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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두장군 전봉준의 고택을 찾아서...
    동학농민전쟁 2006. 7. 11. 16:38


    녹두장군 전봉준의 고택을 찾아서...

     

     

     

     

     

    조선말의 가장 큰 사건이라면 동학농민전쟁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경주에 살던 수운 최제우 선생으로 부터 새로운 사상이 정리
    되고 기존의 질서와 사상에 혐오를 느끼던 대중들 속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날 당시만 하여도 지도자 층만 동학교도 였을뿐이고
    70~80%는 순수한 농민들이였다. 그들이 죽창을 들고 일어날 정도였으니 당시의
    썩어빠진 지배층의 일단을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동학농민전쟁을 두고 "전봉준"이라는 이름 석자가 차지하는 영역이야 말로 실로
    엄청나게 큰것임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가끔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인의 흔적을 따라서 가다가 보면 생가,고택을
    가지고 혼동하는 경우가 왕왕있음을 보게 된다.
    생가는 그 사람이 태어난 곳이고 고택은 생활을 했던 곳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나 이곳 저곳으로 생활터전이 바뀌다보니 대개는 생가와 고택이 다르다.
    특별히 인생유전이 많았던 녹두장군 전봉준이야 말로 그러 했으리라.


    저번에는 전봉준 장군의 생가를 찾았던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의 고택을
    찾아서 떠나본다. 생가를 찾았을때의 포스트는 아래를 참조하면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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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두장군, 전봉준의 생가를 찾다.
    http://blog.daum.net/roadtour/2182537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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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두장군 전봉준의 자(字)는 명숙(明淑) 천안전씨(天安全氏)이다. 일부에서는
    태안에서 출생하였다고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고창을 그의 출생지로 본다.
    그래서 고창에는 그의 생가 유허가 있다.

     

    그가 녹두(綠豆)란 별호를 갖게 된데에는 그의 유난히 작았던 몸집때문이라고 한다.
    어려서 조부를 따라 전주 구미리로 옮겨 살다가 정읍시 감곡면 계룡리로 이사했고
    이곳에서 18세 때까지 살다가 20리 거리의 산외면 동곡리로 옮겨 살았다.
    전봉준이 일생동안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이 지금실이지만 제일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이 38살에 이사를 한 지금의 고택이 있는 조소리라고 한다.

     

     

     

     

    그의 고택이 있는 조소리..그는 이곳에서 그다지 오래 살지는 못했다.

    이사와서 막 훈장생활에 탄력을 받을 즈음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에게 억울함을 호소했고 그는 분연히 그들의 앞에 서기를 주저 하지 않았다.

    그후 이집은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서 태워졌다가 최근에 다시 세워졌다.

     

    고부봉기때부터 그는 사실 빈한한 훈장으로 살았던 탓에 탐학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주변의 무식한 농군들 사이에서 흔치 않게 글을 아는 탓으로 지도자로
    옹립이 되었다.


    초기의 봉기는 주로 탐관오리의 학정에 반발한 경향이 있지만 2차 봉기 이후에는
    열강의 틈바구니..그것도 군대까지 동원하여 나라를 삼키려는 일본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열망이 더욱 드셌다. 당시만 하여도 그는 알려지지 않은  동학접주(東學接主)로
    동학농민전쟁을 이끈 선각자요 더불어 의지력과 영도력을 함께 지닌 인물이었다.


    사실 조선 말엽에는 전국의 많은 곳에서 민란이 들불처럼 일어 났지만 대개의 경우는
    조정에서 안핵사라는 직책의 벼슬아치를 내려 보내면 평정이 되었지만 고부에서 일어난
    만석보와 관련한 최초의 동학란은 그렇지 못했다.
    안핵사 이용태가 정규군을 거느리고 내려와 동학교도를 역적으로 몰아서 마구 처단하는등
    압박을 가했지만 전봉준은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을 움직여서 마침내 동학교도가 정식으로
    참여를 하게 만들었다.


    이해 6월 21일 (양 7월 23일) 일본군이 궁성에 침입하여 고종 임금을 연금하는 사태를
    맞아 전봉준은 삼례에서 구월봉기를 일으켜 서울로 진격하다가 10월 23일 공주에서
    15일 동안 혈전 끝에 패하고 후퇴하여 11월 27일 태인싸움을 최후로 농민군을 해산했다.


    태인싸움을 최후로 농민군을 해산한 전봉준은 수행원 몇 명과 이틀뒤인 29일 입암산성으로
    들어 갔다가 일본군 三尾(모리오) 부대와 이규태의 관군이 추격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다음날 30일 다시 백양사로 이동했다.
    백양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인 30일 해질 무렵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예전의 친구였던 김경천을 찾았다.
    그는 공초(심문 조사)에서 서울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올라가는 길이라고 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의 지도자들을 밀고하는 자에게는 엄청난 상금과
    고을 수령을 제수한다고 현상 공고를 했다. 당시에 고을 수령을 제수 받는다는 것은 돈과
    비교 할 수 없는 대단한 매력이 아닐수 없었을 것이다.


