는데 이들의
    공통점을 잘 살펴보면 하나같이 힘들고 지난한 고단함의 세월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어려움과 마주했다가 그 소용돌이를 뚫고 나온 사람은 확실히 남을
    위한 배려도 특별하다.
    병따게처럼 아주 강한 고난은 자석처럼 세상의 모든것들에 대한 흡인력도 몇배는
    그렇게 세지나 보다.


    내가 그동안 해온 일들 중에서 이 철로..즉 레일이라고 하는 것과 연관이 많다.
    비료를 싣고 다는 화차도 제법 만들었고 쇳물을 싣고 다니는 그런 차를 만드는
    일에도 한동안 관여를 했다.
    지금도 천정크레인이라는 역시나 레일을 타고 다니는 놈을 만드는 일로 밥을 먹고
    살고 있으니 어쩌면 내 어릴쩍의 건널목은 내 삶의 모든것을 투영하는 듯 하다.


    친하던 누군가가 죽었다고 해도 그 다지 슬퍼하지 않는 것은 죽는 다는 것은 헌 몸을
    버리고 업에 따라 새 몸을 얻는다는 사상이 배인 불교도라서가 아니라 어쩌면 오래전
    어릴쩍부터 수 없이 보아온 주검들에 대한 무덤덤함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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