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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통권이 없었던 장수, 충무공 이순신時流評說 2006. 8. 31. 11:57
작통권이 없었던 장수, 충무공 이순신
한 나라의 주권의 상징은 여러가지가 있다. 자유투표도 중요한 주권의 상징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군대의 운용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행사하느냐의 문제이다.
그중에서도 전시를 당했을때 행사할수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은 그야말로 중요한
문제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한동안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었던 미국으로 부터의 작전통제권 문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직 이를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언젠가는 이행해야할 문제임은
틀림이 없다고 본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대단히 중요한 지형적 전략요충지다.
요즈음은 옛날과 달라서 미사일등에 의한 원거리 전략이 대단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역시 땅을 기반으로한 전략거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부터 작전통제권을 받으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야 한다고 난리들이다.
들어가도 어쩌겠는가? 우리를 지키기 위한 투자가 아닌가 말이다.
일전에는 별 4개씩 달았던 사람들이 모여서 기자회견을 했다고 한다.
"아직은 우리 스스로를 지킬수 없다."
이 말은 30년동안 국민들에게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세우며 그동안 집어 삼킨 국방비며
30년전부터 받아간 국방헌금(예전에는 국방헌금은 자발적이 아니라 아무리 똥꼬가
찢어져도 선생님의 강권에 갖다내야 하는 세금같은 거였다..)의 횡령에 해당하며 국민들이
장교 하나를 배출하기 위해 부담하는 2억~3억의 천문학적 금액에 대한 무책임이다.
더군다나 거의 30년동안 온갖 사회적 권리와 지위를 독점해온 군부세력은 결국
"지금이라도 이북이 남침을 하면 초전에 박살내 버릴것~"이라며 호언해온 것에 대한
심각한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그날 나온 옛날의 별자리들은 모두가 자주국방, 초전박살을 입에 달고 살았던 사람들
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지금에 와서 우리들 스스로 지킬힘조차 없으니 미국에 좀더 기대야
한다고 하는 것은 그동안 국민들을 속여 왔다고 자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동안 그들의 관심은 자주국방을 튼튼히 하는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군부가 권력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누구과 줄을 대면 출세를 할 것인가?
누구를 장군으로 승진시키면 우리들의 권력이 튼튼해 질것인가? 옷벗고 나서도 누구에게
부탁을 하면 정부기관 감사자리라도 하나 얻을 것인가? 이런데에 있었던 것 아닌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읽다가 보니 요즈음의 상황과 많이 흡사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의 일기다.
1월이면 상당히 추울때인데 그는 임지에서 배를 수리하고 장차 있을 전쟁에 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달 16일...물론 음력이다..군관과 아진들이 배를 수리하지 않아서 곤장을
때렸다는 대목이다.
당시 조정은 이미 저물어 가는 명나라를 상국으로 모시고 있던 때였다.
한갖 왜놈쯤이야 명나라 군사 몇명만 와도 스스로 물러갈 것이라는 상소도 있을 정도로
사대가 팽배했고 명나라를 과신했다.
나라의 위급함은 스스로 방비함이 제일이다. 아무리 힘센 나라가 우리를 지켜준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 지킬때가 제일 좋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옛 성지(城地)나 동헌을 가보면 망궐례를 행하는 전각이 꼭 있다.
지방의 수령이 매달 초하루에 임금을 향해 절을 하며 충성을 다짐하는 행사를 하는 곳이다.
일종의 조회인 것인데 사실 어느 성이던지 지을때 가장 좋게 지음으로써 다른 방비물에
투자를 적게 하게 되어 낭비적인 요소도 없지 않았다.
이제 거북선이 거의 완성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과 벌의 공정함은 그 조직의 내실과 많은 관련이 있다.
이 날의 일기를 읽어 보면 순찰중 군항의 대비가 엉망이였음에도 순찰사가 잘했다고
임금께 포상의 장계를 올렸으므로 어쩌지 못함을 한탄하고 있다.
뇌물로 자신의 배를 불렸을 탐관오리의 모습을 본다.
지금이야 많이 투명해 졌지만 얼마전 모여서 목청을 돋군 별들이 근무하던 시절에는
빽과 돈이면 다 통하는 군대였음을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마침내 거북선이 완성되었던듯 하다.
