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공자의 식인(食人) 풍습
    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06. 10. 26. 14:23


    공자의 식인(食人) 풍습

     


    공자(孔子)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특별히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세계의 4대 종교의
    하나로 들기도 빠지기도 하는 유교(儒敎)의 창시자이다. 유교가 종교나 학문이냐 하는
    문제가 여전히 종결된 사안이 아니지만 동양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면
    공자도 역시 인류의 큰 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식인(食人)을 했다고 전해져 온다. 물론 그 시대적 상황으로 보면 당시
    중국사회에 식인풍습이 보편화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
    행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원시시대부터 부족간의 전쟁에 있어서 복수,
    또는 주술적 행위의 한가지 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나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에서도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곳의 식인 풍습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주술적인 의미가 크다고 하지만 근세까지 식인 풍습이 하나의
    식도락으로 남아 있었던 곳이 중국이다.


    중국의 인육풍습은 수호지에서도 나오는데 양산박의 주귀란 자가 양산박의 규칙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나온다. " 으슥한 곳에 잠복하고 있다가 부자가 오면 잡아서
    귀한 물건은 빼앗고 그 살은 고기로 먹고 기름은 등잔불에 쓴다" 라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같은 패의 이규는 사람을 죽이고 나서 인육을 먹었는데 너무 많이 먹어서 눈알이
    붉어 졌다는 장면도 나오고 무송이 유배가는 길에 들린 주점에서는 여행객을 죽여서
    그 고기로 만두를 만들어 파는 가게 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중국집의 간판에 위에 빨간 리본을 다는데 그 연유가 근세에 까지
    인육으로 음식을 만들어 파는 가게의 간판에서 유래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특히 중국에서는 흉년이 들면 가족들 조차도 서로 잡아 먹었다고 한다. 중국이 역사상
    가장 문화국이였음을 자랑하는 당나라, 그중에서도 측천무후 시절이 식인문화가 절정에
    달했다고 하는데 장에서 인육을 두발달린 양고기라는 이름으로 팔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이때는 인육이 너무 많이 시장에 나와서 다른 고깃값이 폭락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병중에 자기 노비를 죽여서 고기를 먹은 독고장,친구를 해로 만들어 먹은 설진, 첩을 삶아
    먹은 고찬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당시의 '철경록'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조선의 관료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자치통감의 '당기'편에는 관리 내준신에게 식인형이
    내려졌는데 백성들이 다투어 내준신의 살을 산채로 잘라 먹었는데 순식간에 동이 났고, 살이
    떨어지자 눈알을 도려내고 안면의 가죽을 벗겼으며 배를 찢고 심장을 끌어내니 진흙같은
    찌꺼기만 남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때는 절도사들이 인육을 가공하는 기구를 가지고 다니며 종종 마을을
    습격해서 나라의 정식 군대였던 절도사의 부대가 훑고 지나가면 마을에는 아무것도 남지를
    않았다고 전해진다.


    지금 중국에서는 노신(루쉰(魯迅))과 공자(孔子)를 두고 누가 중국정신의 대표자인지를 두고
    설왕설래를 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네티즌들 간에도 이 문제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고
    하는데  노신(루쉰(魯迅))은 고대 국가 수립부터 지금까지의 중국사회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 라고 비판했다. 그는 가혹한 수탈과 인구 증가가 가져온 식량위기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작용을 통해 스스로 제어하며 자생하거나 자멸해 갔다는 것이다.


    지금은 중국도 애써 부정하고 있지만 동양은 물론 세계에서도 역사서중의 정사로써 평가받고
    있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도 식인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신하인
    구후의 딸이 미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아내로 삼았다. 주왕은 아내가 너무 정숙하여 자신의
    성적취향에 맞지 않자 그녀를 살해하고 그녀의 아버지인 구후를 '해'로 만들어 먹었다. 신하인
    곽후가 이를 간하자 곽후를 포(말린 고기)로 만들어 먹었다. 이 주왕이 제거 되는 과정도 또한
    식인풍습과 관련이 있는데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인 경씨에게 음심을 품었다가 거절 당하자
    그녀를 죽인다음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여 먹게 하는데 이에 격노한 황비호가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제거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식인의 예는 있지만 다만 복수의 표현이였을 뿐이였다. 조선중반 임진왜란때는
    권율장군과 정기룡 장군이 왜군의 생간을 내어 씹어 먹은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전쟁에 임한
    장수로써 군사들에게 복수심을 고양시키기 위한 행위였을 따름이였다.


    구한말 황현선생의 '매천야록'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에서 홍종우의 암살로 김옥균이 시신으로

    돌아와 효수를 당한 마포나루에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서 돌을 던지고 심지어는 갑신정변때

    죽은 유아무개의 아들 유아무개는 시신에서 배를 갈라서 간을 꺼내서 씹었다고 하니 일본을 등에

    업고 개혁을 하려고 했던 그들에 대한 일반민중들의 복수의 표현이였을 것이다.


    동양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에 대한 식인풍습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의 중국의 일반적
    사회현상이였다고 생각하면 어느정도 수긍이 가는 일이기는 하다. 현대에 들어서 공자의 사상은
    결국 지배자의 입장옹호만을 위해서 사용되어 졌고 교육받지 못한 많은 피지배자들이 인간답게
    사는 길에 대해서는 외면했다는 비판도 있는것이 사실이다.


    공자가 살았던 시기는 중국의 각처에서 수많은 작은 나라들이 군웅활거를 이룰 때였다. 무력으로
    나라를 세운 지방의 군웅들은 통치를 위해 지식인이 필요했고 따라서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들이 전국 각지로 역활을 찾아서 떠나갔다. 그러나 필요이상으로 정치에 간섭을 하다가는
    쫓겨나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당시의 중국땅은 은나라 때부터 전해 내려온 '해','포'와 같은 형벌이 있었다. '해'는 죄수의 살점
    을 도려내어 육젖의 일종으로 만들어 죄수나 일반에게 먹게 하는 것이고 '포'는 살점을 도려내어
    말린 다은 찢어서 먹게 하는 형벌이다. 마침 공자가 평소에 아끼던 제자 하나가 어느 작은 왕국에
    대신으로 있다가 바른말을 간해 왕의 노여움으로 죽었다. 그 왕은 '해'를 만들어 평소 '해'를
    즐겼던 공자에게 보냈고 모르고 맛있게 먹던 공자에게 다른 제자가 "누구 누구의 해입니다" 라고
    알려주자 공자는 대경실색해서 나머지 '해'들을 엎어 버렸고 그 이후로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식인풍습이 나쁘다는 것을 당시에 알았던 그가 식인풍습의 그름에 대하여 기록에 남기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아쉽다.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라면 옳은 것을 고양하고 그른 것을 고치는데

    일조해야 할것이기 때문이다.


    "인자한 사람은 자기가 나서고 싶으면 남을 내세워 주고 자기가 발전하고 싶으면 남을 발전시켜
    준다. 가까운 자기를 가지고 남의 입장에 비겨볼 수 있다면 그것이 인(仁)의 올바른 방향이라
    하겠다."  이 글은 <論語>의 옹야편 28장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궁금하다. 그의 인(仁)은 얼마만한 깊이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의 사상이 결국에는
    후세사람들이 덧씌운 녹슨 속껍질은 아닐까? 공자! 그가 정의한 사람(人)이라는 단어 속에는 
    피지배자, 민중도 과연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