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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학농민전쟁의 첫승리,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전쟁 2006. 8. 16. 17:18

     


    동학농민전쟁의 첫승리,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전쟁사에 있어서 황토현전투가 가지는 의미는 아주 크다고 하겠다.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무기와 지형적 조건, 그리고 잘 훈련된 병사에 의하여 승패가
    좌우 되기는 하지만 무었보다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바로 군사들의 사기일것이다.


    동학농민군은 호미와 낫을 들던 손에 죽창을 들고 싸움에 나섰다.


    1894년 봄 고부군수의 학정에 대항하여 인근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고부를 점령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사실 전투다운 전투는 아니였고 농민군의 위세에 질린 몇 안되는 고부
    관아의 아전들이 스스로 투항한 결과 였다.
    따라서 농민군들은 관군과 정식적인 조우를 한번도 해보지도 못한채 고부관아 점령에
    고무되어 너도 나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인원이 1만에 가까웠고 그 군세로
    백산(白山)에 집결하였다.


    고부관아 점령이라는 급보에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
    등에게 영병(領兵) 250명과 보부상대 수천명을 주어 농민군을 소탕하게 하였다.
    농민군으로서는 실제적인 정신군대와 조우한 셈이다. 서울의 경군(京軍)과는 전력적인
    면에서 큰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지방군이라도 농민군과 비교가 힘들 정도 였다.


    당시에는 보부상은 특별히 나라에서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다소간의 장사의 편의를
    제공하고 대신 국난시에는 군인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전국을 맨몸으로 돌아다니던 그들
    보부상대는 관군보다 훨씬 기동력이나 체력이 뛰어났다고 할 수 있었다.
    수천명의 보부상대와 화승총등으로 무장한 지방군 250명은 내용적으로 볼때 오히려 농민군
    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수 있다.


    농민군은 관군을 맞아 황토현 서쪽에 있는 도교산(道橋山)에 중턱에 진을 쳤는데 관군은
    황토현의 평평한 평지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다. 결국 지리적 대치국면을 보면 농민군은
    위에서 아래고 관군은 밑에서 위로 공격하는 형세가 되었다.


    4월 6일 밤 농민군이 기습공격을 감행했는데 위치적으로 불리했던 관군은  이 싸움에서
    패배를 하게 되고 영장(營將)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하게 되는데 농민군은
    이 전투를 계기로 크게 사기가 오른데다가 더욱 조직적으로 결속되어 불과 1개월 만에
    호남지방의 대부분을 석권하게 되었다.


    따라서 황토현전투는 농민군이 정식 군대를 상대로 싸워 이겨낸 첫 승리라 하겠다.
    황토현은 동학농민전쟁에서의 첫 분수령이였다고 할것이다.

     

     

     

    황토현...

    말 그대로 풀이 하자면 황토의 고개라는 뜻일 게다.

    예전에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붉게 펼쳐진 황토가 너르게 펼쳐진 분지이다.

    이자리에 서면 이곳이 왜 황토현이라고 고갯마루라는 이름이 붙은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잘가지 않을 만큼 완만한 평지에 가깝다.

     

     

     

    황토현에는 황토현전적 기념관이 있다.

    예전에 황토현 전적지에는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 있었다고 했는데 조각가가 친일파라

    얼마전에 철거 되었다.

     

    이곳에는 그날의 황토현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지금의 정읍시 이평면 소재지가 있는 곳은 고부.정읍.태인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말복장터라고 불렀다.

    이곳은 예전부터 고부와 인근 줄포의 농수산물들이 거래되는 큰 장이 섰던 곳이다.

     

    1894년 음력 1월 10일 전봉준장군은 이곳에서 인근 농민군 수천명을 무장시키고 대오를

    정비한 다음 고부군수의 탐학을 조목 모목 열거한후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점령했다고 한다.

     

    동학농민전쟁의 첫 도화선이 되었던 말목장터...그곳에는 큰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전봉준 장군은 그 감나무 아래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전투를 선언했다.

     

    150여년을 자리지키며 역사를 증언하던 이 감나무는 2003년 여름 태풍에 넘어졌다.

