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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룡산의 절다운 절, 신원사
    여행기 2006. 11. 27. 12:19

     

    계룡산의 절다운 절, 신원사

     

     

    절다운 절이라는 다소 어폐가 있는 말을 글제목으로 뽑았다. 계룡산에서 이름 날리는

    동학사와 갑사는 규모가 크고 문화재도 많지만 반대급부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적지않는 부분에서 고즈넉함과 탈속(脫俗)의 정도가 옅어졌다는 것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원사는 조용하고 고즈넉하며 세상을 벗어나 있는 산사의 느낌을 가장

    잘 느낄수 있는 그런 절이다.

     

     

     

    계룡산 국립공원 매표소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3시 30분쯤이였으니 좀 늦은감이 느껴진

    시간이기는 했지만 신원사앞의 상가들은 개점휴업 상태였다.

     

    그나마 최근에 지어진듯한 식당에만 조금 사람들이 있을뿐이고 집에서 기른 순무 몇단에

    단감 몇무더기 올려 놓은 좌판을 지키는 노인 몇 분만 두터운 목도리로 찬바람을 맞고

    앉아 있을뿐......

     

    몇몇 단풍나무가 물이 곱게 들어서 이 신원사를 찾는 손님들을 마중하고 있다.

     

     

     

    신원사 입구... 오른쪽 길은 금룡암, 고왕암등을 거쳐 계룡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일주문의 역활를 동시에 하고 있는 사천왕문이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하늘을 네방향을 지키는 신장이 있다고 한다. 각 하늘을 관장하고 있는 이들은 부처님의

    성전을 지키는 임무도 맡고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그야말로 부처님의 세계이다. 사천왕들이 하나같이 우락부락한 눈에다

    위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사바에서의 때묻은 마음을 내려 놓고 깨긋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진리세계에 들어가라는 뜻일 게다.

     

     

     

    신원사에서 큰 스님께서 생전에 참선에서 잠깐 쉴때 앉아 세속을 굽어 보시던 그런

    자리에 그 의자 그대로다. 큰 스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조실스님이나

    이 절 스님들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분이셨을 것이다.

     

    알속에 있으면 알이 둥근지 네모인지 알수 없다. 알밖으로 나와야만 알이 비로소 둥근

    것임을 아는 것처럼 깨달음, 즉 마음을 본다는 것도 같은 이치 일 것이다.

     

     

     

    사천왕문을 지나서 대웅전에 이르는 길...

    은행나뭇닢들이 깔린 길이 제법 운치로워 보인다.

     

     

    가을과 잘 어울리는 범종각

    범종은 새벽과 저녁으로 울리는데 우주의 모든 생명들이 이 소리를 듣고 삿됨에서

    깨어나 모두 성불에 이르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는 소리다.

     

    자신의 깨달음을 최우선으로 주장하는 남방의 소승불교와 달리 북방의 대승불교는

    나 자신 뿐만아니라 우주만물의 모든 인연있는 것들을 제도하고자 한다.

     

     

     

     

    계룡산은 한때 조선의 도읍이 들어설수도 있었던 영험한 산이다. 이성계의 명을
    받은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하나같이 최고의 길지로 계룡산 일대를 꼽았고 실제
    궁궐을 짓는 공사까지 시행했으나 너무 남쪽으로 치우쳐 있고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반대가 극심하여 중단하고 지금의 서울로 도읍을 정했다.


    계룡산이 영험한 산이라는 소문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무속행위가 많았던 산이기도
    한데 이 계룡산의 3대 사찰로 동학사, 갑사, 그리고 신원사를 꼽는다. 그러나 신원사는
    규모면에서 동학사나 갑사에 비할바 못된다. 그러나 고즈넉하고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은 면에서는 가장 절다운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11년(651년) 열반종을 개창한 보덕(普德)화상이 창건한 뒤 고려
    성종 때 여철(如哲)화상이 대웅전을 중수했고, 이후 충렬왕 24년(1298년) 부암(浮庵)
    화상이 중건한 데 이어 조선 태조 3년(1394년) 무학(無學)대사가 중창하는 등 여러
    차례의 중수와 중창을 거듭하다 1946년 만허(滿虛) 스님이 중수, 현재에 이르고 있는
    고찰이다.

     

     

    법당안 불단앞 위에는 궤불을 보관하는 거대한 나무곽이 올려져 있다.

    괘불은 야외에서 진행하는 행사시에 내거는 걸게그림의 일종인데 그 길이로

    보아 신원사의 괘불의 크기가 만만치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명부전 뒤에 있는 스님들의 거처...  얼기 설기 만든 담장과 대문이 오히려 멋스럽다.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완전히 소실된 이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온 신원사의 원래
    위치는 중악단 앞 넓은 밭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악단 앞 넓은 평지에는 5층 석탑이
    하나 동그마니 서있는데 그곳이 신원사의 중심이였다고 한다.


    이 5층석탑은 신라의 석탑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현재 2층 기단 위에
    4층 탑신부만 남아 있다. 1975년 해체 복원할 당시 1층 탑신의 사리공에서 사리구를
    비롯하여 중세 중국의 동전등과 황유(黃釉)·주자(注子)·사리병 등이 발견되었다.

     

     

     

    신원사 대웅전 앞의 단풍나무는 마지막 가을의 미련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을들의 몸부림으로 바짝 목이 탄 단풍들이 마침내 지쳐버려 노랗게 탈색된

    모습으로 바람 냄새를 맡고 있다.

     

    "흠~ 북풍의 냄새야! 이젠 우리도 가야 하는 거야. 미련 갖지 말자구~"

     

     

     

     탑을 쌓는 다는 것.....

    그것은 마음을 한겹 한겹 쌓아가는 것일 것이다. 누군가가 산길을 걷다가 아니면

    산사의 구석진 곳에 돌 하나를 놓고 마음 하나를 놓고 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와서

    그 위에 또 하나의 돌과 또 하나의 마음을 얹어 두고 간다.

     

    신원사에 쌓아둔 가지 가지의 마음들 또한 가을조차 떠나감을 아쉬워 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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