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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학농민군과 전주 풍남문 (보물 제 308호)
    동학농민전쟁 2007. 9. 3. 21:23

     

    동학농민군과 전주 풍남문 (보물 제308호)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 버린때는 조선시대였다. 고려때만
    하여도 민족적 주체성으로 무장되어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견지하였고 고구려때는 거란,
    선비, 여진과는 형제라는 개념을 공유하여 중국에서도 함부로 북쪽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고려를 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당시 비주류이던 유학자들과 손을
    잡음으로써 거란, 여진등을 오랑캐라 칭하며 중국문화에 스스로를 함몰해 갔다.


    이성계의 본향인 전주에 있는 풍남문은 당시 이씨조선의 뿌리인 곳으로 상징적 의미가 대단히
    컸던 곳이다. 그러나 그 이름의 연원을 알고 보면 사대사상의 집약임을 알 수 있다.


    중국 진 왕조이후 중국천하를 통일한 인물이 한고조 유방이다. 그는 풍패(지금의 강소성 패현)
    출신으로 뒷골목에서 장사치들을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삥을 뜯고는 하던 천하의 파락호로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중국의 혼란함이 그에게 기회를 주어 중국통일에 성공하게 된다.


    중국 역사의 절반은 이민족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았고 특히 중국인들이 공포라고 표현하였던
    고조선을 굴복시킴으로써 중국사람들의 자존심을 높이 세운 유방에게 최고의 황제라는 칭호를
    붙였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할 때 漢族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국의 해바라기 조선 유생들은 이성계의 관향인 전주를 유방의 고향인 풀패에 견주어 풍패향,
    풍패지향이라 불렀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에는 풍패향의 남문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풍남문은 전주성의 남쪽에 있는 문이였기 때문이다.


    전주가 후백제의 왕도였으므로 왕도에 걸맞는 성이 있었을 것이었으나 고려 공양왕 원년인
    1388년에 관찰사 최유경이 축조하였고 조선 영조대에 이르러  크게 개축했다고 전해진다.
    영조 43년 (1767년) 3월에 큰 화재로 불탔는데 관찰사 홍낙인이 복구하고 명칭을 풍남문으로
    바꾸었다.


    풍남문은 여러가지 사건들을 많이 겪었는데 정유재란 당시 왜적에 의하여 불태워 지기도
    하였지만 들불처럼 일어난 동학농민군이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두고 고창, 함평, 원평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여 지금은 없어진 서문을 통해 전주성을 점령했다가 일시적으로 화�(和約)을
    맺은 역사적인 곳이기에 더 의의가 있다.

     

     

    120년전쯤의 전주 시가지 모습... 풍남문으로 추정되는 루각 옆으로 성벽이 죽~ 이어져 있다.

     

     

    예전에는 성문밖 황량한 초가였을 곳이었겠지만 지금은 제법 번화한 거리가 되었다.

     

     
    조병갑이라는 탐관오리가 있었다. 당시는 대부분의 벼슬이 실력이 아닌 돈으로 매매 되던
    때로 조병갑 역시 자신의 벼슬을 위해 들어갔던 돈에다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재물을
    모으기 위해 혹독한 방법으로 농민들을 착취했고 기존의 보(潽)를 두고 새로운 보를 만들어
    물세를 받기 시작하자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봉기하게 되었다.


    이 1차 봉기는 관의 회유로 여러가지 농민들이 요구한 조건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해산하여
    각자의 생업으로 돌아갔으나 나라에서는 안핵사를 보내 1차 농민봉기의 주도자 색출에 나서
    수많은 농민들이 잡혀갔다. 고부의 안핵사로 온 이용태가 난민과  동학교도를 잡아들이면서
    집에 불을 지르고 사건에 연루된자의 처자를 잡아죽이는 따위의 온갖 횡포를 저지르더니
    감사 김문현은 부호들을 잡아들여 난을 충동질했다며 재물을 토색질했다. 2차 봉기의 발단
    을 관리들이 제공한 셈이었다.


    4월 27일은 전주성 서문의 장날이었다. 이날 새벽 농민군은 장꾼으로 변장하고 삼삼오오
    시장에 잠입하였다. 오시가 되자 장터 바깥의 용머리 고개에서 포소리가 여러 번 울렸다.
    그리고 총소리도 연이어 들리자 놀란 장꾼들이 난장판을 이루었고 그 혼란한 틈을 비집고
    농민군은 공격을 시작했다.

     

     

    당시에 관군이 지키고 있었을 성벽~ 반달 모양으로 풍남문을 에워싸고 있는데 옛날에 공성전을

    하게되면 큰 통나무를 뾰족하게 만들고 이를 수레에 올려 밀고와 성문을 들이 박아 깨트렸다.

