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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주 동학교당
    동학농민전쟁 2008. 8. 19. 10:02

    상주 동학교당

     

     
    경상도의 문화중심지라 할 수 있는 경주에서 발원한 동학교는 들불처럼 번져 전국으로 퍼졌다. 그러나 전라도 지방에서 일어난 동학혁명(동학전쟁)으로 인하여 경상도에서 동학의 끄나풀을 잡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경주의 최제우 유적, 상주의 동학교당 이외에는 흔적을 밟기 어렵다. 그런면에서 상주의 동학교당은 역사적 가치가 상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에서 물밀듯 밀고 들어온 서양 종교에 맡붙어 스스로 전통에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하여 민족의 정기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일어난 동학은 교주 崔濟愚, 2대 崔時亨을 거쳐 동학농민전쟁의 실패로 교세가 꺾이는 시련을 거치며 1900대에 3대 孫秉熙에 이르러 남북접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로 인한 도통전수에 불만을 품은 원로들이 추종세력을 이끌고 독립된 교당을 설립하기 시작했는데 30여개의 교파가 생기게 되었다. 그중 金周熙는 동학농민전쟁 이후 속리산에 은거하며 수도하면서 동학사상을 體天思想으로 체계화시키고 동학의 분파인 경천교와 결별을 선언하고 1910년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에 들어와 포교를 시작했다.


    金周熙는 현실적인 방법으로 동학운동에 접근했다고 볼 수 있다. 직접투쟁을 통해 혁명을 이루려고 한 남접 전봉준과도 어느정도 차이가 있었고 소극적인 북접의 최시형과도 차이가 있었다. 김주희는 1915년 은척(銀尺)에 근거를 마련하고 포교와 교세부흥을 꾀한 결과 상주, 문경, 예천, 안동을 중심으로 충북과 강원도까지 영향을 끼쳤다. 작은 교단이었지만 대대적인 간행사업을 통해 동학사상의 저변을 넓혔다. 그러나 1922년 조선총독부의 공인을 얻으면서 너무 현실화되는 경향도 보였고 김주희는 조선독립을 확언하다가 잠깐 투옥되기도 한 것으로 보면 식민통치하에서 내것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은척銀尺이라는 마을 이름은 은 신라시대부터 경주에는 金尺을 상주에는 銀尺을 묻었다는 전설이 있는곳이다. 상주는 경주에서 보면 당시 문물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 였다. 상주에서 보은으로 이어지는 개울을 따라 평지가 길처럼 이어져 물산의 이동이 원활했다. 낙동강을 통해 배로 이동할 수 있는 마지막 종착지 또한 상주였기에 이런 교통의 요지를 신라는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통일신라가 망하면서 이곳을 근거로 일어선 군벌 아자개는 이곳을 근거로 독립적인 통치를 하기도 했다. 아자개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아버지다. 상주 동학교당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인 넓은 분지의 평지마을에 서있어 안온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산지가 많은 경북 내륙에서 이만한 분지를 만나기가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이다. 평야가 많아 논 농사가 주력인 전라도, 충청도와는 달리 밭농사가 주력인 상주인데다 양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이라 동학농민전쟁의 영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겠다. 산으로 막혀 세상의 소식이 늦게 전해지는 탓도 어느정도 있을 것이이라.

     

    상주 동학교당이 있음을 알려주는 관광안내판이 보인다. 역시 상주의 가장 중요한 특산품은 곶감이다. 특히 자전거박물관을 스쳐 남장사로 가는 길에는 대부분의 농가가 곶감을 말린다.

     

     

    교행이 힘 들 정도로 좁은 시골길이다. 동학교당에도 작은 주차장이 있지만 관광안내판이 있는 곳에 십여대 주차 공간이 있다. 이곳에 차를 대고 걸으면 5분정도 걸린다. 5분 정도는 천천히 걸으며 들바람을 쏘이는 것도 여행길의 잔 재미다. 나는 어디를 가던지 가능하면 목적지에서 멀리 차를 댄다. 스쳐가버렸을 많은 것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경북 내륙지방에는 담배를 많이 재배한다. 담배는 임진왜란때 왜놈을 따라 이땅에 처음 들어왔다고 한다. 그후 전국에서 재배가 이루어 졌고 병자호란 무렵에는 어린아이들도 피웠다는 기록이 있다. 담배의 해악을 몰랐을 때이고 회충같은 기생충으로 배않이를 많이 했을 때이므로 다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담배는 병자호란을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 나중에는 조선이 청나라에 보내는 중요한 공물중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사진은 담배를 말리는 창고이다.

     

     

     

     

     

     

     

    산으로 둘러 쌓인 분지에 안온하게 자리잡은 동학교당이다. 상주시에서 관광지로 발전시키기 위해 대규모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년쯤에는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을듯 하다. 관광객의 유치를 위해 공사를 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본래의 모습을 훼손하지 말았으면 한다.

     

     

     

     

    말벌이 집을 지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말벌이 사는지 모르겠지만 사람과 곤충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이런 모습이야 말로 우리들의 본모습이 아닐까? 시멘트로 만들어진 오늘날의 우리 삶들이 딱딱한 이유다.

    "和氣自生" 이라는 문구가 가슴에 출렁인다.

     

     

    마침 출장길에서 귀로에 들린 곳인데 하필 월요일이다. 박물관이 쉬는 날인 것이다. 아쉬운 마음이 혼자 서성이다 돌아서는 그림자를 따라 오다.

     

     

     

    엄마는 작두꿈을 꾸지

     

    만주 벌판 시린 바람이 부는 날

    마적의 죽창에 잿간의 재들이 휘날릴 때

    맏딸과 사위 잿간에 묻고

    두 아들 오뉴월 논두렁에 호미 두짝 남기고

    징병차에 실려 신작로 끝으로 가고

    그 길로 체부 가방에 종이 한 장으로 실려 돌아와

    씨강냉이 같은 외삼촌은 작두를 들었다

     

    "오빠야! 머하노"

    "보지말거래이. 눈감아라. 눈감아라"

     

    엄마는 칠순넘은 지금도 작두꿈을 꾼단다

    외삼촌 검지끝에 화르륵 불꽃처럼 피어나

    갈라진 작두받침 나이테 사이로 숨어 버리던

    피붙이의 살붙이

     

    그런 꿈을 꾼 날은 시퍼렇게 살아있는 어둠에 대고

    침 세번 뱉어 내고는 말의 부적을 붙이곤 하는 것이다

    "아이고 숭해라~ 아이고 숭해"

     

     

     

    흙벽에 등을 기댄 민들레…

    100년 전 쯤 민초가 기대야할 나라는 없어지고 난 후 그들이 기댈곳은 어디 였을까?

     

     

     

    돌아와 주차장에 오르려다 만난 문고리 하나

    어쩌면 100년의 시공을 이 문고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세월의 지문이 떠깨로 붙은 녹 아래 몸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책장에 곱게 넣으두고 흐뭇한 마음으로 보는데 막내의 한마디가 덧대어 진다.

     

    "아빠! 고물상 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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