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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오늘의 역사오늘의 역사(歷史) 2007. 1. 1. 12:40
1월 1일 오늘의 역사
국내
1574 율곡 이이, 선조에게 <만언봉사>저술하여 올림
1883(조선 고종 20) 제물포 개항(인천으로 개명)
1896(조선 고종 33) 양력 사용 개시
1897(고종광무 원년) 최초로 석유 가로등을 서울에 설치
1911 조선독립운동 말살책인 105인 사건 조작
1949 미국, 한국정부를 정식 인정(초대 대사에 무초)
남북한 우편물교환협정 체결
친일파와 부일협력자 처단 위한 반민특위 발족
1951 중공군 6개 사단, 38선 공격 개시
1962 정부 연호를 서기로 바꿈
1963 KBS-TV 유료광고방송 실시, 시청료 징수 업무 개시
부산 직할시로 승격
1964 미터법 실시
1966 한국-일본, 상호 대사 임명에 동의
1971 남산 제1호 터널 개통
1978 동력자원부 발족 (초대 장관 장예준)
1982 한국전력공사 발족
1983 공직자 윤리법 발효
1988 김일성 신년사에서 남북연석회의 제안
1990 KBS 문자다중방송 시작
1991 김일성, 신년사 통해 민족통일정치협상회의 소집 제의
1994 서울시, <서울 정도 600년의 해> 선포
1995 쓰레기 종량제 전국 실시
1801 소행성 처음 발견
해외
1863 미국 대통령 링컨, 노예 해방 선언
근대 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 출생
1901 호주 건국
1910 청 나라 중화민국으로 개칭
1912 중화민국 수립, 손문 대통령 취임, 공화제 선포
1947 중국, 신헌법 공포
1956 수단 공화국 독립
1959 유럽공동시장(EEC) 발족
쿠바 혁명으로 카스트로 집권
1960 카메룬 독립
1967 미국,영국,프랑스,일본 최초의 4원 TV 중계에 성공
1969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제 발족
1972 프레스카드제 실시
1973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 EC에 가입
1978 인도항공 소속 보잉 747기 폭발로 봄베이 근처 바다에 추락, 213명 사망
1979 미국과 중국, 정식 국교 수립
1993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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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007년
단기 4340년
요즈음은 달력에서도 단기연호가 거의 대부분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만큼 우리들의
사고와 생활이 서양지향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정체성도 그만큼
엷어지고 있는듯 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1월 1일은 한해의 첫 시작을 여는 첫날이다. 모두들 이날은 일년동안의 새로운 희망을
다지고 수첩에 계획을 기입하기도 하는 날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음력으로 쇠는
설이 있는 탓인지 그다지 신선함을 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1월을 나타내는 January란 명칭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Janus에서 비롯되었고 Janus는
앞과 뒤에 모두 얼굴이 있는 신으로서 뒤로는 과거를 보고 앞으로는 미래를 본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해서 해가 바뀌는 1월의 신이 되었다.
올해는 돼지해라고 한다. 엄격히 따지자면 12간지의 시작을 적용하는것은 2월달에 있을
"설"이 지나야 한다. 음력으로 또 새로운 한해가 바뀌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음력의 여부를 떠나서 오늘부터는 12간지를 생각한다. 이렇던 저렇던
2007년은 대한민국에 다사다난함을 예고하고 있다.
아마도 그 핵심에는 권력이 자리집고 있고 그 권력을 잡기 위해 이름뿐인 여당과 허울좋은
야당이 총력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들의 설레발에 국민들은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희망을 잉태하는 한해가 되기를 바란다.★
율곡 이이(李珥:1536~1584)가 성리학의 대요(大要)를 적은 만언봉사 [萬言封事]를 올렸다.
1책 53장(張)의 이책은 갑술만언봉사(甲戌萬言封事)》라고도 한다. 이 책은 주로 성학의
대요를 논하였고, 수기안민지요(修己安民之要)와 기천영명지술(祈天永命之術)에도 언급
하였는데 전문(全文)이 율곡집(栗谷集)에도 실려 있다.★
해방후 임시정부 요인들은 미국과 소련등 열강의 방해공작으로 국내로 들어 오지 못했다.
게다가 미군당국은 김구 주석등에게 "개인자격으로 입국"하겠다는 각서를 받고나서 겨우
십여명 탈 수 있는 군용기만을 보냈고 그나마도 다른 임정 국무위원들은 12월이나 되어서야
국내로 들어 올수 있었다.
그동안 국내에선 미국파 이승만(이승만은 미국에서 사는 동안 미국에게 한국을 신탁통치해
줄것을 청원했다가 임정에서 밀려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임시정부 현직은 아니였다.)이
미군에 의해 임정요인들보다 들어와 정국을 선점하고 있었다.
해방된 해인 1945년이 다갈 무렵인 12월에야 국내에 들어왔을때는 이승만은 친일파 관료와
고등계 형사들을 정부와 경찰에 대거 기용했다.
그들은 해방이 되자 전전긍긍하며 지하로 숨었다가 이승만이 대거 기용하자 새로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이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친일과 반일의 대립구도를 친공과 반공의
대립구도로 이끌어 갔다. 반면 북한에서는 임정의 일부인사와 만주,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친일파들을 철저하게 소탕했다.
민족의 정체성면에서는 확실하게 우열이 갈리워진 순간이다.
물론 남쪽이나 북쪽이나 지도자는 미국이나 북한이 내세운 꼭두각시에 불과했지만 니전투구
(泥田鬪狗) 양상의 1945~49년 서울에 비해 빠르게 단일화 되어 가고 있었다. 사실 그런 면에서
1960년대 말까지는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경제가 앞서 있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제대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의식이 싹트고 난 1970년대 부터
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민족의 역사를 통털어 보더라도 자주적일때만 발전을 해왔다.
자주적이라는 말은 곧 정체성을 들 수 있을것인데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일에 있어서만은
해방초기에 북한에 완전히 뒤지고 말았다.
해방후 몇년이 지나서인 1949에 가서야 비로소 친일파와 부일협력자 처단 위한 반민특위가 발족
하였으니 이미 온갖 방법으로 숨거나 권력으로 무장해버린 그들을 처단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광복후 수도경찰청장을 지낸 장택상은 아버지가 대구의 악질적인 친일부호 장승원의
아들이였다. 장승원은 당시 유림의 대가인 허위(許蔿)의 도움으로 경상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당시 벼슬값 20만냥을 주려고 했으나 허위는 "가지고 있다가 훗날 나라가 위태로워 지면 쓰자"고
했다. 나라가 기울자 허위(許蔿)는 의병을 일으켰고 그의 부하인 박상진이 뒷날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이 되었는데 단원들을 시켜 장승원을 찾아가 허위에게 주려던 자금을 기부하라고 했다.
그러나 장승원은 이를 거부하고 일본 경찰에 밀고를 하여 대한광복회 조직이 드러낙 박상진은
체포당해 사형을 당했다.
1917년 1월 격분한 광복회원들에 의해 장승원은 사살되었고 해방후 장택상은 자신의 부하인
노덕술(해방전 일본의 고등계 형사로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검거하고 고문했던 인물이다.)을
시켜 자신의 아버지를 사살한 독립투사들을 좌익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검거했다.
친일파와 부일협력자 처단 위한 반민특위는 사실 국민의 눈을 속이기 위한 허울뿐이였다.
미군정청과 이승만, 그리고 수많은 친일출신 관료들의 방해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었고
결국 그렇게 민족정기의 회복작업은 묻혀 버리고 말았다.'오늘의 역사(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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