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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의 숨은 공로자, 변이중과 화차여행기 2006. 7. 3. 14:31
행주대첩의 숨은 공로자, 변이중과 화차임진왜란의 개전초기에는 너무 일방적이였기에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중기에 접어들면서 우리 민족의 저력이 서서히 발현되기
시작을 했는데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과 공식적인 전투에서의 많은 승전
들은 마침내 스스로 이길수 있다는 자각을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중에서도 전쟁의 향방에 영향을 미친 3대 승리는 행주대첩, 한산대첩, 노량대첩을
꼽는다. 한산과 노량대첩은 해전의 명수 ‘이순신’장군이 해전에서 이룩한 승리이고,
행주대첩은 '권율'장군이 거둔 육전(陸戰)의 승리였다.그러나 우리는 권율장군에게만 너무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지다보니 실제 그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에 대하여는 너무 무심해온게 사실이다.
사실 임진왜란의 대부분의 우리측 승리를 분석해보면 화약의 힘이 결정적이였다.
오랜동안 내전을 겪으며 싸움질을 다진 왜적들은 조총을 앞세운 기싸움뒤에 일본도를
이용한 백병전이 주요한 장기였는데 우리는 화약을 이용한 원거리 포격등을 이용한
승리가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화약을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발명한 최무선에 대해서는
무심에 가까울 정도로 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처럼 행주대첩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망암(望庵) 변이중(邊以中:1546~1611)과
그가 제작한 화차(火車)라고 하는 신무기의 역할이 컸음에도 크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해전의 승리가 거북선으로 인해서 였다고 한다면 육전에는 ‘화차’가 있었던 것이다.
화차라고 한다면 티비나 역사서를 통해서 많이들 보았을 것이지만 다시 한번 보자면
위의 사진처럼 생겼다. 화차는 수레 위에 화살을 수십 발 장착하여 이동할 수 있으며
한 번에 수십 발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무기로 쉽게 말하면 요즈음의 기관총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화차는 문종 때인 1451년에 이미 ‘문종화차’라고 하여 개발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평화가 계속되어 사용이 흐지부지되다가 임진왜란을 맞으면서 변이중에 의하여 다시
개량 발전되었던 것이다.
변이중은 본관 황주이며 자는 언시(彦時)였다. 호는 망암(望菴)이라 했으며 전라도 장성
(長城) 출생이다. 그는 율곡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 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7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던 도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도 지역에서
군사를 모집하는 소모어사(召募御使)로 임명되었다.
변이중이 발전시킨 화차는 화살 3~4개가 들어가는 통이 있고, 이 통이 가로로 5개, 세로로
10개가 장착되어 있었다. 따라서 한 번에 200발의 화살이 동시에 발사되는 무기였다.
도화선을 연결해서 화약에 불을 붙이면 엄청난 폭음을 내면서 자동 발사되는 구조였다.
행주산성에서 아군 3400명이라는 숫적 불리에도 왜군 3만 명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이 화차의 화력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지금 가보아도 알 수 있듯이
행주산성은 산성이기는 하지만 주변이 야트막한 구릉으로 되어 있어서 난공불락의 요새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다소 평탄한 지형에서 화차는 더욱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주산성 전투에는 변이중이 만들어 보급한 40여대의 화차가 동원되었다.
변이중은 장성에서 백양사 가다 보면 중간에 있는 조양리(朝陽里)라는 곳에서 300대의
화차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제작비용을 댄 사람은 망암의 사촌동생이자 당시
만석꾼이었던 변윤중(邊允中:1550~ 1597)이었다. 전 재산을 여기에 썼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만석꾼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부자들이 돈이란 어떻게 쓰는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조양리는 왜군의 철저한 보복을 받게 되는데 변윤중 가족이 왜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자결한 곳은 현재 호남고속도로 장성IC 맞은편의 ‘휴암(休岩) 바위’로 알려져 있다.변이중 선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그러나 고종때 대원군이 중심이 되어 개혁의 일환으로 서원철폐령에 의해서
철폐되었다가 1976년에야 다시 복원되었다.
장성군 장성읍 장안리 19번지에 있다.
요즈음은 약도보다 이런 주소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차마다 GPS란놈이 있기때문에
굳이 지도 보지 않아도 이 주소만 입력하면 편하게 길을 찾아 준다.
봉암서원의 현판이 보인다.
지금은 저 창문너머 대청마루에서 도포를 입고 유학자 관을 쓴 분이 어느 대학교 학생들
스무명쯤 앉히고 대학에 대한 강의가 한창이였다.
댓돌에 서서 선생을 모신 사당과 뒷산과의 스카이 라인을 감상하는 척하며 5분이나
글 도둑질을 하고 왔다.
선생을 배향한 사당이다.
대학에 대한 강의를 귓전으로 줏어 담으며 찍어본 사당이다.
앞서 있는 영웅과 같은 사람들도 참으로 고결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그 영웅을
만들어 내는 음지의 사람들도 중요함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제는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그들에게도 우리의 눈을 돌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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