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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유년기5(여름3)
    유년의 기억 2006. 3. 28. 14:28

    3학년 때였는데 그때는 1개학년이 3개반으로 되어있었다.

    옆반을 맡고 계시던 선생님이 군대를 가게되어서 임시로 새로운 선생님이 한달정도를

    기한으로 오셨는데 공부보다는 즐거운 얘기로 항상 웃음이 넘치는 교실을 만들어

    우리는 공부보다 벽을 타고 전해오는 옆반의 재잘거림과 웃음소리에 더욱 많은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때 짝이 이런 얘기를 소근댔다.

     

    `우리 샘(선생님) 바까스면 좋겠다~~그자!`

    잠깐의 졸림속에 있었던 나는 잠시 주위를 망각하고 엄청 큰 소리로 화답을 했다.

    `그래! 마따.... 샘 바까뿌면 참말로 좋겠데이~~~~`

     

    갑자기 교실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박수와 환호......그와 비례하여 벌개지시는

    선생님의 그지없이 황당해하던 모습..... 아직도 가장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유일한

    국민학교 선생님의 얼굴이다.

     

    국민학교 3학년.. 이 어린것들이 내뱉은 장난같았던 그 단순한 말이 선생님께는 엄청난

    파동으로 가슴속을 울렸는지 한동안 숨을 고르시고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내일 모두 부모님보고 학교 오시라케라!`

    그날의 수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음날 나의 모친을 비롯해서 3분의 1이 좀 안되는

    학부모들이 모여서 교무실에서 한참동안 회의를 했고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선생님이

    바뀌는 일은 일어 나지 않았다.

     

    그 대신 기다리는 건 하교후 집에 가서 종아리가 피멍이 들도록 엄마한테 맞았다.

    그 선생님과의 인연은 5학년,6학년까지 이어져서 3년간을 이어지고도 모자라 우리

    5남매중의 4남매가 모두 한번씩 가르침을 받았다.

     

     


     

    4학년부터는 고학년으로 분류되어 오후수업도 받게되고 학교에서는 급식도 있었다.

    옥수수 죽과 양유가 초기에는 나왔는데 소사(학교에서 잡일하는 아저씨)가 큰솥에

    물을 끓여서 봉지에 든 가루양유를 넣어서 휘~휘~ 젓으면 보기에도 목이 간지러운

    양유가 되었다. 그러면 주번 두명이 가서 한사람은 옥수수죽을 한사람은 양유를

    받아와서 배급을 했다. 오래지 않아서 옥수수죽은 옥수수빵으로 대체가 되었으나

    양유는 제법오랫동안 급식을 받아 먹었다.

     

    우리집은 그때까지도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며칠에 한번은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가야만 했다. 또 한짐씩의 땔감은 장에 내다 팔수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3일에 한번정도는 꼭 산으로 가서 땔감을 장만해 오셨다.

    어버지는 총각때는 매일 삼십리를 걸어서 나무를 해다가 집에 소용하고 남는 것은

    모아서 5일마다 열리는 구포장에 내다팔아서 수입을 삼았다.

     

    지금도 할아버지 산소에 갈때마다 지나게 되는 바람고개를 지날때는 그때의 고생스런

    생각이 나시는지 회상에 젖어시는 모습을 보게된다.

     

    봄은 새와 곤충들에게는 산란의 계절이다. 그래서 산에 가셨다가 가끔씩 꿩알을 줏어

    오셨는데 계란찜처럼 해서 먹으면 별미중의 별미였다.

    늦은 봄에는 엄마는 개밭(낙동강의 삼각주에 개발된 밭)으로 가면 미수가루를 만드는

    보리(이름이 생각이 안남)가 타작을 끝내고 여기 저기에 조금씩 흩어져 있는데 벼를

    심기전에 이삭을 줏어 오신다.

    며칠을 다니면 여름에 우리식구가 한철을 먹을 미숫가루가 생긴다.

    하교후 집에 와서 시원한 동네우물물에다 미수가루와 `신화당`을 타서 마시면 목젖부터

    배꼽아래까지 시원함에 전율하였었다.

     

    아까도 얘기 했지만 아버지가 밀가루공장에 다녀서인지 밀가루가 많았다.

    밀가루가 되기 전의 밀도 한말정도는 항상 있었는데 밀 한줌에 굵은 소금을 조금 섞어

    입에 넣어서 씹으면 신기하게도 껌이 되었다. 지금도 그게 의문이다.

     

    항상 배가 고프던 시절이라서 하교후에는 혼자서 수제비를 끓여 먹고는 했다.

    감자와 멸치 몇 마리로 만들어 먹는 수제비는 그나마 풍족한 음식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수제비는 나름대로 자신있게 만드는 음식이다.

    우리 애들도 아빠가 만드는 수제비하면 알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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