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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완성을 위한 해인사 쌍동이불여행기 2006. 6. 24.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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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완성을 위한 해인사 쌍동이불
2005-09-14 오전 11:25:46영국이였던가...사랑을 위해 왕위를 버렸던 왕의 이야기...
사람들은 남녀간의 숭고한 사랑으로 이 이야기를 잘 회자하고는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그 보다 더 애절하고 숭고한 사랑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역사에서 여왕이 몇? 하고 물으면 대개가
둘이라고 한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실제로 신라에서는 3명의 여왕이 나왔는데 선덕여왕,진덕여왕 그리고
진성여왕이 그 들이다.
그 중에서도 진성여왕은 신라말기에 약 11년동안 재위에 있었고 그후38년후
신라가 망할정도로 혼란한 말기에 치세를 했으므로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역사에서의 기록도 매우 부정적이다.
역사는 진성여왕을 음탕한 여인의 표본으로 매도한다.
사대주의 역사학자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정사라는 이름으로 내세우는 학자에
의해 신라말기의 모든 사회부조리가 진성여왕과 그 삼촌이였던 각간(조선시대
영의정 정도..) 위홍의 불륜에 의한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그것은 유교사상에 젖어 있는 유학자들에 의해 기록된 내용에 근거하여
역사를 재단해왔기 때문이다.
드라마 "왕건"에서 보았겠지만 고려를 세운 왕건도 셋째부인의 아들과 넷째부인의
딸이 혼례를 이루는 등 족내혼이 왕실의 기본이였는데 이것은 신라로 부터 유래된
풍습인 것이다.
지금의 일본왕실처럼 핏줄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만든 산물인 것이다.
신라 왕실의 근친혼은 결과적으로 권력과 특권의 독점에 있었다.
잠깐 이해를 돕기위해 34대 효성왕(재위 737∼742)의 혼인관계를 한번 살펴보자.
효성왕이 즉위했을 때 당나라의 책봉을 받은 왕비는 박씨였다.(삼국통일 전부터
신라는 당나라에 조공을 하고 왕의 책봉을 받아왔다.)
무열대왕(김춘추) 이후 대부분의 왕비는 족내혼을 통한 김씨들이였는데 이때 박씨
왕비가 등장하자 많은 정치적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효성왕은 이런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재위 3년 이찬 김순원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음으로써 김씨 왕비가 다시 등장한다.
그런데 효성왕의 장인 김순원은 효성왕의 아버지 성덕왕의 장인이기도 했다.
효성왕은 결국 이모와 혼인함으로써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려 한 것이다.
이런예는 신라의 근친혼을 단순히 윤리적 관점(이것도 결국은 유교적 시각이다.)에서
바라봐서는 안되는 사안임을 시사하는데 근친혼은 왕권과 권력의 유지수단인 것이다.사대주의 역사가인 김부식과 민족주의 역사가인 일연의 기록을 보자.
먼저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진성여왕에 대하여 기록한 대목이다.
‘(진성여왕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만헌(曼憲)이니 정강왕의 동복누이이다.
왕의 배필은 위홍 대각간, 추봉(追封)한 혜성대왕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위홍 대각간을 잘 기억하자. 그래야 앞으로 풀어갈 글에 대해
핵심을 체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또 선덕의 남편은 음갈문왕(飮葛文王)이라고 적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선덕여왕에게도 남편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당시의 신라에서는
성골만이 왕위를 게승할 수 있었는데 남성 성골이 없기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여왕들은 정식으로 국혼을 치르지는 않았어도 사회로 부터 공인받은 남편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기록한 내용이다.
‘진성왕이 전부터 각간 위홍과 좋아지내더니 이 때에 이르러서는 항상 궁중에
들어와 일을 보게 하였다.
그에게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수집 편찬케 하였는데, 그 책을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
위홍이 죽으니 시호를 추증하여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삼대목”(三代目)이라는 책이 요즈음에 발견된다면 직지보다
몇십배는 더 가치있는 자료가 될것이다.
국문학을 전공하신 분들은 아시겠지요...
잃어버린 수 많은 신라의 향가를 다시 살려낼 수 있을테니.....
사실 '진성은 불륜’ 비난의 잣대는 조선을 거치며 고착된 유교사상에 의해 상당히
왜곡되고 심화되어 갔다.
김부식은 잘 알려져 있듯 유교적 사관에 따라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여성을 천시하는 김부식의 유교적 가치관이 여지없이 반영되어 그의 책에서는
신라의 기강이 문란해진 이유가 진성여왕의 황음에 있다는 듯이 묘사한 것이다.
