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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좋은글,영화,책 2007. 1. 1. 23:15
    지은이
    출판사
    실천문학사
    출간일
    2005.8.10
    장르
    평전
    책 속으로

    이 책은 일본강점기동안 수많은 테러등으로 일본에게는 엄청난 피해를 우리 민족에게는 자존심을 세우게 했던 의열단을 만든 약산 김원봉 열사의 평전이다. 그는 서로 반목하던 많은 독립단체들을 하나로 결집시켜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해방후 귀국하여서도 역시 남북합작을 부르짖다가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북한에서는 민족주의자로 몰려 결국 북한에서 숙청되었다.

    남한에서의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들은 그가 월북하여 중요한 요직에 있었다는 것으로 지워진 독립운동가의 이미지로 남겨졌지만 그가 우리 독립운동사에 남긴 큰 발자국 조차 지울수는 없다. 그의 평전은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이 책은..
    나의 평가
    아주 좋아요!아주 좋아요!아주 좋아요!아주 좋아요!아주 좋아요!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테러리스트에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있다. 우리나라의
    젊은 사람들도 체 게바라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의 얼굴이 인쇄된 티샤츠도 종종
    눈에 뜨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오래전에 체 게바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독립 투쟁을 위한 테리리스트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 있다.


    그 이름은 약산(약산) 김원봉이다. 그는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밀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의 국경일인 천장절에 일장기를 변소에 쳐넣은 사건으로 학교를 자퇴,
    사립인 동화학교로 옮기나 동화학교도 곧 폐교가 되었다.


    1년 가까히 밀양의 표충사에서 수도하며 독학을 하다가 승려였던 이모할머니의 도움으로
    서울의 중앙학교에 편입하여 수학했다. 중앙학교는 당시 계몽운동가들이 민족독립의 후진
    양성을 위해 설립했으므로 그도 민족주의적 교육을 받았다.그는 여기서 평생의 친구가 되는
    이여성과 김두전(약수)를 만나게 된다.


    18세때인 1915년 김원봉은 전국 각지를 유랑하게 되는데 그는이 유랑을 통하여 수많은
    민중의 아픔을 느끼고 국토의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된다. 체코의 테러리스트
    '체 게바라'도 역시 의과대학생 시절에 국토를 남아메리카를 종단하면서 민중의 아픔을
    체득하면서 혁명의 필요성을 몸으로 느끼게 되는데 이점은 두사람이 무척 닮은 듯 보인다.


    여행이야 말로 자신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만드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낀다.


    김원봉은 중앙학교를 중퇴하고 이여성, 김두전와 더불어 중국의 금릉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김원봉은 약산(若山), 이명건은 여성(如星), 김두전은 약수(若水)로 호를 만들었는데 김원봉의
    고모부이며 대한독립회의 주요한 인물이였던 황상규가 지어주었다. 이후 김두전(약수)는 해방
    후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고 반민특위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나 친일파 출신 관료들이
    반격인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중 월북(혹인 납북)되었다. 이명건(여성)은
    해방후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참여했다. 그는 학자로 한국복식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알려졌다.
    그는 여운형이 암살되자 여운형 대신 인민당 대표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월북하였다.


    1919년 김원봉은 의열단을 조직하고 의열단 전원의 추대로 의백(단장)이 된다. 1920년 처음
    으로 국내에 공작조를 보냈으나 6월에 실패하고 모두 체포당하게 되면서 의열단이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몇달뒤인 9월과 11월에 부산경찰서와 밀양경찰서에 각각 폭탄이 투척되어 많은
    피해를 입히므로써 의열단은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긋게 된다.


    1921년에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1922년에는 중국 상해의 황포탄에서 일본군 대장
    다나카를 저격하여 의열단의 활동은 전세계로 활약상을 알리게 되었고 특히 중국사람들의
    선망을 받기도 했다. 그외에도 종로경찰서, 동양척식회사에도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김달하,
    박용만 등 수많은 암살과 테러를 감행했다.


    당시 악명높던 마루야마 조선총독부 경무부장은 담화문에서 의열단에 대한 평가는 이랬다.


    “과거 조선에 관한 흉악한 음모로서 이미 폭로된 것은 모두 이들의 소위라 할 만큼 의열단은
    광포한 암살단으로, 경남 밀양 출신의 김원봉이란 청년을 단장으로 하고 있다. 동단체가
    조직된 것은 다이쇼(대정) 9년으로 그후 동인은 상해, 북경, 천진을 구치(驅馳)하면서 항상
    음모를 기획하고 있어서 당국에서도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여러가지로 고심하고 있다.”


