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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심의 도량, 용주사(龍珠寺)
    여행기 2006. 11. 20. 15:26


    효심의 도량, 용주사(龍珠寺)

     

     

     

    수원은 조선 정조가 꿈꾸었던 새로운 도시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도시에의 꿈은
    기득권 세력들의 단단한 결집력을 뚫지 못헤 결국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경기도 수원은 그런 곳이다. 당시 실학파의 두뇌들을 총 결집해서 수원의 화성을
    축조하고 서울을 옮기려는 계획을 실행했다. 그는 능행을 빙자하여 자주 수원으로
    나들이를 했는데 실상은 화성의 공사를 독려하기 위함이였을 것이다.

     

    정조의 아버지는 뒤주속에 갇혀 굶어 죽은 비운의 운명의 길을 갔던 사도세자 였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를 복권시키고 그의 능을 화산으로 옮겼는데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정조의 할아버지)에 의해 쌀뒤주에 가두어 진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아버지의 불행을 늘 괴로워 했다.

     

    그러던 중에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하여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고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이라고 하였다. 이 현릉원은 나중에
    융릉으로 승격되었다.

     

    정조는 또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가
    병자호란때 폐사된 자리에 다시 절을 세우고 원찰로 삼았다.


    당시는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시기였는데 왕명에 의하여 대규모
    불사를 국가차원에서 시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할 것이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한때는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기도 했다.

     

     

    용주사는 수원에서 화성쪽으로 가다가 융건릉 부근에 있다. 일주문이 없는 이절은

    사천왕문이 처음 손님을 맞이 한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문화재 관람료를 받는 매표소가 있고 절의 입구가 보인다.

    좌측으로는 박물관이 있다. 우측에는 단풍나무등의 활엽수가 가을을 절정으로

    몰아가고 있다.

     

     

    천보루와 5층 세존사리탑...

    실제적인 가람의 공간은 이 천보루을 지나야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용주사는 왕실의 원찰이였으므로 왕가의 사람들이나 벼슬아치들이 자주 드나 들었고

    그를 수행했던 많은 사람들이 잠시 머물 공간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천보루 앞은 제법 넒게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단풍이 흐드러진 천보루...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깊은 건물인데, 보경당(寶鏡堂)
    사일(獅馹)스님이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를 맡아 대웅보전을 비롯한 145칸의 전각을
    함께 지었다고 한다.
     

    또한 정조의 명으로 실학자로서 박학다식하여 문장에 명성을 떨쳤던 이덕무(李德懋, 1941
    ~1793)가 용주사의 여러 건물에 주련을 썼을만큼 위세를 떨친 절이기도 하다.

     

     

     

    이 절의 가장 중요한 문화재는 역시 부모은중경이다. 물론 국보로 지정된 범종도 있지만

    범종이란 다른 여늬 절에도 있다. 그러나 부모은중경은 이 용주사만의 독특한 문화재다.

     

    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통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정조는 부모은중경을 조성하여

    용주사에 하사를 했고 그것은 아직도 소중한 유물로 전해진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부모은중경 탑이다.

     

     

     

     


    대웅보전의 계단을 올라 왼쪽을 향하면 범종각이 있다. 이 전각안에 있는 범종은 국보
    제120호로 제정되어 있다.

     

    범종을 살펴보면, 종의 정면 아래 부분에 연꽃을 아로새긴 당좌(撞座, 종을 치는 부분)와
    종신의 양쪽 옆에 자리한 비천상을 대할 수 있습니다. 고려초기의 범종이라고 하지만
    드물게 보는 큰 규모이며 신라시대의 범종 양식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는데, 범종의
    정상부에는 신라 종에서 볼 수 있는 용뉴와 용통이 있으며, 용머리는 종 정상부의 보주
    (寶珠)를 물어서 두발로 종의 정상부인 천판(天板)을 잡고 종 전체를 들어 올리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 한 구름 석(釋) 반야(般若)가 2만 5천근을 들여 조성하였다.
                                                   금상(今上) 16년 9월 일 사문 염거(廉居) 연기(緣起)

     

    위와 같은 명문이 남아 있어서 이 범종이 갈양사가 세워지던 해인 신라 문성왕 16년에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연기념물인 회화나무 한 그루...

    고사위기를 맞아 여러가지 살리려는 노력이 가해지고 있다.

     

     

     

    유물 박물관과 용주사의 보관 문화재중 으뜸인 부모은중경 목판...

    부모은중경은 이 용주사만의 특색적인 문화재이다. 그렇다보니 이 절에서 진행하는

    템플스테이도 부모에 대한 효(孝)가 중요시 된다.

     

     

     

    용주사의 가을 #1

     

     

    용주사의 가을 #2

     

     

    용주사의 가을 #3

     

     

    용주사의 가을 #4

     

     

     

    용주사의 가을 #5

     

     

    용주사의 가을 #6

     

     

    용주사의 가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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