그의 사관을 보면 상당히 이중적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여왕들 중에서 유독 선덕여왕을 훌령한 왕으로 기록한다. 선덕여왕이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틈바구니 속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많은 공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 다음의 ‘논하여 가로되’(論曰)라는 김부식 자신의 평은 바로 앞에 적은
사실과는 정반대의 부정적인 논조의 기술로 일관한다.
“논하여 가로되~~~중국에서도 역대에 여왕은 없었고..운운" 하면서 심지어서는
"하늘을 두고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운 것이요, 사람을 두고
말한다면 사내는 높고 계집은 낮은 것이다.
어찌 늙은 할미가 규방에서 국가의 정사를 재단하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했으니 진실로 난세(亂世)의 일이며 이러고서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서경(書經)’에 ‘암탉이 새벽에 운다’하였고,
‘역경(易經)’에 ‘암퇘지가 뛰어다닌다’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단지 여자이기때문에 안된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속좁은 위인이였다.
그는 여성이 임금이 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선덕여왕의 뒤를 또 다시 여성인 진덕이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망하기는커녕 불과 10여년 후 삼국을 통일하는 기염을 토했다.
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재위한 기간은 서기 632년부터 654년까지
였는데 이 시기야 말로 한반도의 가장 변방이면서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도약해
삼국통일의 토대를 이룬 대단히 안정된 치세를 이룬 기간이었다.
한강의 기적을 아직도 우리가 써먹을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내었지만
이 기간 동안에 이루어 낸 서라벌의 기적이야 말로 실로 대단하다 할 것이다.
김부식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사실은 외면한 채 ‘남자는 양’
‘여자는 음’이라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야기의 물꼬를 다시 본래대로 돌려 놓자.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법보전의 부처님과 대적광전의 부처님이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외형의 모습이나 형식으로 문화재의 연대를 추정하는 일을 하는 미술가들은 고려
후기의 불상형태라고 평을 해왔다.
그래서 보물의 축에 끼지지도 못한 채 그저 지방유형문화제 정도로만 알아왔다.
세월의 흐름은 부처님 몸에 입혀진 얇은 금판도 삭게 만드는 탓으로 새로운 금을
입히는 개금을 하기위해 남은 금을 긁어내고 새로 옻칠을 하는 과정에서 복장속에
흐릿한 묵서(먹으로 쓴 글씨..)가 발견되었다.■오른쪽 줄(총 17자) : 誓願大角干主(?)燈身賜彌右座妃主燈身●(?)
■왼쪽 줄(총 14자) : 中和三年癸卯此像夏節柒(?)金着(혹은 著)成.
이 중 왼쪽 줄을 통해 이 불상이 "중화 3년 계묘년이 되는 해 여름철"에 완성했음이
밝혀진 것인데 당 희종(僖宗) 연호인 중화 3년은 신라로서는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재위 9년째에 해당한다.
오른쪽 17자의 뜻을 대충 해석하면 이런 뜻이다.
"원하옵니다..대각간님의 등신(자신의 몸을 나타낸 모습)을 가운데 모시고 오른쪽에
비(妃)의 몸을 모시니 세세생생 함께 하게 하소서.."
여기서 妃라함은 왕비를 나타내나 대각간 위홍이 사후에 대왕으로 추존이 되었으므로
왕위를 버리고 해인사 원당암에 있던 진성은 스스로 妃라고 칭한듯 하다.
부처님 뱃속에서 차마 부끄러워 숨어있던 이 기록으로 신라 말의 한 정승과 그의 연인이
저승에 가 성불(成佛)로 사랑을 이루고자 한 소원을 담은 쌍둥이 불상임이 밝혀졌고
'삼국유사',‘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이 세기의 사랑을 이룬 한쌍의 사람들이 다름아닌
사랑을 위해 왕위를 버린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과 정승 위홍(魏弘)이 였던 것이다.
문화재에도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있는것..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것..지역적으로 가치가
있는것 등 등으로 다양하게 있지만 나는 이 쌍동이불을 우리 사회에서 점점 메말라가는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정신적문화재라고 생각한다.지난 10일부터 해인사에서는 이 신라 말의 쌍둥이 나무 불상(佛像)의 상견법회를 열고
있는데 한번쯤은 발걸음을 해볼일이다.
또 하나 특기할 일은 쌍동이 불상을 지금은 개금전의 상태...즉 옻칠이 된 그대로 전시해
그야말로 개금을 해서 빛나는 금빛이 아닌 상태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절에서 부처님의 몸을 개금할때 옻칠을 한 상태의 모습은 스님들도 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몇 백년에 한번하는 개금이므로 우리세대에서는 마지막으로 이 불상의
알몸을 볼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더우기 이 불상의 국보지정이 확실시 되는 만큼 유리를 통하지 않고 가장 가까이서 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도 되는 셈이다.
**** 마지막 서비스 잘생긴 아저씨 샷 한장...해인사 입구의 VIEW P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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