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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유년기7 (여름1)
    유년의 기억 2006. 3. 28. 14:36

    여름은 활동의 계절이다. 놀이가 지천으로 늘려있는 왕성함이 늘 애들을 즐거움으로
    내모는 푸르름의 계절이다.


    학교의 교실은 선풍기가 없었다. 창문을 양쪽으로 열어놓으면 맞바람이 쳐서 교실은
    늘 시원하였었다. 바닥은 밑에 공간이 있는 나무널판으로 되어있는 구조여서 습기도
    없는 쾌적한 구조였다. 요즈음의 콘크리트보다는 백번 나은 구조였다.


    고학년이 되자 3층짜리 슬라브구조의 교실로 옮겨졌는데 4학년때는 일층이었다.
    97년인가 확실한 연도가 기억에 없는데 구포건널목 전에서 크게 기차사고가 난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직선거리로 1킬로정도 떨어져있는 곳이라 수업중에도 기차의 제동
    소리가 끼~~~이~~~~익~~하고 나면 그건 틀림없는 열차사고였다.


    그러면 몇몇은 교실을 빠져나와 담치기(학교담을 넘는 것)를 해서 냅다 건널목으로
    달려간다. 거의 한달에 두어번은 사고가 났으니 일년이면 20명 정도가 사고로 그렇게
    구경거리만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그곳은 낙동강의 제방이 강을 끼고 이어지다가 강이 없어지면서 가로놓인 건널목으로
    절망을 가진 사람에게는 엄청난 단절감으로 이어졌는지 지금 기억으로도 자살자가
    절반을 넘게 차지했던 것 같다.


    그 외에는 주로 귀가 어두운 노인들이었는데 대개는 차비 몇푼을 아낄려고 화명,물금
    등에서 가장 지름길이었던 철길을 따라 걸어오다가 변을 당했다.
    커브가 심한 곳이라서 기관사가 사람을 발견했을때는 이미 늦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고가 공군파이럿과 그 애인의 죽음이었다. 그때 김해에는 지금의
    국제공항자리에 공군비행장이 있었는데 구포에는 그들의 숙소가 제법 많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공군사관학교를 나온 촉망받는 파일럿이 어찌하다 보니 호스티스와
    사랑을 나누게 되었는데 집안의 반대가 극심하였던 모양이었다.


    현장에 남아있는 것은 처참한 시신과 1되짜리 소주병, 가지런히 놓인 두사람의 신발과
    하얀 유서한통 이렇게 였다. 구경나온 아줌마들은 눈시울을 적시곤했다.


    그런 사고가 나면 수습은 항상 둑밑에 살던 넝마주이들의 차지였다. 종이를 줏어담는
    긴 집게로 흩어진 주검들을 수습해서 유족들에게 인도하는 일을 도맡아서 하였었다.


    우리는 언제나 사건현장에 일찍 도착하는 편이었고 수습에 걸리적 거린다고 몽둥이에
    얻어맞기도 많이 했다.

     

     


     

    철길은 그 외에도 우리들에게 또 다른 놀이감을 제공했었는데 배 아플 때 먹는 `활명수`
    의 병뚜껑을 여는 철사로 만든 끝에 구멍이 뚫린게 있었는데 그 구멍에다가 실을 묶어
    돌을 매달고 철사를 철로 위에다 올려 놓고 기다리다가 기차가 지나가고 나서 보면
    기차바퀴에 납작해진 철사는 어느 듯 자석이 되어있었다.


    어릴적의 철길은 다른 세계로의 통로였다. 구포에서는 극장도 철길을 건너야만 하고
    여름에 물구경도 철길을 건너야하고 또 철길을 건너면 낙동강의 나룻터에는 술집이
    많아서 허벅지를 들어낸 야한(?) 여자들을 볼 수 있는 곳도 있어서 철길은 낯선 세계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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