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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유년기9 (여름3)
    유년의 기억 2006. 3. 28. 14:45

    부산이 산업도시로 발전하면서 주변의 큰 동네였던 구포의 제일 큰 변화는
    골짜기의 상류로 집들이 군데 군데 들어서 일년새에 대단위 취락이 형성되면서
    계곡은 제 모습을 잃어 갔다.

     

    그래도 물은 깨끗했지만 바께스 깨진 것, 옷가지들, 깡통등...별것들이 다 떠내려 왔다.
    그 중에서 단연 우리들의 인기는 하얀 풍선이었다. 자주 떠내려 왔는데 그걸 불어서
    묶어 가지고 다니면 동네아줌마나 아저씨는 마구 혼을 내주었다.
    영문을 모른 체 숨겨서 딱지처럼 따먹기도 하고 다른 물건과 교환도 하는 소중한
    재산(?)을 지키기에 애를 섰다.
    다 자라서야 그게 콘돔이란걸 알게 되었지만 그 때는 서로 한 개라도 더 주을려고
    난리를 쳤었다.

     


    어느 여름날 우리는 처음으로 아스팔트 포장이란 걸 처음으로 구경을 했다.
    길에다가 자갈을 깔고 처음보는 장비들이 나타나 고르고 그 위에 찐득한 타르를
    뿌려서 까만 흙(?)을 덮고 둥그렇게 생긴 장비가 물을 뿌리면서 갔다 왔다하면
    신기하게 아스팔트가 되어 먼지가 날리지 않는 길이 되었다.

     


    아스팔트의 등장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구경거리를 제공했다.
    특히 타르를 뿌려놓은 길을 인부들의 제지를 뚫고 돌아다니면 신발밑창에 타르가
    늘러붙어서 신발을 오래 신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기를 쓰고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떼를 지어 질주하곤 했었다.
    나는 주로 까만 고무신이라서 별 표시가 없었지만 몇 몇 시장통의 부잣집 아이들의
    운동화에는 타르가 묻어서 집에 가서 혼나는 일도 많았다.

     

     

     

     

    (사진설명:사진뒤에 사진사 아저씨가 적어놓은 바에 의하면 1970년9월16일
                    탱자나무집 큰아들 김대근이와 동생들..구명국민학교 교정에서라고
                    적혀 있군요...)

     

     

    여름에는 빠질 수 없는 숙제가 하나 있었다.
    새마을운동이 서서히 기치를 더해 최고의 피크로 가고 있던때라서 학교에서는
    가정위생을 청결히 유도한다는 목적아래 숙제로 파리잡기가 있었다.
    작은 성냥곽에 가득 채워가야 되는데 말이 한통이지 그게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때 동원된 방법은 세가지였다.

     

    첫째는 가장 흔한 파리채인데 이건 중노동이다.

     

    두 번째는 끈끈이를 천장에 발라두는 건데 조금 비싸고 파리를 끈끈이에서 떼어
    내는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셋째는 에프킬라(지금 생각나는 그때의 유일한 살충제로 그때는 유리병에
    들어있어 입으로 부는 뚜껑을 따로 붙였다.)의 원액을 쟁반 같은데다가 부어서
    방이나 마루 등에다 두면 스스로 와서 빠져 죽었다.

     

    그러면 한 이삼일 모으면 작은 성냥곽에 가득찰 정도가 되어서 선생님께
    가져다 제출을 하고는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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