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나의 유년기(2)
    유년의 기억 2006. 2. 21. 00:00

    조금 커서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 부터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억이랄

    만큼 추억의 편린들이 있다.

     

    그때의 우리집은 초가에 둘러 쌓인 벽돌집이었는데 지붕이 골탕(아스팔트 타르)에

    모래를 뿌려서 굳힌 새까만 것이었다. 집 뒤는 지붕까지 오는 언덕으로 된 길이었다.

    길과 집의 구획은 탱자나무 20그루 정도였다.
    옛날 일본사람이 살던 집이어서 수리를 하다보면 명치인지 소화인지 글자가 적힌

    못통이 나오고 했었다.
    그 길은 학교의 담벼락을 끼고 도는 길이어서 50미터만 가면 학교의 정문이었다.

    우리집을 제외하면 옆집의 함석지붕을 빼면 거의 초가들 이었는데 탱자나무는 우리집

    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나는 탱자나무집 큰아들로 통했다.

     

    학교는 구명국민학교였는데 지금은 없어져 기억의 한 페이지를 분실한 것 처럼 무척

    허전함을 준다.
    학교로 가는 길과 맞물린 집이어서 가을에는 엄마는 늘 애들과 전쟁 아닌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아주 샛노랗게 물드는 탱자는 먹을게 귀하던 그 시절에 조금이나마 허기를 채워주는

    기호식품이었고 돈없이 산에 가지않고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과실의 한 종류였다.
    그래서 가을에는 탱자나무를 향해 던지는 아이들의 돌 팔매를 막기 위해 거의 전쟁을

    벌리다시피 했다.
    깡보리밥을 물에 말아서 이제 조금씩 빨간색이 물들기 시작하는 고추를 된장에 찍어서

    먹고 있는 중에도 지나가던 아이나 어른들이 노랗게 익은 탱자를 딸양으로 돌을

    던지는지 지붕이 텅~~우당탕 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맨발로 내쳐 뒷마당으로 나간다.

     

    `어떤 새가 만발이 빠질놈이 돌을 떤지샀노~~`하고 고함을 치신다.
    그러면 오히려 던진놈이 놀래서 걸음아 날살려라~~ 하고 도망치고 만다. 그렇게 돌을

    던져보아도 대개의 탱자는 가시들속에 떨어져서 막대기가 아니면 건지기 힘들고

    요행히 떨어진 놈들은 우리집 마당으로 넘어오는 놈이 대부분이다.

     

    거의 익었다 싶어면 아예 돌 던지는 근원을 없애버릴려고 아버지는 긴 장대로 탱자를

    모두 딴다.
    몇십개 겨우 남기고는 한약방에도 팔고 동네 어른들 한테도 좀 나누어 준다. 동네

    어른들 중에는 이 가을의 탱자 수확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그 분은 탱자술을 담아서

    드시곤 했는데 탱자술이 독해서 늘 딸기코가 되셨노라고 아버지는 말씀해 주셨다.

    탱자를 한 개 따거나 주으면 그걸 시멘트벽에다 살살 문대면 껍질이 얇아지면서 과즙이

    나오는데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단맛의 액체에 한동안 행복해 했었다. 그래서 가시에

    손을 찔려가면서 필사적으로 탱자를 줍기도 하고 그렇게 모은 탱자는 학교에 가면

    일종의 물물교환의 유가증권이 되기도 했다.

     

     

     

     

    겨울에는 밤이 길어서인지 유난히 군것질이 그리워 지곤 했었다.

     

    1원의 가치가 엄청 큰때라서 밤이면 1원씩 얻어 칡을 사먹기도 했는데 그때 칡파는

    아저씨는 여름내 빈둥대면서 술을 먹고 온동네를 시끄럽게 하다가 겨울이 되면 자기

    세상을 만난양 산으로 가서 남들이 도저히 캐지못하는 엄청나게 굵고 큰 놈으로

    바지게(지게 위에 얻는 운반기구)위에 잔뜩 지고 내려와서 구포장에 내다 팔고 밤에는

    동네 아이들에게 팔기도 했다.

