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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눈 내리는 완주 화암사 우화루(雨花樓)
    여행기 2006. 12. 5. 17:20

     

    꽃눈 내리는 완주 화암사 우화루(雨花樓)


     

     

      텔레비젼의 화면에서는 밝은 색의 옷을 입은 기상캐스터가 충청이남과 서해안의 눈소식을 전하고 있다. 겨울 여행길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조금 찔끔거려지긴 하지만 일단은 나서고 보는게 주말여행의 묘미이기도 하다. 지방도로변에 비닐천막을 친 과일가게 앞에 잠깐 차를 대고 밀감 한봉지를 샀다. 톡 터지는 시큼함과 달짜기근함이 아산에서 논산을 거쳐 완주에 이르는 동안 목마름을 적셔 줄것이다.

     

     

     

     


      사람이 무었엔가 의지하기 시작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무었인가가 사그라지게 마련이다. 길눈이 밝다고 지인들에게 소문이 자자했었는데 몇년전부터 문명의 이기인 네비게이터에 의존한 결과 길눈이 많이 어두워졌다. 분명 지도를 보고 제대로 찾았다 싶었는데 잘못 들어온 길이였다. 옆지기가 지도를 보며 아무래도 이길이 아닌것 같다고 했지만 나는 길눈에 대한 자만심으로 맞다고 우겼지만 불과 5분만에 두손 들고 말았다. 17번 국도에서 소로를 끼고 들어왔는데 비포장 산길을 꼬불거리며 넘어왔는데 느닺없이 다시 만난 17번 국도... 결국 네비게이터의 도움을 받고서야 화암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생각이 고착되면 안되는데 가끔씩 생각이 고착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때 슬퍼진다.

     

     

     

     

     

      화암사 올라가는 길은 바닥의 흙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낙엽으로 덮여 있었다. 계절은 어김이 없다. 작년의 가을이 보여준 풍경을 올해의 가을은 변함없이 보여주지만 내가 보여준 작년 가을의 모습과 올해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이마에 주름이 한줄쯤 더 늘어 났고 살이 불어서 턱밑에 이중살이 보이기도 한다. 귀밑에서 머물던 하얀머리도 이제는 귓볼의 위쪽으로 상한선을 올려 결국에는 눈에 좋지 않다는 속설이 있음에도 염색을 해야만 했다. 늘 변해가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의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고 사람의 행동들이다.

     

     

     

     

      계곡을 가로질러 놓은 속칭 '아나방'이라고 하는 구멍철판 한장도 사람에 의해 사람을 위해 자연이 변한 것일 게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나는 오늘 이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결국 사람에 의한 자연의 변화에 나도 한 몫하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올라 가서야 마침내 사람을 만났다. 사람에 치여 사는 도회의 생활에서 해방되자 말자 찾아 오는 적막감에서 다시 만난 사람이 그리 반가울 수 없다. 다시 도회로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모습을 감추고 나서 조금 있으니 개 한마리가 나타났다. 그놈은 냅다 달려와서 앞발을 내 허리에 가져다 대며 마치 제 주인을 만난 양 난리다. 그리고는 한참 내려가서 다시 올려보기를 서너번 만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찰에 비하면 전각 두어개에 지나지 않을 이 자그마한 화암사로 오르는 길은 적막해서 마치 설악산의 어느 골짜기를 오르는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구비진 산길처럼 철사다리가 보인다. 여름이라면 제법 장맛비에 물떨어짐이 장관일 폭포를 가로 지르며 제법 긴 철사다리를 오른다. 오른쪽도 절벽이고 왼쪽도 또한 절벽이다. 간간히 눈빨을 날리는 하늘이 숨을 쉬는지 파란 하늘을 토해 내서 고목의 앙상한 가지에 걸어 두기도 한다.

     

     

     

     

     

      마침내 화암사 우화루(雨花樓) 앞에 섰다. 여느 절처럼 단청의 울긋 불긋함은 찾을 길 없고 기둥들도 서까래도 문틀도 벽도 모두 나무의 원초적 색깔 그대로 발가벗은채로 있다.  지금은 공사용 자재로 임시 계단을 만들어 놓았지만 본디 출입문은 마치 해인사의 대장전들어가는 문처럼 둥그스럼 하다. 절의 건물에 단청을 하는 이유는 나무가 외기에 노출되어 썩지 않도록 보호하는게 목적인데 이 우화루는 단청없이 나무결을 그대로 들어낸 자태가 더 마음으로 와 닿는다.