    그는 1922년 신채호 선생에게 부탁하여 의열단 활동의 지침이 될 선언서를 간청하였는데
    그래서 마련된 것이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 이다.


    그러나 의열단의 활동만으로는 조국독립을 이루기 힘들다는 판단에 따라 1926년 의열단을
    해체하고 강력한 군사조직을 만들기 위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미임 김원봉의
    명성이 워낙 높아져 있어서 중국측에서는 교관이 되기를 원했으나 그는 다른 사람과 같이
    처음부터 입학하였다.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1927년에 장개석이 국공합작을 깨뜨리는 쿠테타를 일으켰는데
    그의 대원들 대부분이 공산당 지역에서 싸우게 되어 국내에는 김원봉이 공산당원으로 알려지
    기도 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조국독립을 위해서는 이념을 넘어 누구와도 합작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근거는 철저한 반공의 입장에 있었던 김구 주석이 그를 임정의
    군무부장에 임명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만주사변후에 장개석이 적극 협조하여 1932년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만들어 혁명요원을 양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용군을 만든다.


    그리고 그는 조선독립을 위해 범민족적 단체들이 모여야 한다는 취지로 민족혁명당을 만들고
    의열단세력을 비롯, 한국독립당(조소앙, 양기탁), 대한독립당(김규식), 신한독립당(이청천),
    조선혁명당(최동오, 김학규) 등 5개 정당과 재미 4개 단체를 합하여 모두 9개 정당과 단체였다.
    그러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한 김구 세력은 참가를 거부하였다.


    1938년 10월 중국과 일본의 무한전투가 한창일 무렵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을 돕는 비정규군이였는데 전선지구에 나가 대적 심리전에 종사하거나,
    일본군 포로 심문, 일본군 문서 번역 그리고 일본군 점령지역에 파견되어 첩보, 유인, 암살,
    시설 파괴 등의 일을 하였다. 통계적으로 살펴보면 책자 5만권 제작, 배포, 표어 40여만 장,
    적의 통행증 1만장 위조, 일본군 122명 심문, 일본군 문건 95만자를 번역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모두 중국군의 보조역활만이였고 이에 대한 불만을 품은 중요한 인물들
    윤세주와  박효삼이 군대를 이끌고 화북으로 건너가 그 세력이 약해지게 되었다.


    주력부대가 화북의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으로 건너간 후 김원봉은 남은 세력들과 함께
    중경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광복군 부사령으로 취임하였다. 1944년 4월에는 중경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 귀국한 김원봉은 임시정부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좌익쪽과 협상을 하다가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해 지자 임시정부를 나와 좌익쪽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공동의장에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46년 봄 수십년 만에 찾은 밀양 고향을 찾은 김원봉은 열렬한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김원봉이 오는길에는 광목으로 카페트가 깔렸으며, 밀양국민학교에서 열린 환영대회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조선의용대의 활약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읍내 극장에서 상영
    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우익측과 결별한 김원봉은 계속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47년 3월 남로당이
    주동하여 총파업이 발생하자 김원봉이 연류되어 체포되었는데 김원봉을 체포한 사람이
    악명높은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이였다. 결국 김원봉 체포는 애국지사에 대한 모독이라는
    여론이 크게 형성되어 풀려 나기는 했다.


    1948년 김원봉은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4월 남북협상회의에 참가했다가
    북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초대 국가검열상이 되었다. 이후 1954년 노동상을 역임하였고
    195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승진하고 이듬해 그의 탄생 60주년을 기념
    하여 노동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모든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김원봉은 필요하다면 중국 국민당 정부와도, 공산주의와도 손을 잡았고 또 아나키즘에 심취
    되기도 하였다. 이는 그가 사상적으로 혼란을 겪었다기 보다 그 어떤 사상과 이념보다 조선의
    독립을 중요시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가족은 남한에서 친동생 4명과 사촌동생 등
    모두 5명이 죽음을 당했으며 그 역시 북한에서 장개석의 스파이라는 명목으로 숙청되었다.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그는 분단이 낳은 최대의 피해자중 한사람이다.


    님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에는 김원봉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는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였다.
    그는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본
    관헌은 그에 대한 산더미 같은 조사자료를 만들어 놓고 현지의 다른 어떤 한국인보다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체게바라와 비교하여 아쉬운 것은 사진자료가 너무 빈약하다는데 있다. 그 만큼 독립운동사의 기록이 부족했다는 반증이고 역으로 생각하면 앞으로 연구하고 개척할 여지가 많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더 많은 독립투사들의 평전이나 기록들이 발굴되고 발간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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