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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 의자왕의 왕자 융의 전설, 고왕암
    여행기 2006. 11. 27. 16:39

     

    백제 의자왕의 왕자 융의 전설, 고왕암

     

     

    누누히 주장하는 바이지만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는 과연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역사는 늘 승자에 의해 기록되어 지고 패자가 남긴 기록은 승자에 의해
    영원히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남아있는 역사랑 늘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고 승자의 기록에 남겨진
    패자의 흔적은 늘 악하게 왜곡되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왜곡의 정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의자왕은 무왕의 태자로 젊은 시절부터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로 중국에서 조차
    그에게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기록을 남길만큼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때는 신라가 당나라와 급격하게 가까워 지면서 백제를 압박했고
    그런 국가적 상황의 타개를 위해 정치적 개혁을 단행했다. 중앙집권 체제를 좀 더
    공고히 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일부 왕족들과 귀족들을 섬으로 유배 보내고
    자신의 서자(庶子) 41명에게 정원이 불과 5~6명인 좌평이라는 최고위직에 임명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해 집권층의 불만을 샀다.


    그리고 그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수시로 침공하여 한강부근의 대부분의 성을
    차지하는가 하면 장군 윤충(允忠)을 시켜 대야성(大耶城:지금의 합천)을 공격하여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의 가족을 몰살시키는등 신라에 공세적
    자세를 견지 했다.


    그러나 지니친 친정체제의 구축등으로 정보망이 완전히 흐트러져서 나당연합군의
    목표가 고구려라고 판단하고 방비를 게을리 하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한다.


    이때 일시적으로 의자왕의 아들 왕자 융(중국기록에는 부여융)은 계룡산 아래 높은
    암자로 피신했다가 신라군의 추격으로 잡혀서 당나라군에 넘겨진다. 의자왕과
    아들 부여융, 흑치상지등의 고관들은 중국으로 잡혀가서 며칠만에 세상을 떳고
    그의 시신은 망산이라는 곳에 묻혔다.


    이 망산(흔히 사람이 죽으면 간다는 북망산이 바로 이 망산이다.)에는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 흑치상지 장군, 고구려 멸망후 당에 귀화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남산, 그리고 그 후손들의 묘지가 있다.

     

     

     

     

     

    계룡산 신원사 입구에서 우측길을 따라 약 1km정도 산길을 오르면 공주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좋은 곳에 고왕암(古王庵)이 있다. 이 고왕암은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 융(부여융: 백제의 왕들은 부여氏다.)이 나당연합군에 쫓기어
    이곳에서 7년간이나 머울렀다고 전해지며 묵을 '고(古)'를 써서 고왕암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록에는 의자왕과 같이 압송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잠깐동안 피해 있으면서
    임존성등에서 끝까지 항전하던 백제인들을 복돋운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신라에서는
    추적을 했을 것이고 마침내 이곳에서 생포되어 당나라에 넘겨졌을 것이다.

     

     

    고왕암 오르는 길 바로 아래에 눈에 뜨이는 나무 한그루....

    회색과 갈색이 대부분인 이곳에서 마치 깜깜한 밤의 야광불처럼 눈에 뜨이는 나무다.

     

     

     

    고왕암으로 오르는 마지막 계단인데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는 개 한마리...

    절에 찾아오는 사람들에 익숙해졌는지 얌전하다. 검은색인지라 보는 사람은 위압감을

    느낄만 하다. 나중에 자세히 보니 꼬리가 말린것 하며 귀가 쫑긋한 품세까지 진돗개를

    영락없이 닮았다.

     

    근데 까만색의 진돗개가 있다는 소리는 못들었으니 진돗개는 아닌 모양이다.

     

     

     

    의자왕 20년(660년) 등운대사라는 분이 창건했다는 고왕암은 법당 뒤에 높은 암벽이
    우뚝 솟아 있고, 앞에는 대나무로 둘러싸여 있으며 논산과 공주 일원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법당 뒷편에는 석간수가 흐르는데 큰 바위 자체를 바가지 모양으로
    파내어 고찰의 분위기와 운치를 더해준다.

     

     

    법당의 왼쪽에는 암벽에 움푹 파인 바위굴이 있는데 고왕암굴이라 불린다. 곰을 신성시
    하던 백제의 풍습으로 보아 아마도 경배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공주일원에는 동혈암,남혈암,서혈암 사지등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 절들이 모두 법당

    부근에 동굴이 있었다는 것이다. 북혈암도 있었을것이라고 하는데 아직 그 위치는 비정

    하지 못했다고 한다. 동혈암과 남혈암은 이미 답사했고 서혈사지도 조만간에 돌아볼

    요량이다. 백제의 사찰이라 여겨지는 곳에는 이런 동굴부근에 많은 것으로 보아서 혈의

    개념이 백제의 민간신앙을 고스란히 불교가 전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백제의 이 혈(혈)이라는 개념이 모두 동굴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적 풍수사상과

    그들이 신성시 했던 곰과의 연관성이 있을듯 보여 연구중이다.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마애불... 머리에 탑을 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미륵부처님이 아닌가 짐작한다.

     

    지금은 없어 졌지만 고왕암 부근에 있었다는 마명암(馬鳴庵)은 왕자가 신라군에게 잡혀
    가는 모습을 보고 애마(愛馬)가 슬피 울다 죽었다는 전설이 전하는 암자다.


    일설에는 고왕암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새로운 도읍지를
    찾던 중 머물렀다 하여 고왕암이라 한다는 얘기도 전한다. 실제로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할때 계룡산을 점찍고 직접 둘러보았다고 하니 근거가 없는 말도 아닐것이다.

     

     

     

    멀리 논산의 일부와 공주가 빤히 내려다 보인다. 망국의 설움을 안고 이 자리에 서서

    그 한을 삭혔을 백제의 마지막 태자 부여융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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