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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필 신인상-마음의 생채기로 남은 꽃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07. 4. 27. 10:53
<월간 한국수필 2007.5월호 통권147호 신인상 당선작>
마음의 생채기로 남은 꽃
김 대 근
꽃이 사람의 마음에 주는 이미지는 대부분 좋은 것이겠지만 사람에 따라 슬프거나 안타까움의 이미지도 있을 것이다. 다른 글에서 좋은 추억으로 간직된 꽃들에 대하여 적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나쁜 이미지이거나 슬프고 애잔한 이미지의 꽃들에 대해서 적어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나는 장미를 싫어한다. 그러다 보니 결혼기념일에 마지못해 장미 몇 송이를 사게 되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가능한 냄새를 맡지 않으려 하니 항상 어정쩡한 자세가 되곤한다. 사람들은 내가 장미를 싫어하는 꽃의 1순위로 꼽으면 외계인을 보는듯한 눈초리가 된다. 만인이 좋아하는 장미를 싫어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어느새 사랑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장미. 나는 장미가 싫다. 그 진한 원색이 싫고 누리게 느껴지는 냄새가 싫다.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장미를 사야 하거나 받아야 하는 때도 있지만 도저히 장미에만은 내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중학교때 무협지의 주인공들에 대한 동경이 지나쳐서 모래주머니를 정강이에 차고 다녔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하교 때는 버스종점까지 30~ 40분가량을 걸었다. 물론 다른 목적도 있기는 했다. 버스 종점을 가려면 ‘하야리야’라는 이름의 미군부대 담장 아래를 거쳐야 했다. 따닥따닥 붙은 슬레이트 집들에는 미군들과 살림을 차린 여자들이 많았고, 그네들의 대문 옆에는 정사각형의 시멘트로 만들어진 쓰레기통이 하나씩 있었다. 친구와 나는 일주일에 한 번쯤은 ‘양공주집’이라는 은어로 불리던 이 집들의 쓰레기통을 뒤지곤 했다.
그렇게 쓰레기통을 뒤져 얻은 전리품은 포르노 잡지와 역시 포르노 소책자 같은 것이었고 그 전리품들을 다음날 학교에 풀어놓을 때는 온통 주변이 난전(亂廛)이 되고는 했다. 한 장씩 맛 뵈기로 넘겨질 때마다 함성들이 귓전을 울리곤 했다. 제본도 한 장씩 손상 없이 떼어 낼 수 있어서 하굣길의 아이스케키 값으로는 풍족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내셔널리스트를 자처하는 내가 가진 미인의 기준은, 아이러니 하게도 이국의 그녀들에게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보다 어렸던 초등학교 시절의 고향인 구포에는 미군들이 많았다. 가까운 김해에 공군비행장이 있어서 유난히 그들을 자주 본 탓으로 그들에 대하여는 친근감을 뿌리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여자들이나 남자들이나 이국의 그들은 나에게는 이상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특히 포르노 잡지에 나오는 그녀들의 배경에는 주로 장미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내가 장미에 거부감을 가졌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유년기의 동네에도 자주 미군들이 보였고 그중에서도 흑인을 본 것이 장미를 싫어하게 된 실마리가 되었지 싶다. 동네에 그들이 나타나면 죄다 떼로 몰려서 뒤따라 다녔다. “헤이~ 헤이~”, “추잉껌 기브미~”를 연호했다. 그리고 가끔은 “뿌리스~ 뿌리스~”를 붙이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부탁한다는 뜻의 ‘플리스’를 말한 듯하다. 한번은 떼를 지어 다니는 우리 중에서 나를 지명하며 오라는 손짓을 하는 게 아닌가. 마치 무슨 큰 횡재를 한 표정으로 쭐레쭐레 앞에 섰더니 그 커다란 주먹으로 덜 여물어 풋내나는 내 머리통에다 냅다 꿀밤을 먹이는 것이다. 생각하고 있던 초콜릿의 달콤함 대신에 “깟뎀!” 이라는 고함과 역겨운 누린내를 함께 섞어서 한 바가지 퍼붓는 것이 아닌가. 장미에게서는 그 미국놈의 역한 냄새가 나서 싫다.