거북선에 각종 대포를 싣고 직접 포를 쏘아보기까지 한것을 알 수 있다.
그 며칠뒤에 마침내 임진왜란이 개전된다. 만약에 거북선이 아직도 만드는 중이였거나
시작도 안했더라면~ 아찔한 생각이 든다.
자주국방의 의지를 가진 지휘관이 왜 필요한지를 느낄수 있는 대목이 아닐수 없다.
임진년...서기로 1593년에 해당하는 이 해에 장군은 가장 많은 전과를 올린다.
이때는 아직 명나라가 개입을 하기 전이라 여태까지만 해도 장군에게 작전통제권이 있었다.
우리 바다에서 우리가 마음껏 싸울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였다.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가질수 있다고 했지 않던가 말이다.
물자가 부족한 현실에서도 꾸준하게 전쟁을 준비해온 장군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전쟁이 발발한지 1년이 지난 즈음의 일기를 보자.
계사년...전쟁이 난지 1년이 지난 해이다. 1594년이다.
요즈음 원균에 대해서도 명장이라는 이야기가 잠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기록을 살펴도 원균에 대한 호의적인 기록은 많이 없는 편이다. "난중일기"의
기록에 보면 그가 얼마나 탐욕스러운 군인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는 그의 휘하에 있던 기효근이라는 군관은 자기 배에 어린 첩을 데리고 다니다가
이순신 장군의 눈에 뜨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휘하이니 나무랄수도 없는 노릇...
울분을 토하는 이순신 장군의 심정을 알만하다.
얼마전에 온 나라가 물 난리로 힘이 들때 외국에 나가서 골프를 친 국회의원들이 있었다.
갑자기 그들의 생각이 나는 것은 왜 일까?
이날의 일기를 읽어보면 자원이 빈약해서 물자가 부족했던 조선의 현실을 읽을수 있다.
지휘선만 좀 제대로 되었을뿐 일반배에는 편의시설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알 수 있다.
비가 오자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배위는 치장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일본보다 우위에 있었던 기마의 기본인 군마가 5천을 넘지 못했을 정도로 허약한
그런 군대였던 것이다.
지금도 "카더라~"통신이 극성인데 예전에는 더 했을 것이다.
실시간 중계가 없었으니 당연히 "카더라~"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임진왜란동안의 기록을 살펴보면 경복궁도 불에 타게 되는데 왜적의 손에 타는 것이
아니라 임금과 벼슬아치들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을 가는 바람에 이에 격분한 백성들에 의해
불태워 졌다. 왜적들은 사실 무주공산이 된 서울에 무혈입성을 했다.
온갖 해게모니를 향유하고서도 나라가 어려우면 자식들 앞세워 이민을 떠나버리는
지금의 지도층과 너무 닮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광양의 건은 피난온 영남사람들이 왜적의 모습으로 꾸며서 민가에 들이 닥쳐 약탈을
했던 사건이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명나라가 움직였는데 본격적인 참전보다는 멀리서 평안도 부근에서 주둔하며
여러가지 정보를 취합하던 중이였던 듯 하다.
이순신 장군의 정보력은 남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원균과의 내용을 보면 이때 이미 원균은 그동안 휘하의 25척이나 되는 배들 중에서 18척
이나 잃고 겨우 7척~8척의 소규모 전단(戰團)이 되어 독자적인 작전권 수행에 실패를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도 공은 세워야 겠기에 끊임없이 적을 치자고 이순신을 재촉한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해는 바뀌어 간다.
이때부터는 사실 명나라의 본격적인 개입에 따라 육지에서나 해역에서나 조선의 장수는
거의 작전통제권을 잃어 버린 시기일 것이다.
명나라를 무소불위의 최상국으로 받들어 모시던 조정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이즈음 왕조실록들을 잃어보면 명나라 장수에 대한 선조의 아부는 극에 달해서 명나라 장수가
이순신 장군등을 칭찬하자 명나라 장수에 비하면 발톱의 때 정도로 비하한다.
예의를 넘어 아예 구역질이 날 정도의 아부 수준이다. 일국의 국왕이 그러니...
갑오년 즉 1594년 이다.
이날의 일기는 무었이나 꼼꼼한 장군의 성품을 알 수 있다.