    김경천은 전봉준을 맞이해 잘 대접해 안심시켜 두고 전주감영 포교(지금의 현역장교)로
    이웃에 살고 있는 한신현이라는 이에게 밀고를 했다.
    한신현은 김영철, 정창욱 등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전봉준을 포위했지만 전봉준은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 다리를 얻어맞고 붙잡히고 말았다.
    1894년 12월 2일(양 12월 28일)이었다.


    생포된 전봉준은 순창을 거쳐 담양의 일본군에 인계되어 나주, 전주를 경유 12월 18일에
    서울에 압송되었는데 동학군들의 난동을 두려워한 나머지 무력이 탁월한 일본영사관
    감방에 수감되었다.

    전봉준은 다음해 2월 다섯번에 걸쳐 우리 관리및 일본 영사의 심문을 받고 1895년 3월
    30일 손화중, 최경선 등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나이 41세였다.
     

    당시의 신문기록을 통해서 전봉준의 사상을 엿볼수 있을듯 해서 그의 공초(심문)기록
    중에서 조금 뽑아 보았다. 먼저 그가 처음 거사를 하게되었던 원인에 대해서 알수 있는
    부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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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問 : 汝是全羅道東學魁首云 果然耶
    너는 전라도 동학의 괴수라 하는데 과연 그런가?

     

    供 : 初以倡義起包 無東學魁首之稱
    처음은 창의로 기포하였고 동학괴수라 일컬은 것은 없었다.

     

    問 : 汝於何地 招集人衆乎
    너는 어디 곳에서 인중을 불러모았느냐?

     

    供 : 於全州·論山地招集矣
    전주, 논산 땅에서 의병을 모았다.

     

    問 : 昨年三月間 於古阜等地 都聚民衆云 有何事緣而然乎
    작년 3개월간 고부 등지에서 민중을 도취하였다 하는데 어떤 사연이 있어
    그렇게 하였는가?

     

    供 : 其時古阜 額外苛斂幾萬兩 故民心寃恨 而有此擧
    그 때 고부군수는 액외의 가렴이 기만량인 고로 민심의 원한으로 이 거사가 있었다.

     

    問 : 雖曰貪官汚吏 名色必有然後事 群言之
    비록 탐관오리라 하여도 반드시 명색이 있었을 것이나 상세하게 말하라.

     

    供 : 今不可盡言其細目 而略告其槪 一, 築洑民洑下 以勒政傳令民間 上畓則 一斗落收二斗稅
    下畓則一斗落收一斗稅 都合租七百餘石 陳荒地許其百姓耕食 自官家給文券 不爲徵稅云及其
    秋收時 勒收事 一, 勒奪富民錢葉二萬餘兩 一, 其父曾經泰仁 故爲其父建造碑閣云 勒斂錢
    千餘兩 一, 大同米民間徵收以精白米十六斗式準價收斂 上納則貿 米 利條沒食事 此外許多
    條件 不能盡爲記得
    지금 그 세목을 다 말하지 못하겠으나 그 대개를 간단히 고하리라. 일(一)은 민보아래
    축보하고 늑정으로 민간에 고시하여 상답인즉 일 두락에 이수세를 거두고 하답인즉
    일두락에 일두세를 거두니 벼가 도합 700여 석이요 진황지를 백성들에게 그 경식을
    허하고 거두니 관가로부터 문권을 주어 징세아니한다 하더니 그 추수시에는 늑징한
    일이요 일(一)은 부민에게 돈을 2만냥을 늑탈한 일이요 일(一)은 그의 부가 일찍이
    태인현감을 지낸고로 그 부의 비각을 건립한다고 돈을 늑렴한 것이 천여량이요.
    일(一)은 대동미를 민간에서는 정백미로 16두씩을 준가로 수렴하고 상납시에는
    추미로 바꾸어 이조를 몰식한 일이요. 이외 허다한 조건은 이루다 기득할 수가 없다.

     

    問 : 今所告中之二萬餘兩勒奪錢 行以何名目乎
    지금 고한 가운데 2만냥의 늑탈한 돈은 어떠한 명목으로 행하였는가?

     

    供 : 以不孝·不睦·淫行及雜技等事 構成罪目而行矣
    불효 불목 음행 및 잡기 등 명목으로 죄목을 구성하여 행하였다.

     

    問 : 此等事行於一處乎 且行於各處乎
    이 같은 일은 한곳에서만 행했나? 또는 각처에서 행하였나.

     

    供 : 此等事非止一處 爲數十處
    이 같은 일은 한곳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수십처가 된다.

     

    問 : 至爲數十處 其中或有知名者耶
    수십처에 이른다니 그 가운데 혹 이름을 아는 자가 있는가?

     

    供 : 今不可記得姓名
    지금은 이름을 기득할 수 없다.

     

    問 : 此外古阜 行何等事耶
    이 외에 고부군수가 어떠한 일을 행하였는가?

