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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5岳중의 하나인 가평 운악산
    여행기 2006. 9. 11. 12:05

     

    경기 5岳중의 하나인 가평 운악산


     

     

    역사는 흐르는 물과 같다. 강물처럼 순간 순간 흘러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가
    물과 다른 점은 이미 흘러간 역사는 되돌릴수 없기 때문에 역사는 엄정한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들에게 역사가 소중한것은 지나간 역사속에서 잘못된 점을 찾아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행기를 시작하면서 왜 갑자기 역사 이야기를 끄집어 내느냐 하면 2006년 9월 10일
    산행한 경기도 가평의 운악산은 우리 역사의 중요한 기점에 서 있었던 궁예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등산기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듯 버스는 몇번의 시행착오끝에 마침내 현등사 입구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민박촌과 상가들이 어울어진 이 곳이 현등사쪽 등산로 입구에 해당한다.

    주차 공간은 다소 좁은듯 해서 일요일에는 무척 번잡스러울 듯 하다.

     

    현등사는 이 운악산에서는 가장 오래된 절인데 깊은 역사의 맛을 느끼지는 못했다.

    등산의 시점이 이 현등사로 가는 길의 중간에서 오른쪽 능선을 타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숙제로 남았다. 다음에는 개인적으로 다시 찾아야 될 듯하다.

    현등사의 가을경치도 꽤나 좋다고 소문이 난 터이니 이번 가을이 가기전에 와야겠다.

     

     

     

     

    아직은 좋은 길이다. 좌측으로 흐르는 계곡에는 작은 소(沼)들이 군데 군데 자리를 틀었다.

    현등사로 가는 길에는 폭포가 많다고 등산 안내서에 적혀있었지만 코스가 다른데다가

    이번 등산은 단체의 일원으로 온 터이라 민폐를 안끼치려면 부지런히 앞만 보고 걸어야 한다.

     

     

     

    마침내 만난 등산로의 시점...만경등산로에 도착했다.

    여기서 부터는 지리한 나무계단과 오르막 돌길을 만나 오랫만에 산을 찾은 육신의

    한계에 부딪히게 한다.

     

    저번 산행에서 와이프가 손목을 다친데다가 나도 회사일로 출장이 잦았던 탓에

    거의 두달만에 산에 오르는 터인지라 몸이 적응하는 일이 만만하지 않다.

    초입부터 흐르는 땀을 주체하지 못한다. 아마 30분은 이렇게 몸을 고단함에 빠트려야

    비로소 적응을 하게 될것이다.

     

    산에 오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평소에 운동을 해야하는데 그게 또 수월하지 않다.

     

     

     

    지역마다 있는 8경...이 운악산에도 그것이 있다는데 제3경에 해당된다는  운악산 중턱에서

    만난 사람 눈썹모양의 눈썹바위이다.

    숲에 가려서 가까이서는 잘보이지 않는데 사진에서 보이는 지붕처럼 튀어 나온 바위의

    모양이 멀리서 보면 마치 눈썹모양이어서 붙은 이름일 것이다.

     

    강화도...보문사는 우리나라의 3대 관음신앙지인데 그곳에도 눈썹바위가 있다.

    규모만 다를뿐 모양새는 흡사해 보인다.

     

     

     

    올라도 올라도 가프르기만 한 운악산의 초입...

    사실 초입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많이 왔다. 지금 사진을 찍고 있는 위치가 해발 650미터..

    930여미터의 정상을 가진 운악산이니 이만하면 제법 왔다 싶은데.....

     

     

     

    잠깐 숲을 헤치고 내려본 조망은 시원하다.

    뱀처럼 꾸불거리는 하천을 따라 농토와 길..그리고 사람이 사는 곳들의 경치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여기서 보면 저리 아름다운 곳인데 막상 우리 사는 곳의 번잡함이란....

     

     

     

    몇개였던지 셀수도 없는 이런 바윗길을 두발로는 부족해서 잠시 두손도 발이 된다.

    똥마려운 강아지 폼을 하고 기어 올랐던 바위들....

     

     

     

     

    운악산은 경기도 가평군 하면과 포천군 화현면의 경계를 이루며 남북으로 솟아 있는데
    광주산맥의 여러 맥 가운데 한북정맥에 속하는 산으로 현등사의 이름을 빌어 현등산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가까이는 화악산(華岳山:1,468m)·명지산(明智山:1,267m) 등의 명산이 있다.

     

    운악산은 화악산·관악산(冠岳山:629m)·감악산(紺岳山)·송악산(松嶽山:489m)과 함께 경기
    5악에 속하는데, 그 중에서도 산수가 가장 수려한 곳으로는 운악산의 망경대가 꼽힌다.
    ‘운악산(雲岳山)’이란 이름은 망경대를 중심으로 높이 솟구친 암봉들이 구름을 뚫을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미륵바위...

    이곳 운악산과 역사적 관련이 많은 궁예가 민중의 지지를 이끌었던 가장 주된 모토는

    미를사상이였다. 미륵부처는 현세의 부처인 석가모니의 뒤를 이어 미래세계에 인류를

    구원할 미래불이다.

     

    그가 구원하여 이룩할 용화세계는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는 평등한 세상이다.

    귀족정치에 의해서 짓밟히고 착취당하던 당시 민중들에게 궁예는 희망의 메신저였다.

    우리나라 산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 대개 비륵바위라 칭하는 데가 많음은

    우리 민중들의 가슴 깊이 전해내려온 미륵사상의 흔적일 것이다.

     

     

     

    철계단 앞에서 무소유...