     

     

     

     우화루에서는 하늘과 잇닿은 기와지붕에도 하나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 민들레와 갖가지 식물들도 한 생을 살았고 그 식물들에 의탁하고 삶을 사는 곤충들도 한 생을 살다 갔으리라. 기와의 흙에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게 되면 건물을 상하게 하여 해마다 제거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버려진 폐가와 사람이 사는 건물의 차이를 지붕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몇백년 묵은 문화재에 대한 푸대접이 이만 저만 아니다.

     

     

     

      오래전에 문화재가 제법 많은 어느 절의 스님이 한 말이 쟁~하고 바람처럼 스친다.


    "문화재법이 우리는 손도 못대게 하지요... 기와 한장도 마음대로 못갑니다... 그렇다고 제대로 관리도 않으면서~"

     

     


      화암사는 본전인 극락전과 적묵당, 우화루와 조사당이 동서남북 ㅁ자형으로 건축되어 불명산(佛明山)의 품안에 아늑한 모습을 하고 있다. 화암사는 기록에 의하면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등이 수도하였다고 하므로 신라 문무왕 이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찰들이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또는 도선국사등과 얽힌 내력을 내세우므로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1981년에 우화루를 해체,수리 할 때 발견한 기록에는 조선 숙종 37년(1711)까지 여러차례 수리하였음을 밝히고 있어서 이 절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화암사우화루(花巖寺雨花樓)는 보물  제6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우화루는 다양한 역활을 하고 있는데 극락전의 정문 역활을 하기도 하고 큰 행사가 있을때 강당으로 쓰이기도 하며 전란등으로 외적이 침입했을때는 성문의 역활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우화루는 잘 바깥에서는 2층건물이나 절 마당에서는 일반 건물과 같은데 우화루의 현판은 절마당쪽에서 보인다. "비가 꽃이 된다"라는 이름의 우화루는 아마도 우화루에 앉아서 계곡쪽으러 내려보면 햇살이 비치는 쪽이라 여우비라도 오면 햇볕에 반사되는 빗방울이 마치 꽃 같아서 지은 이름이지 싶다. 마침 내린 눈빨이 그러 했으니까 말이다.


      이 멋스러운 이름의 우화루는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세운 것으로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한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1층은 기둥을 세워서 바깥과 통하게 하고, 뒤쪽에는 2층 마룻바닥을 땅과 거의 같게 놓아 건물 앞쪽에서는 2층이지만 안쪽에서는 1층집으로 보이게 한 건물이다

     

     

    국가지정 보물인 우화루에 새겨진 흔적들...

    우리나라의 문화재에 대한 교육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반증해 주고 있다. 철없는 아이들의 치기어린 장난이라고 지나치기에는 부끄러운 현실이다.

     

     

     

    보물 제663호인 화암사 극락전(花巖寺極樂殿) 이다. 조선 중기에 세워진 건물인데 중앙 종도리 장여에 기록된 상량문(上梁文)에 의하면 1605년(선조 38) 6월 8일 건축된 것으로 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잡석 기단위에 자연석 덤벙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지름 약 60㎝되는 기둥을 밑에서부터 민흘림으로 세운 단층 맞배지붕 목조건물이다. 건물의 정면어간(御間 ; 中央)에는 4짝분합[四分閤] 빗살문, 좌우 협간(夾間)은 3짝분합[三分閤] 빗살문이 달려있다. 양 측면에는 앞쪽으로 출입문을 1짝씩 달았고 나머지는 벽체이며, 뒷면 서쪽협간 및 중앙간 벽 중앙에 문짝을 달았던 흔적이 있다.

     

     

     

     

      극락전은 소박한 불단위에 부처님을 모셨고, 그 위에 3개의 전각(轉角)이 있는 닫집을 조성하고 그 안쪽에 비룡(飛龍)조각을 달았다. 이 건물의 특징은 이출목(二出目) 두공(頭工) 위에 하앙(下昻)을 받친 점이다. 이러한 하앙구조는 삼국시대부터 써온 기법으로, 하앙부재를 지렛대같이 이용하여 외부 처마를 일반 구조보다 훨씬 길게 내밀 수 있으며, 남아 있는 건물로는 유일한 것으로 알려진다.

     

     

     

     


      일본사람들이 반도로 부터의 건축술 전래를 자존심 상해하면서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축기술이 직접적으로 전해졌다고 주장하면서 그 예를 하앙식 구조의 건물이 중국과 일본에는 있으나 한국에는 없음을 들었으나 화암사에 하앙식 건물이 존재함이 밝혀진 후 지금은 건축기술의 한국으로부터의 전래를 인정하고 있다고 하니 우리 건축사에 있어서 이 화암사 극락전의 중요성이 새삼 느껴진다.

     

     

     

    또 하나 특이 한것은 여느절의 현판과 달리 극.. 락..전..의 현판은 한글자 한글자가 따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판 역시도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것이다.