공적인 물건이 왔는데 손수 하나 하나 세어가면서 확인을 하고 그후에 수결(사인)을
했다는 대목이다.
툭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셈에 좀 약하다. 약한게 아니라 숫자에 연연하면 쫌팽이로 매도
하기도 하는게 우리 풍토인 탓에 확인의 습성이 베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즈음에는 일본과 명나라의 화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땅에서 우리와 왜놈간의 전쟁에서 주체이던 우리가 빠지고 왜적과 원군으로 온
명나라가 화친을 논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부터는 작전권 자체가 완전히 명나라로 넘어간 것을 알 수 있다.
7일날의 일기에는 도망간 군인을 잡는 일로 노심초사했음을 알수 있다.
이날의 일기를 보면 명나라 장군이 왜적을 치지 말라는 패문을 왜적손에 들려준다.
조선군은 어이없지만 이미 작전통제권이 없는 탓에 왜군이 당당하게 다니는 모습에 어이
없지만 멀거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또 하나 특별히 볼것은 우리나라의 죄 없는 백성들을 일본인으로 꾸미게 한뒤 목을 베어
자신의 공으로 가장을 하는 짓거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양민학살..그것도 자국의 백성을 죽이는 만행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날의 일기도 적을 토벌하러 갔다가 명나라 운운하는 왜적들을 두고 돌아오는 조선군의
축~ 쳐졌을 조선군의 어깨가 상상된다.
정유년이 되었다. 1597년 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 이기도 하다.
여전히 조정은 썩을대로 썩어서 아예 문드러 질 지경이였다.
이 해에는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아서 서울로 압송되어 온갖 고초를 겪다가 한때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백의 종군을 하기도 했던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막강한 군세를 자랑하던 해군은 원균의 어이없는 전략적 실수로 인해 칠천량에서
12척의 도망간 전함을 빼고 모두 수장되었다. 물론 원균 자신도 고혼이 되었다.
사실 원균은 육군에 더 어울리는 장수이다.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 붙어서
1:1로 치고 받고 싸우는것을 즐긴 장수였다.
멀리서 포격전을 한다거나 지형적 이점을 분석한다거나 하는 것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조선조정은 사실 장수의 적성이 무었이며 어떻게 배치를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그야말로 무능함의 극치를 이룬 정부였다.
죄도 없으면서 세번이나 문초를 받게 되어 거의 죽음에 이른 사람이 말과 여종을 바치고
풀려나는 웃지못할 일을 이날 일기에 적고 있다.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영혼도 찾아 올수 있다는~" 장군의 이 글귀는 가슴에 아린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아직도 우리 사회를 가름하고 있으니 말이다....
장군의 삶이 끝나는 무술년이다. 1598년....
10월 15일 즈음의 일기를 보면 겨우 12척의 배를 이끌고 고단한 행군을 하는 장군의 모습이
보이는데 예전에 번성하던 좌수영 앞바다에 배를 대니 왜적들의 손에 절딴난 좌수영의 처첨함
에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이때 부터는 그야말로 완전히 전시작전권이 없었음을 알수 있다.
적과의 교전에서 생긴 노획물과 왜적의 수급(머리)는 모두 명나라에 바쳐야 했다.
일방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23일날의 일기를 보면 명나라의 도독에게 조선의 장수가 매를 맞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부하가 남의 나라 장수로 부터 매를 맞고 있을때 이순신 장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장군은 그날의 소회를 적어 놓고 있지 않다. 자주 어떤일에 대한 느낌을 적어놓곤 하던
장군이 이날은 그냥 간단히 적고 있다.
한 나라의 해군 총사령관이면서도 작전권이 없는 비통함의 표현일 것이다.
너무 비통해서 휘하의 장수가 맞은 것에 대한 소회를 맑히지 못했을 것이다.
노량해전이 있기전의 일기이다.
무사히 귀국하기를 바라는 왜적들과 남의 나라 전쟁이니 실리만 챙기면 된다는 명나라의
거래가 공개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기고도 사로잡은 왜선과 군량을 전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돌아온 부하를
보면서 얼마나 서러웠을지 짐작이 간다.
전시를 맞아 작통권이 없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땅의 현실이 너무 당시와 닮아 있어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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