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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7호, 봉선홍경사사적갈비여행기 2006. 12. 11. 14:59
국보 제7호, 봉선홍경사사적갈비
지금의 천안의 성환지역은 예로 부터 교통의 요충지중의 하나였다. 여시서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천안 삼거리가 있어서 영남이나 호남으로 오가는 객들이 갈라져
가거나 합쳐저 한성을 거치거나 여기서 가까운 둔포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가기도
했던 곳이다.지금의 수도권 전철 성환역에서 멀지 않은 곳인 봉선홍경사갈비 앞의 평야다. 다른 곳에
비해 지금도 낮은 지역인 이곳에 예전에는 갈대들이 무성했다고 한다.
이 곳은 30여리 남쪽의 천안 삼거리와 북쪽의 평택, 그리고 바닷가쪽으로 둔포의 사이에
끼어 있는 형세여서 인가도 드물었으며, 잡초와 갈대가 우거져 가끔 도적이 출몰하여
행인을 괴롭혔다고 한다.
개성이나 한성에서 삼남지방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던 탓에 오가는 사람의 편의를
제공하고 도적의 창궐을 막기 위해 고려 현종은 이곳에 절을 지을것을 명하여 병부상서
강민첨을 감독으로 현종 12년(1021)에 200여칸을 완공하였다.
봉선이라는 말은 고려 현종의 부왕 인종이 법화경을 듣고 느낀바 있어 절을 창건하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거하여 그 유지를 받들었다는 뜻으로 사찰명앞에 봉선을
붙였다. 즉 왕실에서 지은 절이라는 뜻이다.
또 절의 서쪽에 80칸에 이르는 공영통화원이라는 객관을 지어 행인의 편리를 도모했다.
봉선홍경사는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번성했으나 우리나라 최초의 계급투쟁이라 할 수 있는
망이.망소이의 난때 불타 없어지고 비만 남았다. 비신에는 봉선홍경사갈기라 횡서하였으며
비문은 해서로 음각 하였는데 최충이 찬하였고 백현례의 서로 되어 있다.
비신을 받는 귀부의 어룡이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이 방향은 서해를 통해 중국을 바라보는 형상인데 고려가 개성을 수도로 하여 해상무역에
많은 공을 들인것과 무관하지 않다.
고려를 세운 왕건이 해상무역으로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음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
이 어룡이 바라보는 방향이 둔포인데 동학혁명을 진압하러 왔던 청나라 군대가 상륙을
한곳이 둔포이기도 할 만큼 중국으로 가는 교통로와 가가운 곳이기도 했다.
비의 옆면에 새겨진 문양의 화려함이 돋보인다.
비문이 새겨진 앞면도 마치 액자틀처럼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런 비석은 참으로 보기
힘든 것이다.
어룡의 꼬리부분도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다.
지금은 무너져 연대도 방식도 알 수 없는 탑....
어쩌면 비가 세워질 무렵보다 더 앞섰을지도 모르는 탑이지만 겨우 기단만 남기고 있다.
국보 제7호 봉선홍경사사적갈비는 1번국도 변에 있어서 찾기가 수월하다.
천안에서 평택으로 가는 1번 국도의 성환역 부근에 있는데 과적차량 검문소를 지나면
바로 국도변에 위치해 있다.
★★★★★
여기서 잠깐 이 봉선홍경사를 불태워 없앤 망이.망소이의 난에 대해 알고 가자. 사실 이 난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일어난 계급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역사에서 너무 작게 취급하고
있는 사건중의 하나다.
고려때는 관노라던지 종들을 집단적으로 모여살게 했고 이들이 사는 지역을 '소'라고 했다.
충남 공주에는 명학소기 있었고 극심한 수탈에 시달리던 관노출신의 망이.망소이 형제는
계급해방을 내세우며 천민들을 모아 고려 명종 6년(1176)에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스스로를 산행(산행) 병마사라 칭하며 단번에 공주를 함락해 버린다. 마침 조정은 조위충의
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때였고 망이.망소이의 세력도 상당이 컸으므로 무마책을 쓴다.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새로운 현령과 현위를 파견하는 등의 회유책을
실시했으나 점차 정부의 기만책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재차 봉기한 이들은 예산현을 공략하여 감무를 살해하고 덕산 가야사를
점령하고 아산과 청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청주목을 점령하게 된다. 북으로 진격을 계속해
황려현(여주), 진주(진천)을 점령하면서 홍경사도 점령하여 불태우고 승려 10명을 죽인다.
기세를 몰아 개경부근까지 진출하였으나 조위충의 반란을 수습한 조정의 총력전으로 인해
명종7년(1177) 7월 망이. 망소이 형제가 정세유에게 체포되면서 종결되었다.
일반적으로 많이 발생한 농민들의 민란과 성격이 다른 점은 가혹한 수탈에 대한 반발과
달리 천민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신분해방운동의 성격이 더욱 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천한 신분은 후삼국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후백제의 양민이나 귀족들이
고려의 출발이후 패전국의 멍에와 함께 신분하락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더욱 더
큰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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