     

     

    수리를 했다고 한다. 그때 외국에서 수입하여 교체한 기둥이 심하게 갈라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나무라야 우리 기후에 잘 맞아서 오랫동안 간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기둥재로 사용할 나무를 벌채한 후에 소금물에 몇년을 담그우 두는등의 전처리에 정성을 기울인다.

     

     

    이것이 원래의 기둥이다. 세로로 갈라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문화재 보수는 가능한 원형을 살려서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런 생각없이 그냥 당장의 눈가림만 하려고 하는 문화재 담당 공무원들의 철밥통이 이런 문화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지방문화재인 극락전 안의 동종(銅鐘)은 일제시대때 일본헌병들이 전쟁의 무기로 쓸려고 종을 징발하려고 몰려오자 저절로 울려 스님들이 종을 땅속에 묻었다가 해방 후에 꺼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하마트면 녹여져 생명을 빼앗는 도구가 될뻔한 종이다. 결국 물도 독사가 먹으면 독이되고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 세상의 일이다.

     

     

     
      전설에 의하면 화암사(花岩寺)라는 이름을 얻게된 연유가 절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커다란 반석 위에 하얀 모란꽃이 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모란꽃은 불경에 나오는 전설의 새 관음조가 물고 와서 뿌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모란꽃이 필때 휘황한 서광이 나와서 당나라에 도달했는데 당나라 황제가 이곳까지 사신을 보내 그 꽃을 따오게 하여 병에 신음하던 공주를 치료했다는 전설이 있다.

     

     

     


      절 옆으로 잠깐만 발품을 팔면 화암사의 내력이 적힌 비석을 만날 수 있다. 현재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이 화암사 중창비(花岩寺 重創碑)에는 조선 세종때 원래 화암사의 옛터에 중창하였음을 기록한 것으로 선조 5년(1572년)에 세웠다. 이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조선초 관리로 있던 성달생이라는 이가 절을 세우려고 터를 찾던 중에 신라시대 화암사가 자리했던 이곳이 산좋고 물이 맑아 적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절터의 동쪽에는 원효가 도를 닦은 원암대(元岩臺)가, 남쪽에는 의상이 도들 닦았다는 의상암(義湘岩) 있었다고 전해 지는 곳이다. 성달생은 이같은 말을 듣고 세종 7년 (1425) 이곳에 화암사를 다시 세웠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예전에 다니던 길을 찾았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 다녔을 길이다. 조금의 불편함도 참아내지 못하는 요즘 사람들에 맞추어 옆으로 철계단이 새로 생겼지만 운치는 덜해졌다. 이 길이 다소 고생스럽기는 할테지만 수행이라는 범주에 절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도 포함시킨다면 이 길도 좋은 길이 되기도 할 것이다.

     

      절 뒷편으로 임도가 있어서 그쪽을 이용하면 절까지 차량이 들어 갈 수 있다고 한다.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우고 나무를 베어내어 불명산의 속살을 드러내 만든 임도다. 자꾸만 편해지는 세상인데 사람들에게서 여유는 왜 사라져 가는 것일까?

     

     

     

    오를때 보지 못하고 스치고 말았다. 길섶에 바로 있었는데도 말이다.

    부도 2개가 나란히 서서 산바람을 맞고 있다. 흐릿하게 음각된 몇 글자로 겨우 이 부도 주인의 법명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부서르져 그나마도 알 수 있는 부도도 있다.

     

     

     

     

    사하촌(寺下村)...

    완주는 요즈음 들어 곶감으로 유명해졌다. 화암사로 들어가는 지방도로 변에도 곶감을 말리는 덕장이 군데 군데 서있다. 공동작업장의 덕장은 그 규모도 상당히 크다.

     

    시골냄새가 물씬 풍기는 흙담에 마음이 동해서 차를 대고 찾아 들어가 곶감 한접 오만원을 주고 샀다.

     

    이 집 마당에서 아까 산길에서 만났던 누렁이를 다시 만났다. 그놈은 반가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앞발을 겅중하게 들고서는 달려든다. 주인은 오랫만에 찾아온 곶감손님을 놓칠세라 누렁이를 닥달했다. 한켠에는 이 놈과 꼭 닮은 또 다른 누렁이가 줄에 매여 꼬리를 흔들며 물끄러미 보고 있다.

     

    "이놈이 매일 여 와서 살아요..원래 저놈이 절에서 살았는데 스님이 줘서 데려왔지요.. 그래서 그런지... 처음에는 저기 매어놓은 놈이 매일 절로 올라기길래 묶어 두었더니 이번에는 이 놈이 매일 내려오는 거여...참내..."

     

     

    오늘은 우화루에 눈이 꽃이 되어 내렸다. 비도 눈도 꽃이 되는 세상~ 극락일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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