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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학농민군의 경군상대 첫승리지, 황룡전적지
    동학농민전쟁 2006. 7. 11. 22:47


    동학농민군의 경군상대 첫승리지, 황룡전적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통쾌함을 준 소설속 주인공을 들라고 한다면
    역시 홍길동일 것이다. 그런데 홍길동이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홍길동의 모델이 실존했다는곳은 다름 아닌 전라도 장성군 이다.


    장성군하면 백양사라는 아주 운치있고 역사깊은 고찰 백양사가 있는 곳이다.
    또 저번 포스트에서 소개한적이 있는 "행주대첩의 숨은 공로자, 변이중"의 서원이
    있기도 하다.

     

     

     

     


    동학농민전쟁사에 있어서도 장성은 중요한 역활을 하는데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 황룡전적지는 1894년 4월 23일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서울에서
    파견된 경군을 무찌른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격전지이다.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고창, 영광, 함평현을 차례로 함락한 후 전라도를 다스리는
    감영이 있으며 조선왕조의 상징적 발상지인 전주성를 공격하기 위하여 전진하던 중에
    이 곳에서 경군과 치열한 대접전을 벌린 곳이다.


    이 싸움이 중요한 의미는 군사적 훈련도 받지 못한데다가 무장도 보잘것 없던 동학농민군이
    서울에서 파견된 정예부대와 접전하여 격파한 의미있는 전투인데 이로 인해 동학농민군은
    사기와 자신감이 충만해진 계기가, 경군에게는 낭패와 당혹감,농민군에 대한 숫적 열등감을
    주어 작전 반경을 위축시킨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동학군은 쿠르프포1좌와 회전포 1좌, 그리고 양총 1백여정 등 많은
    무기를 노획하여 이를 바탕으로 곧바로 전주성을 점령할 수 있게 되었다.그 후  몇차례의
    쌍방간 공방전이 벌어진 후 휴전을 하게 되는데 전략적 약세에 섰던 정부에서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전적 수용했던 전주화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장태(닭의 둥지)라는 무기가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것은 대나무를 쪼개
    원형으로 길게 만들어 그속에 많은 짚을 넣어 굴리면서 경군의 총알을 피했다.

     

     

     

    동학농민군의 주무기는 대나무를 날카롭게 잘라 만든 죽창(竹槍)이 였다.

    그래도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두려움 없이 총알 앞에 나설 수 있었다.

    그들에게 죽음도 초월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그 무었은 어떤것이였을까?

     

     

     

    내가 동학농민전쟁을 혁명이나 운동이나 난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전쟁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규율...정해진 강령이 있다는 것은 군대의 기본이다.

    분명한 목적과 목표가 있었으므로 동학농민전쟁이라 하여도 하등의 문제가 없다.

     


    이 황룡전투에 대하여 전봉준 장군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전봉준 장군의 심문한 기록을 통해서 그의 말을 듣는 다는 것이 너무 아쉽고 아쉽다.
    그것도 이 기록이 일본공사가 심문한 내용이라는게 더욱 마음을 아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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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問 : 於長成爲接戰乎
    장성에서도 접전하였느냐?


    供 : 與京軍爲接戰矣
    경군(洪啓薰招討使)과 더불어 접전하였다.(黃龍 싸움)


    問 : 與京軍接戰 孰勝孰敗
    경군과 더불어 접전하여 어느 쪽이 이기고 어느 쪽이 패했나?


    供 : 我軍聚食時 京軍以大砲射擊 故我軍死者四五十名 我軍一追逐 京軍敗走
    取來大砲二座 如干彈丸矣
    아군이 취식할 때 경군이 대포로 사격하여 아군의 4,50명이 죽자 아군은
    일제히 추축하니 관군은 패주하여서 대포 이(二)좌와 탄환을 탈취하여 왔다.


    問 : 其時兩軍數各幾何
    그 때 양군의 수는 각각 얼마나 되었던가?


    供 : 京軍七百 我軍則四千餘名
    경군은 7백명이고 아군은 4천명이었다.


    問 : 其時長成所行事 一一直告
    그 때 장성에서 행한 일을 바른대로 일일이 고하라.


    供 : 京軍敗走後 我軍倍道 先京軍入全州守成矣
    경군이 패주한 후 아군은 배도(발걸음을 두배로 빨리 하는 것)하여 경군보다
    먼저 전주에 들어가 수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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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위에 나오는 경군의 지휘자 홍계훈 초토사(洪啓薰招討使)의 흔적을 충청도땅
    계룡산 아래 갑사에서 찾았다.
    "계룡갑사"라는 현판글씨는 동학농민군의 토벌을 위해 파견된 홍계훈의 글씨이다.

     

     

     

    좁은 나라다. 그러나 깊이가 아주 깊어서 미국처럼 넓지만 깊이가 없는 나라들보다
    그 용량의 측면에서는 훨씬 크다. 어디서나 좋은쪽과 나쁜쪽이 구분이 모호하게
    연결되어 있는 곳이 우리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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