올 설에도 처가에 들렀다. 연로하신 장모님이 계시니 의당 가 보아야 하는 것인데 본가에서는 장남이다 보니 처가집 가마고 나오는 뒷자리가 늘 찜찜하기는 하다. 남쪽 바닷가 도시가 처가여서 올해도 남해안에 피어난 동백을 보고 왔다. 동백은 늘 느끼지만 땅에 떨어져서 더 아름다운 꽃이다. 다른 여느 꽃들처럼 질 때 지저분하지 않은 꽃이다.
그러나 동백꽃에서는 늘 할머니와 아버지 간의 팽팽하던 긴장감이 느껴지는 꽃이다. 싫어하지는 않지만 슬픔이 느껴지는 그런 꽃이다. 동백꽃을 볼 때마다 할머니 생각이 먼저 난다. 할머니는 아침이면 항상 일어나 면경을 앞에 두고 머리에 동백기름을 발랐다. 지척에 있었음에도 장남이던 아버지와 떨어져 작은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장손인 나를 자주 보고파 하셨고 아버지는 내가 할머니에게 가는 것조차도 싫은 내색을 보이곤 하셨다.
할아버지는 일제가 한창 극성일 때 일본의 탄광으로 아들 둘을 남겨두고 가셨다가 하얀 광목에 쌓인 유골로 그렇게 돌아오셨던 것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목숨 값으로 받은 돈을 반으로 나누어 큰집에 아버지와 함께 맡기고 재가를 하셨다. 나중에 재혼 생활도 여의치 않아 다시 돌아오셨을 때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늘려 오셨다. 그러나 큰집에 맡겨져 양육은 커녕 머슴처럼 부림을 당해 설움이 뼛속까지 스며진 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화해를 못 하셨다. 그래도 핏줄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장날마다 어머니가 동백기름 한 병씩 사는 것을 못 본체 하시곤 했다. 어머니는 내 손에 2홉들이 동백기름을 들려서 할머니께로 보내졌고 그렇게 뜸하게나마 손자를 데리고 하룻밤 보내는 재미로 사셨다. 할머니는 텃밭에 율무를 심어 거두어 108 염주를 시간만 나면 꿰셨고 한 달에 한 번씩 열 개쯤의 염주를 부처님 전에 올렸는데 아마 아들에 대한 죄스러움의 표현이었던 듯 싶기도 하다.
할머니가 끝내 아버지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한 많은 세상을 버리고 십 년도 더 흘러버린 추석에 할머니 산소에 간 날…, 낫이 들어 있으리라 짐작했던 아버지의 등산 배낭에서 조그마한 나무 한 그루가 나왔다. 동백나무 묘목 한 그루…
아버지는 그렇게 동백나무 한그루로 할머니를 용서하신 것이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져서 까치 한 마리 지나간 하늘만 올려 다 보았다. 그래서 동백꽃은 늘 우리 할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꽃이다. 동백을 심으면서 떨리던 아버지의 어깨가 자꾸 생각나는 꽃이다.
살아가면서 좋은 관계든 나쁜 관계든 정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좋은 관계라면 좀 더 좋은 관계로 남도록 다짐을 해야만 하고 나쁜 관계는 그것대로 나빠진 연원을 따지고 찾아서 좋은 관계로 고쳐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도 모르겠다. 언제쯤이나 나도 장미와의 관계를 좋은 쪽으로 회복하게 될지 동백꽃에서 슬픈 기억을 지우게 될지 모르겠다.
이제 봄이다. 꽃들이 온통 피어서 자신만의 색으로, 향으로 그렇게 몸부림을 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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