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녹두장군, 전봉준의 생가를 찾다.
    동학농민전쟁 2006. 5. 6. 14:34

     

    녹두장군, 전봉준의 생가를 찾다.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흔적이란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 흔적이 좋은 것이였던
    아니면 나쁜 것이였던지 흔적이란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흔적을 남긴 사람에게는 특별하게 위인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부여하고 그의 발자죽을 따라 밟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흔적을 보호
    하고 다시 뒷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개의 위인들을 흠모함에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에는 그 사람이 태어난
    지방이나 지역등의 위치적 행적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생가,고택등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생가와 고택은 확실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생가는 그 위인이 태어난 집을 말하는 것이고 고택은 그 위인이 생활을 하던
    곳이라고 보면 생가는 둘일수 없고 고택은 여럿이 있을수 있다는 것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듯이 애절한 음조로 구성지게 부르던 이 노래는 힘없는 우리들
    조선이 일본,중국등의 열강에 의해 농단되던때 불려지던 노래이다.
    파랑새는 일본이나 중국의 외세세력일 것이고 녹두는 수많은 동학군일 것이였으며
    그들의 지도자 전봉준은 녹두꽃으로 비유되었다. 청포장수는 당연히 수 많은 조선의
    백성들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파랑새는 녹두꽃을 떨구고 청포장수인 백성들은 암흑의 구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에 동학농민군과 전봉준 장군이 백성들에게 전해준 희망의
    메세지는 대단한 것이였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탐학과 일신의 영달에만 관심이 있었고 양반들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커녕 그저 험난한 시절에 비겁함으로 일관했다.
    이런 시대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동학농민군들과 전봉준 장군이야 말로
    시대의 등불이요 세상의 희망이였던 것이다.

     

     

     


    전봉준의 생가를 두고 학설이 분분하다.
    당시의 관습으로 보아 양반이 아니였던 탓으로 기록이 확실하지 않는 탓일 것이다.
    그러나 족보의 기록및 여러 증언들을 통해서 고창군에 있는 생가유적이 유력하다.


    반면에 고창군의 바로 옆 동네인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梨坪面) 장내리(長內里)
    조소(鳥巢)마을에는 전봉준선생고택지 [全琫準先生故宅址]가 있는데 이 곳은 장군이
    동학군을 이끌기 위해 집을 떠나기 전까지 기거를 했던 곳이다.

     

    전봉준 장군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장군의 초명 즉 태어났을대의 이름은 명숙(明叔)이였다고 한다. 녹두장군(綠豆將軍)은
    어릴쩍에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작았던데서 붙은 별명이라고 전해진다.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30여 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임명되고 은거 중인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여 국정개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892년(고종 29) 뇌물로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貪虐)을 자행하고도 모자라서 다시금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700섬의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是正)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官衙)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강탈당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케 했으나 조병갑과 같은 수구세력인 이병태는 오히려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하고 투옥및 살해하는가 하면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에 대한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


    이에 자신들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 이윽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궐기를 호소하였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泰仁)·
    무장(茂長)·금구(金溝)·정읍(井邑)·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봉기, 8,000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진멸권귀(盡滅權貴)·축멸왜이(逐滅倭夷)
    를 내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 전주를 향해 진격 중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계속 정읍·고창·무장 등을 장악,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淸軍)이 충청도 둔포에 상륙하여 일부는 서울로 일부는
    남으로 동학군을 압박하는 가운데 동시에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군(日軍)도
    인천항을 통해 입국하여 마침내 청일전쟁이 벌어지는 등 국가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선무(宣撫)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탐관오리의
    응징, 노비의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 등 12개 조목의 시정개혁(施政改革)에 대한 확약을
    받고 마침내 휴전을 성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도정(道政)에
    참여, 감시하였으나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일본이
    청일전쟁에서의 우세를 이용하여 침략행위를 노골화하자 이에 격분, 재봉기하였다.
    전봉준은 남도접주(南道接主)로 12만에 이르는 병력을 지휘,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
    (孫秉熙)의 10만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抗日救國)의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다.


    한때는 중부·남부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규모가 확대되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였으며 공주(公州)에서 일본군과의 사활을 건 대격전 끝에 대패(大敗)하고
    10월 금구싸움을 끝으로 종식되었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 피신, 동지 손화중(孫化仲)·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거(再擧)를 모의하던 중 지방민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동지들과 함께 1895년 3월
    사형당하여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나지막한 산 아랫동네에 있는 전봉준 장군의 생가가 있는 마을..

    평화로워 보이는 이 마을에서 결코 편하지 않은 한 사람이 태어났다.

    어쩌면 이 동네의 운명이 본래 그랬나 싶게 지금은 저 산과 마을사이를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어서 콘크리트 포장도로 특유의 소음을 마을까지 바로 전해준다.

     

     

     

     

    전봉준...녹두장군이라는 친숙한 별명을 가졌던 그가 태어나 13세까지 살았던 집..

    물론 이 집의 생김새가 1855년 그가 태어날 당시와 같지는 않지만 다만 그가 태어난

    위치적 기념이라는 뜻에서 김회가 새로운 곳이다.

     

     

    장군의 부친이 훈장으로 있으면서 학당과 기거를 했을 본채...

    이곳에서 전봉준 장군도 첫 고고성을 터트렸을 것이다.

    영웅의 탄생이란 늘 그렇듯 평범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법이다.

     

    우리들에게 수많은 신화들이 존재하는 것은 늘 영웅의 탄생을 기대하기 때문인제

    실상 세상의 모든 영웅들은 태어남이 평범하다.

     

    그래서 존재하는 말이 있지 않는가 말이다.

     

    "평범속의 비범~"

     

     

     

     

    화장실과 창고등의 용도로 쓰였던 아랫채...

    본래는 서당,안채,사랑채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본채와 이 건물이 유이(有二)하다.

     

     

     

    나는 절에 자주 가게 되는데 대웅전 앞...그 절의 주인인 부처님의 눈방향으로

    보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서서보면 늘 그 절에서 가장 시원한 풍경과 마주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 이다.

    장군이 대청마루에 서서 바라보는 마을 풍경은 이랬을 것이다.

     

    뙈약볓 아래 종일 허리펴지 못하고 일하는 농삿꾼도 보았을 것이고 양반입네 하고

    갓으로 해를 가리고 부채를 썰렁 썰렁~ 거리며 거들먹이는 모습도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이 풍경을 통해 그에게 혁명의 사상이 싹을 티우고 있었는지

    모르는 일이다.

     

     

     

    개인이 만든 전봉준 장군의 생활 전시장...

    그러나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장군의 흔적에 목마른 나그네의 눈동자만 먼지묻은

    유리문 저쪽을 아쉽게 훑다가 돌아 나왔다.

     

    언제나 다시 문을 연다는 안내판도 없었다.

    민중의 지도자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외로운 모양이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