    그러나 성벽으로 성문을 에워싸게 되면 공격자의 입장에서는 훨씬 어려워 지는 것이다.

    성문을 공격하기 위해 접근 했다 하더라도 반원의 성벽인 이곳에서 성문을 공격하는 적의

    배후를 공격할 수도 있었기에 상당히 효과적인 방어물인 셈이다.

     

     

     

    성벽에 뚫어 놓은 공격용 구멍이다. 하나는 수평으로 하나는 아래를 향한 경사로 되어

    있어서 공격자의 종류에 따라 방어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다급해진 전주감사 김문현은 네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서문 바깥의 민가 수천 호를 불태우게
    했다. 그러나 미리 잠입해 있던 농민군이 혼란한 틈을 타 서문을 열어제쳤다. 서문을 통해
    농민군들이 들이 닥치자 김문현은 교자를 타고 동문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이미 농민군에게
    점령당해 문이 닫혀 빠져나갈 수가 없자 이에 급한 나머지 교자를 버리고 떨어진 옷에 짚신을
    신은 변장차림으로 농민군을 따라 이십여 리를 나와 용진촌까지 나와 백성의 노새를 빌려타고
    도주하였다.


    다급해진 조선정부는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농민군에게는 회유책을 내며 화의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미 청나라 군사가 5월 5일 아산의 둔포로 상륙하였고 기회를 노리던
    일본 역시 인천에 부대를 상륙시켰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5월 7일 전봉준은 관군과
    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비우고 농민군을 해산하였다.


    그가 화약을 맺은 것에 대하여 후일 사가들이 비판을 하지만 당시 전봉준에게는 몇 가지의
    불리한 여건이 있었다. 첫째는 기대했던 북접의 호응이 없었다는 점이다. 최시형이 이끌며
    제법 세력이 컸던 북접의 지원이 없었다는 것은 전봉준에게는 치명적이었다 할 것이다.
    두번째는 당시가 농번기였다는 것이다. 물산이 풍부하지 않았던 조선에서 농사는 생명줄로
    여겨졌고 대다수 농민들이었던 동학군들은 어쩔 수 없이 농삿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세번째는 청군과 일병의 출군 명분을 없애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무었보다
    전주전투에서 전봉준이 머리와 다리를 다쳤다는 것이다.


    그 이후 동학농민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왔던 청병과 일병의 전투에서
    일병이 승리하게 되자 개화정권과 손을 잡고 나라일을 좌지우지 하자 재봉기를 결심했다.
    음력 9월 18일 북접의 최시형은 최초로 무력봉기를 선언하자 이와 때를 맞추어 전봉준은
    전라도 각 지방의 접주들을 삼례역으로 불러모았다. 그리고 각 고을에 격문을 돌리며 일대
    동원령을 내렸다.


    논산의 회합에서 북접의 통령 손병회와 마주 앉아 설득한 끝에 남북접의 연합군이 공주를
    사방에서 포위해 들어갔지만 공주를 먼저 점령하고 기다리던 관군과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패배하고 피해 다니던 중 밀고로 잡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전주화약(全州和約)은 또 하나의 동학농민전쟁의 중대한 기로가 되었던 것이고 그 역사의
    현장을 지켜낸 풍남문이지만 오늘도 말이 없다.

     

    역사라는 것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같다. 어느 시점을 잡고 있을 재간이 없다.

    다시 말하면 현재라는 것은 결코 없다는 말과 같다. 미래에서 흘러온 시간이 현재에

    도달했다 싶으면 찰나간이지만 과거의 시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미래는 오지 않았으므로 보거나 인식할 수 없는 것이고 오로지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기록으로 남겨졌던 아니면 형태로 남아있던 과거의 시간뿐이다.

     

    비가 퍼붓는 풍남문의 녹슨 쇳조각에 쓴 녹의 까끄러움에 손을 대고 가만히 눈을 감고

    100년의 시간을 거슬러 보고자 했다.

     

    쏴아아- 쏴아아-

    거세어져 가는 비소리가 마치 수없는 세월동안 핍박하던 권력의 상징인 전주성을 함락했던

    전봉준 장군과 농학농민군들의 함성인듯 했다.

     

     

     

    돌을 다듬어 정교하게 맞춘 성벽... 수원화성도 이런 방식으로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때 부터 기마전같은 속도전보다는 공성전같은 지구전에 익숙했다.

    그래서 한때는 중국도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후기로 오면서 성벽을 튼튼하게 만드는 이런 방식의 축성은 아주 발달했다.

     

     

     

    비가 왔다. 그것도 아주 거세게 내렸다.

    풍남문의 드센 팔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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