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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학농민전쟁의 발상지 - 무장기포지
    동학농민전쟁 2006. 2. 20. 23:30

     

     

    갑오농민운동..동학란...동학혁명..갑오동학혁명....갑오농민전쟁...
    아직 정확한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은 것이 전봉준을 필두로 벌어진 갑오년에 있었던
    농민전쟁이다.

     

    "혁명"이라 부르기에는 정권이 바뀌지 않았고 "란"이라고 하기에는 우리민족의 역사에
    끼친 영향이 너무 크고 "운동"이라 하기에는 그 피흘림이 너무 깊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인 취향으로 동학농민전쟁으로 규정하고 싶다.
    어떤 학자는 참여한 사람들중에 농민이 대다수였다는 점을 가지고 농민이라는 것을
    빼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지도자의 대부분이 동학의 접주들이였고 대부분의
    동학도들이 참여를 하였으므로 비록 대다수가 일반 농민이 참여를 하였다고 해도
    동학이라는 이름을 뺀다는 것은 *독교등의 일부 종교성향 학자들의 의도적 편견의
    발로다.

     

    그 갑오년 동학농민전쟁은 역사적 배경이나 전개에 대한 여러가지를 차츰 싣기로
    하고 오늘은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에 있는 무장기포지를 소개한다.

     

    조선의 벼농사 지대에서 가장 대표적인 전라도 서북 지역은 국교 확대 이후 쌀이
    일본으로 빠져 나가면서 농민 수탈이 매우 심하였다.
    또 조선 후기 이래 이 곳에는 왕실 소유의 토지인 궁방전이 집중되어 있어 이를
    관리하는 감관(監官)의 농간이 끊이지 않았고 조세 운반을 맡은 전운사(轉運使)와
    중앙에서 파견된 균전사(均田使) 등이 수시로 농민들을 억압하고 수탈하였다.
    그리고 각종 부당한 징수가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특히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경우에 1892년 부임한 이후 만석보의 물세 등 갖은 수탈을 자행하였다.

     

    조병갑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불만이 하늘을 찌를듯 하였는데 그 불만이
    터져서 초래된 농민전쟁은 1893년 4월에 이미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전봉준, 황하일 등 동학의 전라도의 중심인 남접의 우두머리들은 교단파인 북접의
    보은 집회와 별도로 금구 원평리에서 1만여 명의 농민집회를 연 뒤에  서울로 쳐올
    라가서 불만을 직접 임금께 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비록 동학 간부들이 반대하여 계획을 중단하였지만, 이는 단지 연기에 불과할 뿐
    남접 우두머리들은 또 다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을 계기로 전봉준 등은 사발 통문을 돌려 농민군 지도자들을
    모은 뒤 거사계획을 다시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연기를 거듭한 끝에 1894년 1월 11일 고부에서 전봉준이 주도가 되어 민란이
    일어났다.
    이들 난민은 고부 군아를 점령하고 이어 아전을 처벌하는 등 개혁 활동을 벌였다.
    다만 아직 채비가 갖추어지지 않아 전쟁으로 나아가지 않은 데다가 신임 군수 박원명의
    무마책으로 다소 항쟁의 강도가 떨어졌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오히려 민란 관련자를 역적죄로 몰아 탄압을 가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전봉준 등은 무장으로 옮겨 3월 20일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른바 제1차 농민전쟁이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무장의 대접주인 손화중을 설득하여 농민군을 모아 봉건적 수탈과
    폐정을 혁신하기 위해 전면적으로 봉기를 단행하게 된다.
    그 후 고부를 다시 점령해 폐정을 없애고 백산으로 이동, 농민군 진영을 전면 개편해
    연합부대를 결성했다.
    동학농민군의 전면적인 기포가 무장 당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마침내 갑오년 3월 21일 동학농민혁명의 봉기를 알리는 창의문을 전국에 선포하고
    통문을 돌리어 혁명으로의 농민군이 일어서게 된다. 이들의 주도세력이 동학교도들
    이었음에도 포교를 요구하는 내용이 창의문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았고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이라는 당당한 대의를 궁극적인 목적에 두고 혁명으로 가는
    동학농민군의 횃불이 되었다.
    이것은 동학교도와 농민들의 결합과 개혁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장 당산에서 힘을 모아 일어난 농민군들이 고부를 점령하고 그 병력을 강화한 후,
    이동해 백산에 진을 치게 된다.
    이것을 ‘백산결진’이라 하는데 역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지리적으로 교통의 요충지였던 백산에서 농민군은 더 확대되어 그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대진군을 위한 체계적인 틀 역시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이 무장기포지는 동학농민전쟁의 가장 큰 시발점이 된 셈이였다.
    사람답게 살자고..남의 힘을 물리치고 우리힘으로 살자고 대나무를 깍아만든
    보잘것 없는 죽창으로 싸웠던 선인들의 흔적 앞에서 숙연해졌다.

     

    갑자기 하늘에서 송이 눈이 펑펑~ 내렸다.

     

    **** 참고: 고창군 홈페이지

    **** 찾아간날: 2005년 2월 20일

    **** 찾아가는길: 고창군에서 796번 도로를 타고 칠암까지 가서 칠암에서
                              홍농읍쪽으로 조금만 가면 길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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