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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유년기 4(봄2)
    유년의 기억 2006. 3. 28. 14:22

    봄이 오는 곳을 느낄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쑥이다. 봄이면 동네 아줌마나

    누나들 또는 여동생들은 시간만 나면 소쿠리를 들고 들로나가서 쑥을 캐고는

    했었다.

    쑥을 캐다가보면 냉이나 달래등을 캐기 마련인데 그렇게 캔 냉이나 달래는 국을

    끓이고 쑥은 국을 끓이거나 또는 쑥떡을 해먹기도 했었다.

     


    우리집에서는 엄마가 쑥을 캐다가 쑥털털이라는 걸 만들어 주셨다. 그래도 좀 사는

    집에서는 쌀로 쑥떡을 해먹었지만 쌀이 귀한 가난한 우리는 밀가루와 쑥을 버무려서

    밥솥에서 쪄낸 쑥털털이도 봄에만 맛볼수 있는 진귀하고 맛있는 음식이었다.

    물론 사카린으로 만든 `신화당`이라는 가루가 주는 단맛으로 인한 것이긴 했지만....

     

     

     

    늦은 봄에는 겨우내 심어놓았던 보리가 익어간다.

    우리는 보리밭으로 깜부기를 따먹으러 온 밭을 헤매고 다니기도 했다.

    곰팡이로 인해 까맣게 되어버린 깜부기를 먹다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자기얼굴은

    생각도 못하고 입가에 묻어있는 검뎅만보고 개글 개글 웃고 했다.

     

    봄에는 아침에 학교에 갈때는 가방외에 또 다른 지참물이 따라다녔다.

    노란 양은세숫대야를 하나씩 가지고 학교로 간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전교생이

    가져온 세숫대야를 들고 학교옆에 있었던 개울로 간다. 그리고 주먹만한 돌들을

    줏어 담아서 다시 학교로 가져와서 화단을 가꾸곤 했었다.

    대개 식목일을 전후한 한달간은 매일같이 돌을 가져다 날라야만 했다.

     

    그 당시 구포에는 시장통에 있는 구포국민학교가 엄청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고 우리학교는 만덕, 화명, 덕천등 그 당시로는 그야말로 시골인 곳의 아이들이

    다니던 곳이라서 학동들도 시장통 아이들과 둑건너 아이들로 확연히 패가 갈라졌다.

     

    시장통 아이들은 부모들이 거의 대부분 상업등에 종사를 하여 항상 금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보니 학교에서 하는 유료보충수업은 항상 시장통 아이들의 몫이었다.

     

    아궁이에서 연탄으로 가정연료가 바뀌던 때라서 동네어귀나 조금 낮은 구릉등에는

    연탄재가 지천으로 늘려있었고 가끔씩 시장통 아이들과 둑건너 아이들은 가마니로

    만든 방패를 앞장세우고 부서진 연탄으로 투석전을 벌이곤 했다.

    양측 합해 100여명의 아이들이 얼려 던지고 하면 온통 하늘이 뿌여질 정도로 대단한

    기세였다. 그래도 단 한번도 돌을 던지거나 하는 일을 없었다. 딱히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양심에 깊이 각인된 룰이 있었던 모양이다.

     

    봄에는 항상 똥검사(대변검사)가 있었다. 가로 세로 10센티쯤 되는 비닐과 요즈음

    약방봉투처럼 생긴 작은 봉투를 학교에서 받아와서 콩알보다 조금 크게 대변을 놓고

    비닐을 오무려서 실로 꽁꽁 매어서 봉투에 이름을 기록해서 제출하고 나서 며칠이

    지나면 회충약/ 요충약/ 십이지장충약등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한번은 열심히 집에서 똥봉투를 만들어 놓았는데 학교에 가서 2시간인가 3시간

    마치고 똥봉투를 내야할 시간이 되어서 가방을 보니 아차! 똥봉투가 없다.

    깜박했나보다..이일을 어쩐다하고 난감해 하고 있는데 옆에 친구가

    `야아~~ 조게 샘(선생님) 책상안에 봉투는 맷장있던데..그거가꼬 우째해바라..`

    구세주가 따로 없다. 선생님이 교무실로 간 사이에 서랍을 열고 똥봉투를 하나 슬쩍해서

    화장실로 갔다. 그런데 똥이 영 안나온다.

    할수없어서 소사(학교에서 일보는 아저씨)아저씨가 쓰시던 똥치는 막대기를 이용해서

    수세식이던 화장실에서 한바가지를 떠내어서 좀 딱딱한 변을 대신 싸간적도 있다.

     

    또 한번은 보건소에서 무료로 약을 준다기에 아버지와 둘이서 갔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보건소 직원이 이랬다.

    `에~~ 이약은 XX대학교의 XX교수님께서 개발한 십이지장충약입니다. 그런데 이약을

    그동안 개같은 동물에게만 먹여서 그 동안 테스트를 하다가 이번에 여러분에게 드리는

    것이니 드시고 그 증상을 잘 좀 말씀해 주셔야 겠습니다..`

    순간 아버지의 표정이 일그러 지셨다.

    손에 받아던 약을 그 보건소직원의 면상에 그대로 던져버렸다.

    `에레이~~~X할노무 새끼야..우리가 니눈에는 개로 보이나..우리가 무슨 실험대상이가~`

     

    봄에는 학년이 바뀌고 아울러 새로운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이 으레 있기 마련이었다.

    나는 집이 가난해서 가정방문은 늘 달갑지 않았었다. 별로 대접할게 없는 우리집에서는

    꽁보리밥에다 쌀을 좀더 섞어서 대접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도 서민적이었던 그때의 선생님들은 퇴근길에 한번씩 들러서 보리밥을 맛나게

    드시고는 했다. 학교앞에 산다는 게 어쩌면 그런 이점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봄은 아이들에게 가혹한 면도 있었다. 졸리움과 공부시간의 그 지루함이 왜 봄에는

    더욱 기승을 부렸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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