     

     

     

    계속되는 암릉들...산에 올라서 내려오는 동안 잠깐도 벗어날 수 없었던 밧줄의 압박..

    그리고 노란 샤츠의 저분...대명도 이름도 모르겠지만 저분의 발길이 닿는데 마다

    바위들이 빠져 금방이라도 굴러 내릴것 같은 압박에 내내 시달려야 했다.

     

    제일 뒤에서 따라가던 반디불...무소유...깨락지님..그리고 한분(이 분은 된장통에 대한

    조그만 에피소드로 "앞으로 된장 이야기만 나오면 오늘 산행이 생각나겠습니다.."라고

    하신분~~)..이렇게 네사람은 저분의 발 뒷축만 보고 산을 몰랐다는 전설이~

     

    된장이야기는 무지 재미있지만 생략한다.

    왜냐고? 그냥 조금 남겨두는 것도 읽는 사람의 궁금증을 위해 좋을듯 하기에...

     

     

     

    절벽위의 소나무 한그루..

    요즈음 우리나라도 점점 따뜻한 기후로 변해버려서 앞으로 많은 시간이 흐르면

    소나무같은 침엽수는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아직은 우리들의 생활에 가장 밀접한 나무는 역시 소나무일 것이다.

     

     

     

    부근에서 가장 높아보이는 데다가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어서 잠깐 정산으로

    착각을 했던 곳이다. 정상이라면 당연히 있어야할 표석이 없어서 물어보니 아직 정상은

    멀었고 계곡하나를 더 건너면 정상이라고 한다.

     

    이곳은 조망이 정말 좋은 곳이였다. 가평군의 분지가 한눈에 들어 온다.

     

     

     

    이제 마지막 계곡이다. 이 곳으로 내려간 다음 사다리를 타고 다시 오르면 정상이다.

    형광등 갈때 사용되는 알미늄 사다리..운악산 정상을 바로 앞에 두고 생전 처음으로

    그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운악산 정상...

     

     

    실제로 정상은 저 바위의 꼭대기가 될것이다.

     

    누군가가 한시를 새겨두었다. 읽기는 하겠는데 뜻을 새기진 못하겠다.

    가방끈이 짧음에 가슴을 치는 순간~

     

    다만 옛글들과 달리 우측에서 좌측이거나 세로가 아닌 죄측에서 우측으로 쓴것으로 보아

    짧게는 몇십년...길게 잡아도 백년정도 되어 보인다.

     

     

     

     

    통일신라가 지나친 귀족정치로 인하여 몰락을 길을 걷고 있을때 궁예는 신라 왕실의
    귀중한 핏줄을 타고 났지만 권력의 쟁패에서 밀려 목숨부지를 위해 불가에 의탁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후삼국의 기틀이 되는 나라를 창업하게 되는데 위치상으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자연히 고구려를 이었음을 내세워 많은 고구려계의 복속을 받았다.
    그러나 궁예는 귀족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터라 민중참여정치를 펴고자 했으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쿠테타를 일으킨 것은 귀족들의 방어적 차원에서 일어난
    일이였다고 할 것이다.


    어쩌면 세계에서도 유래가 없을 정도로 일찍 귀족정치를 벗어나 민중정치를 이루고
    북으로 뻗어 나가 강성함을 자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였지만 결국 귀족들의 영역지킴이
    우리 강토를 조그만 반도로 쪼그라 들게 만든 것이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상적인 민중국가를 구현하려고 했던 궁예와 관련이 있는 산이 이 부근인 포천의
    명성산과 그의 산성궁정이 있었다고 알려지는 이 운악산등인데 이번 운악산 등반은
    그런 의미에서 며칠전부터 설레임을 주기에 충분했다.


    왕건등의 귀족파에 의해 쫓기던 궁예가 이곳으로 옮겨 한동안 항전을 했던듯 하다. 그 흔적은
    지금도 선정부근에 궁예산성으로 일부 남아 있다. 또 이번 산행에서는 가보지 못하였지만
    서쪽 계곡의 거대한 암벽에서 맑은 물이 떨어지는 무지개폭포(홍폭)는 궁예가 이곳으로 피신
    하여 흐르는 물에 상처를 씻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운악산의 전투에서 실패한 궁예는 결국 부근의 명성산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이 운악산은
    어쩌면 우리 역사상 가장 가능성이 있었던 이상정치의 꿈을 접은 현장이기도 하다.

     

     

     

    이런 길에서는 여자들이 가장 곤혹스러울 것이다.

    특히 같이 사는 무소유는 내리막길을 아주 어려워 한다. 그런데 밧줄을 타고 내려가야

    하는 길에는 정말 대책이 없을 정도이다.

     

    옆에 있는 사람도 답답하기는 하겠지만 본인이야 더 죽을 지경이였을테지...

     

    돌아와 사우나에서 피로를 풀고 왔음에도 다리보다는 어깨가 아프다고 한다.

    온몸의 힘이 두손으로 쏠려서 다른 때보다 열배쯤 더 힘들었던 듯하다.

     

    "집에 가서도 꿈에 밧줄만 봐도 경끼 할것 같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가평의

    운악산에 얼마나 많은 밧줄이 있었는지 가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도 못하리라.

     

    솔직히 나도 평생동안 다닌 산으로 치면 제법 될터인데 이번 산행만큼 많은

    밧줄에 시달려본 적은 처음이다.

     

     

     

    마지막 샷...

    운주사 등산로 입구에 세워진 등산로 안내판에서 우리가 훑어온 산길을 가르키며

    되집는 무소유의 스틱끝에 매달린 잠자리 한마리...

     

    전생에 빚받을게 있었는지도 모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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