     

    供 : 今所陳事件 皆民間貪虐事 而築洑時勒斫他山數百年邱木 築洑役之民丁不給一錢勒役矣
    지금 진술한 바 사건이 모두 민간탐학의 일이나 축보시에 타산(他山)에서 수백년된 거목을
    늑작(勒斫: 늑탈해 베는것)하고 축보하는 역사(役事)에 민정을 일전도 주지 않고 늑역하였다.

     

    問 : 古阜 姓名誰
    고부군수 이름은 누구냐?

     

    供 : 趙秉甲
    조병갑이다.

     

    問 : 此等貪虐事 但止於古阜  耶 抑或無吏屬輩作奸耶
    이러한 탐학의 일은 다만 고부군수에게만 그쳤느냐 혹 이속배들의 작간은 없었는지?

     

    供 : 古阜 獨行矣
    고부군수 단독으로 행하였다.

     

    問 : 汝居生泰仁地 何故起?古阜乎
    너는 태인 땅에서 거생 했는데 어찌하여 고부에서 기요했느냐?

     

    供 : 居生泰仁 移寓古阜爲數年矣
    태인에서 살다가 고부로 이사한지 수년이 되었다.

     

    問 : 然則古阜有汝宇乎
    그런즉 고부에는 너의 집이 있느냐?

     

    供 : 入於燒灰中矣
    불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고부에 있는 집은 불타버리고 없다고 진술했다. 안핵사
    이용태가 태웠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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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동학과 관련하여 그의 사상을 짐작해 볼수 있는 기록이다.
    사실 그는 고부군수에게 그다지 탐학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가 농사를 지었던 것은 아니고 글줄이라도 배워야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는 염원으로
    자식에게 글공부를 시키기를 원했는데 전봉준은 당시 훈장으로 글공부를 시키고 보리
    몇말..쌀 몇되씩 받아서 연명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고부봉기시에 방을 만든다거나 관에 소청을 하거나 하려면 글자를 아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자연히 우두머리로 추대되었다고 보는게 맞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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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問 :汝於古阜 被害不多 緣何意見而行此擧사
    너는 고부군수에게서 피해가 많지 않았는데 어떠한 의견으로 연유하여 이 거사를 행했는가?

     

    供 :世事日非 故慨然欲一番濟世意見
    세상살이가 날로 그릇되어 가는 고로 개연히 한번 세상을 건져보고자 하는 의견이었다.

     

    問 :汝之同謀孫化中 崔慶善等 皆酷好東學者사
    너와 동모한 손화중, 최경선 등은 모두 동학을 대단히 좋아했는가?

     

    供 :然矣
    그렇다.

     

    問 :所謂東學 何主意 何道學乎
    소위 동학이라는 것은 어떤 주의이며 어떤 도학인가?

     

    供 :守心 以忠孝爲本 欲輔國安民也
    마음을 지켜 충효로 본을 삼고 보국안민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問 :如亦酷好東學者사
    너도 동학을 대단히 좋아하는 자인가?

     

    供 :東學是守心敬天之道 故酷好也
    동학은 이에 수심경천의 도이기 때문에 매우 좋아한다.

     

    問 :東學始自何時
    동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供 :東學之始 始於三十年前
    동학의 시초는 30년 전에 비롯되었다.

     

    問 :始於何人乎
    어떤 사람이 시작했는가?

     

    供 :始於慶州崔濟愚矣
    경주에 사는 최제우가 시작했다.

     

    問 :至今亦全羅道內 尊%東學者多乎
    지금 역시 전라도 내에 동학을 존중하는 자가 많은가?

     

    供 :經亂之後 死亡相幾 至今太減
    난을 겪은 후 죽는 자가 계속 있어 지금은 크게 감해졌다.

     

    問 :汝起包時所率 皆是東學사
    네가 기포할 때 거느린 바는 모두가 동학인가?

     

    供 :所謂接主 皆是東學 其餘率下 稱以忠義之士居多
    소위 접주는 다 동학이나 그 나머지 솔하는 충의의 사로써 일컬은 자가 많았다.

     

    問 :接主司何名色
    접주사란 어떤 명색인가?

     

    供 :領率之稱
    영솔의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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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나는 그의 고택을 떠나며 그의 유시 한편을 떠올렸다. 질곡의 세월동안
    사람들의 아픔과 기쁨,고통을 함께 보아왔던 정읍 들녘을 지나며 자연은 변화가 없고
    다만 변하는 것은 인심(人心)만임을 알겠다.

     

    전봉준을 생포한 포교 한신현(韓信賢)은 금천(金川, 황해도) 군수에 제수되고 상금은

    한신현 1천냥, 김영철 3백냥, 정창욱 2백냥, 동인(洞人 마을사람) 9인에 2백냥, 그리고

    2백냥을 피노리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유시(遺詩)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時來天地皆同力)
    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運去英雄不自謀)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愛民正義我無失)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누가 알리(愛國丹心誰有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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