     

    1원어치면 한 10센티 정도 잘라서 밑부분을 일부 남기고 칼집을 내어 준다. 그러면

    긴밤의 두어시간은 족히 턱의 근육이 아프도록 씹어대는데 그것도 가루칡으로 씹으면

    목으로 넘어 가는 그 맛을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다.
    칡 장사는 주로 동네에서 `정군네`로 불리는 아줌마가 담당을 했는데 그집의 큰아들

    이름이 정군이라서 아마 그렇게들 불렀나보다. 고만 고만한 동네이기는 해도 유독

    가난한 집중에 포함되어 있는 비슷한 처지라서 내가 가면 항상 덤을 좀더 주시고는

    했다. 그리고는 항상 덧붙이는 말은 늘 같았다.

     

    `아이고~~ 대그이왔네..요거는 아지매가 끼아 주는거데이..우리 XX는 공부라카믄

    디질라카이 나중에 느그 잘대면 잘바주래이~~`


    한살이 어려도 늘상 친구로 지냈던 그 친구는 국민학교 졸업후 홀연히 동네에서

    사라져서는 그 `정군네` 아지매..칡캐던 아재가 돌아가셔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집 큰형의 이야기로는 `글마~~ 지혼자 살겠다꼬 서울로 도망 안갑뿐나~~`


    아직도 그 `정군네` 아지매의 끼아주었던 그 바램을 하지도 할 형편도 못되었으니 단지

    가는 세월의 서글픔만 남았다.

     

    가끔씩 아버지는 교대근무가 바뀌는 날에는 나를 데리고 산으로 칡을 캐러 가곤 했는데
    겨울산은 정말 춥다. 특히나 그때는 하도 산의 나무라는 나무는 모두 땔감으로 베어낸

    지라 골짝..등성..할것없이 칼바람이 불고는 했다. 땅은 땅대로 얼어서 잘 파지지도 않는

    딱딱한 그 땅을 파시면서도
    `아이고~~ 괭이질을 마이 하이께네 덥아 죽겠네..`하시면서 웃옷을 벗어서 오들 오들

    떨고있는 나에게 입혀주시곤 했다.

     

    진짜로 더워서 그렇게 하신게 아니란걸 아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겨울에는 가끔씩 눈이 내린다. 부산이라서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한번 오면

    우선 양은냄비를 장독의 뚜껑 위에 밤새 올려놓으면 양은냄비에 눈이 가득찬다.

    그러면 `신화당`이라는 사카린가루를 철철 뿌려서 숟가락으로 비벼서 먹으면 그야말로

    천연의 아이스크림이 되었다.

     

    엄마는 겨울에 눈이 오면 항상 깨끗한 곳의 눈을 쓸어서 한단지를 채워서 장독대의

    한곁에 잘 밀봉해두었다가 여름에 더위를 먹으면 수박화채를 해주곤 하셨다.

     

    겨울밤에는 동네아이들끼리 모여서 담력을 겨루기도 했다. 우리가 다닌 국민학교는

    한국전쟁때 야전병원으로 사용이 되어서 죽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의 대숲에는 항상 귀신이 있다는 두려움이 모두에게 공통으로 있었다.

    겨울밤에 한사람은 손수건을 일본식으로 지어진 화장실(대숲에 있다) 에다 가져가서

    걸어놓고 다음사람은 그걸 다시 가져오는 내기로 그런 놀이들을 하고 놀았다.

    '유년의 기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유년기5(여름3)  (0) 2006.03.28
    나의 유년기 4(봄2)  (0) 2006.03.28
    나의 유년기3(봄1)  (0) 2006.03.28
    뭍으로 내린 후크선장  (0) 2006.02.22
    나의 유년기(1)  (0) 2006.02.20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