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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명차별적 영화, '아포칼립토'
    좋은글,영화,책 2007. 2. 14. 10:26


    문명차별적 영화,  '아포칼립토'

     

     


    수만년전 일단의 아시아인들이 얕은 알래스카 바다를 통해 새로운 대륙으로 들어가서
    나름대로의 문명을 일구었다. 지금의 북미지역은 북미대로 인디언문화를 이루었고
    남미지역의 사람들은 마야문명과 잉카문명을 차례로 일구어 내었다.


    기존의 문명이 새로운 문명에 의하여 도태되어도 세습되어 내린 습속은 잘 바뀌지 않아
    전승되는 경우가 많은데 남미의 마지막 문명이 되었는 잉카는 마야문명의 대부분의 풍습
    을 그대로 전승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석기문화를 영위했는 마야문명은 수많은 피라미드를 남겨놓았는데 이런 피라미드의 건설
    과 보수는 잉카문명에까지 이어져 내렸다. 이 영화에 나오는 아즈텍 파리미드는 사방으로
    계단이 있는데 계단의 총수가 365개였다고 하니 이들의 태양숭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 말은 이들이 태양력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옛 고구려땅의 피라미드는 지배자의 사후세계를 위한 무덤의 용도로
    사용되었지만 남미지역의 피라미드는 제의용이나 수많은 군중을 모아 국가적 행사를 하던
    공공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많은 문헌들에 이 피라미드가 주로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낼때 사용되는 공개적 장소였음이
    나와있으며 그 의식이 영화에서와 같이 제단에 제물이 된 사람을 눕히고 배를 갈라 심장을
    떼어내어 태양신에게 바치고 목을 쳐서 계단에 굴림으로써 신이 제물을 허락하고 은혜를
    인간에게 내려주며 제물의 피를 대지에 적심으로써 대지가 풍요하게 될것이라는 믿음을
    나타내주는 행위였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밤이면  사라지는 태양신이 아침이면 새로운 생명을 얻어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을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심장이 필요하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제물의
    살아있는 싱싱한 심장은 신에게 받치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하루에 수십명의 제물을 한꺼번에 받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백인의 시각으로 본
    편견을 고스란히 영화에 투영하고 있다. 물론 재미를 위해서 잔인성을 최대한의 증폭이
    필요하였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대부분이 왕국에 나타나는 가뭄이나 자연재해를 없애달라는 기원이였을 것이며 주작물인
    옥수수의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했을 것이다.


    또 하나의 편견은 제물의 확보를 위해 작은 부족들을 사냥하는 것으로 설정이 되지만
    사실 마야나 잉카는 상당한 영역을 가진 대제국이였고 이 대제국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수많은 죄수들이 생겼을 것이고 끊없는 정복전쟁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생긴
    수많은 포로들도 역시 제물로 쓰기에는 풍족했을 것이다. 영화에서 처럼 단지 제물로
    쓰기 위하여 다른 부족을 사냥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마야와 잉카의
    통치에 반대하는 부족들도 생겼을 것이고 그 부족의 추장들은 이 제단에 우선하여 받칠
    제물이였기도 했을 것이다. 정복자에게는 승리의 기쁨과 기원을, 피정복자에게는 굴복의
    강요를 이런 행사를 통해서 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정복당한 부족민들의 몰살보다는 우두머리만 공개적인 장소에서 처형과 제물로서의 역활을
    하게 함으로써 대량 살육을 막는 장치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피정복자에 대하여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한 백인들에 비하면 훨씬 인간적인 방식일지도 모른다.


    영화 '아포칼립토'를 두고 잔인하고 끔찍하며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 미개한 행위로 평가를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이는 백인의 시각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 의도에 끌려가고 있음이며
    대중을 상대로 하는 매체가 대중의 사고에 끼치는 영향이 큼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쫓기던 주인공이 초인적인 의지로 난관을 극복하지만 바다로 내어 몰리고 최후를 예감
    하지만 그때 출현한 유럽범선은 주인공이 위기를 탈출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설정은
    결국 신대륙의 발견이 수많은 피정복자에 대한 구원이였다는 암시를 주고있다. 이것이야
    말로 멜깁슨 감독의 '아포칼립토'가 서구의 잉카정복을 정당화하고 원주민들을 무지의
    골짜기로 내어모는 인종차별적 영화라는 반증인 것이다.

     

     


    일단의 정복자들이 남미에 도착했을때 잉카인들은 그들을 친구로 맞이했다. 그들의 아득한
    전설에는 일단의 선지자들이 바다를 통해와서 마야문명을 일구고 다시 바다를 통해 갔고
    다시 하얀날개의 새를 타고 바다를 통해서 오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얀 똧을 단 거대한
    배를 타고 나타난 이들 정복자들에게 원주민이 호감을 가졌던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당시
    잉카는 심각한 내전의 와중에 있었는데다가 정복자들이 가져온 천연두는 그들의 질풍같은
    속도보다 훨씬 빨리 잉카를 혼란에 몰아넣었다.


    그들은 멀리서 온 친구들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수만명을 광장에 몰아넣고 살육을
    감행했다. 정복자 1인당 무려 2~3백명을 살해한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 바로 잉카에서 저지른 스페인 정복자들의 살육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원주민의 잔인성을 몇배로 극대화하고 있으며 반면에 마지막 장면에
    구세주로서 백인의 상륙을 배치함으로써 문명차별적 영화를 자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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