    그래서 보존처리를 거쳐 이 역사관 안에 전시되었다.

     

     

     

     

    당시 지주였던 양반이 먹던 밥상과 농민이 먹던 밥상....

    당시 농민들은 무려 20~30가지의 각종 세금에 시달렸고 여러가지 명목으로 지방관들의

    탐학에 시달려야 했다.

     

    이 부근은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지대였지만 농민들은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수많은 세금과 지주들의 과도한 도지, 지방관들의 탐학으로 보리로 겨우 연명을 했다.

     

    결국 동학농민전쟁은 부패할대로 부패해버린 사회 시스템에 대한 도전이였던 셈이다.

     

     

     

    장태라고 하는 것이다. 본래는 닭을 키우던 것인데 농민군들은 이 장태에 짚단을

    빼곡하게 채워서 위에서 아래로 굴리며 경군(京軍)의 총탄을 피했다고 한다.

     

    이 장태는 황토현 전투에서 사용된것이 아니고 경군상대의 첫 승리지였던 전라남도

    장성의 황룡전투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 유명한 사발통문...

    사발을 엎어 놓고 거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죽 돌아가며 약속의 증표로 서명을

    남기는 것을 말하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나중에 일이 잘못되어도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하기 위함이였다고 한다.

     

     

     

    1970년대 서부영화에 자주 등장했던 캐터링 기관총...

    "돌아온 장고"였던가? 그런 류의 영화에 이것 한자루로 수많은 총잡이들을 쓸어버리는

    대단히 위력적인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자체로 만들수 없어서 미국에서 사왔다고 한다.

     

    동학농민전쟁의 최대의 격전지이면서도 결국 실패를 기록한 분수령이 되었던 공주의

    우금치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해서 농민군에게 페배를 안긴 바로 그 무기이다.

     

    역사가 증거하는 바와 같이 미국은 늘 일본편에서 우리를 바라다 본다.

     

     

     

    우금치전투의 상황도..대동여지도 위에 아로 새긴 농민군들의 행로...

    희망의 길, 그리고 절망의 길이기도 했을 그런 행로가 빨간색으로 그려져 있다.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동학농민군들의 사당..

    그들의 피와 땀, 그리고 목숨에 대한 보답으로 후인이 목례를 하다.

     

    생각한다.

    나는 그 상황이 되었다면 가족을 뒤로 한채 죽창을 겨드랑이에 비껴끼고 흔쾌히

    그길을 나설 수 있었을까?

     

    아니다...역시 아니다. 그래서 그들이 더욱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농민군들이 수없이 오르내렸을 황토언덕...저기 보이는 정상부가 농민군들이 진을 친

    도교산이다.

     

    재래식 전투에서 위치적 유리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를리 없는 관군이 아랫쪽 평지에

    진을 쳤다는 것은 사실 상식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패배를 자초한 진법이다.

    아마도 농민군의 전투력을 상당히 깔보았을 공산이 크다.

     

     

     


    지금은 사적 제295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토현 승리를 일구어 낸  도교산(道橋山)은
    높이가 해발 약 70m이며, 당시 태인(泰仁)과 고부(古阜)를 연결하는 요지였다.

    지금 이 고갯마루에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녹두꽃 대신 주변에 피어 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꽃..

    줄기에 가시가 제법 크다. 식물도감을 찾아 본다 하면서 아직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거친 줄기의 가시들이 동학농민군들의 삶의 모습을 닮아서 가슴이 짠하다.

     

     

     

    차라리 학살수준이였던 우금치 전투..이 전투에서 농민군의 대부분이 전사했다.

    그리고 나서도 각지에서 토벌이라는 이름으로 또 수많은 그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나는 그들이 하늘의 별이 되었기를 빈다. 아니 그렇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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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가는 길

    1) 호남고속도로 정읍I.C.→정읍시내→신태인 방면 705번 지방도로
                  →신월(좌회전)→2km→황토현전적지
    2) 호남고속도로 정읍I.C.→29번 국도→8.5km→고부→영원쪽으로
                  1km 가서 우회전→황토현전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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