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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학농민전쟁의 분수령, 공주 우금치 고개
    동학농민전쟁 2006. 7. 9. 01:41


    동학농민전쟁의 분수령, 공주 우금치 고개

     

     

     


    동학농민전쟁의 명칭에 대하여는 여러 이견이 많은게 사실이다.
    혁명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고 운동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또 단순히 동학란이라고
    격하해서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게 사실이다.


    당시의 지배세력인 유학자들의 시각은 대체로 농민들이 일으킨 란(亂)이라는 이름으로
    일부러 격하를 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나는 동학농민전쟁이라고 정의 한다.
    분명 군대의 편제를 갖추었고 지휘자가 분명했으며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1894년 9월 두번째 봉기 이후 동학 남접의 접주 전봉준 장군은 친일정권에 항거하기
    위하여 공주와 수원을 거쳐 서울을 공격하기로 전략을 정하고 북접과 연합전선을
    이루었다.
    전봉준 장군은 먼저 4,0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로 올라 오다가 그해 10월
    논산에서 손병희(孫秉熙)의 북접군과 합류하였고 일시에 공주를 공격하기로 정하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정희(申正熙), 이두황(李斗璜), 허진(許璡) 등이 이끄는 2,500여
    명의 관군은 신식무기로 무장한 200여 명의 일본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괴멸시키기
    위하여 공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침내 10월 23일 이인(利仁), 효포(孝浦)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이 벌어졌으나 농민군이
    패배하여 후퇴하였다가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어 11월 초 우금치를 주공격로로, 곰티·
    곰내·하고개·주미산 쪽을 보조 공격로로 정한 다음에 금강 건너 유구 쪽에 농민군을
    배치하여 공주를 협공하기로 하고 11월 8일 총공격을 시작하여 관군을 우금치로 몰자
    조선, 일본연합군은 캐터링 기관총등의 뛰어난 화력을 가진 최신무기로 좌, 우측에서
    협공하여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우금치에서 화력에 밀려 수많은 희생자를 낸 농민군은 공주의 남동쪽으로 후퇴하면서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결국 제2차 공주접전에서도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대패하고 말았다. 전봉준 장군은 계속된 조선, 일본 연합군의 협공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농민군을 해산하였고 그해 12월 배반자의 밀고로 전라남도 순창에서 체포되었다.
    이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벌인 전투 가운데 최대 규모였으며 농민군이 크게 패배하여
    동학농민전쟁이 실패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인쪽에서 공주로 길이다. 우금치에서 내려다본 이인쪽 길이다.

    동학농민군들은 이길을 걸어서 우금치 고개로 집결했다.

    높지 않은 이곳이 어쩌면 지형적인 이점을 기대하기 힘들었기에 더욱 힘들었을지 모른다.

     

     

    관군들과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들은 이길을 통해서 저 위 우금치 고개를 공략했다.

    어쩌면 지금 사진을 찍은 이 위치에서 일본군들은 대포를 배치하고 포탄을 쏘았을 것이다.

    무장이 약했던 관군들은 화승총을 쏘면서 일본군들의 방패 역활을 했을 것이다.

     

     

     

     

    마침 비가 내렸다. 여름 장맛비가 내렸다.

    이 고개에 목숨을 버린 수많은 영혼들의 눈물처럼 그렇게 엄청난 소나기가 쏟아 졌다.

     

    그들이 세상을 뒤집고자 한것도 아니고 전봉준 장군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한것도 아니고

    다만 힘없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탐관오리 몇 처단해주고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다가

    바치려는 모리배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했을 뿐이다.

     

     

     

     

    흙으로 쌓아 올린 이런 토성에 의지해서 관군에게서 노획한 화승총 몇자루...활 ..

    대나무를 뾰족하게 깎은 죽창이 전부 였던 그들....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망태에 짚을 잔뜩 넣어서 아랫쪽으로 굴려보지만 1분에

    몇백발씩 쏘아대는 캐터링식 기관총과 신식 소총과 화력좋은 대포에는 당할수 없었다.

     

    수많은 농민군들이 이 흙담에서 피가 터지고 살점이 흩어지며 그렇게 숨을 거두어 갔다.

     

    그들이 진정으로 바랬던 꿈은 무었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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