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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論介生家地를 찾다..여행기 2006. 6. 12. 11:16
그 여인...論介生家地를 찾다..조선시대를 살아있던 사람들의 최고가치는 무었이였을까?
사극이나 역사에서 항상 전면에 섰던 사람들은 항상 사대부라 불리웠던
양반들이였다.
대다수..아니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았을 민초들은 항상 역사의 그늘에서
착취당하는 입장이였으니 그들에게 최고의 가치라는 것이 과연 있었을까하는
생각에 이르고보면 내생의 극락을 보장하는 불교에의 귀의가 당연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불교는 사대부와는 멀어져서 민초들과
같이 천하디 천하게 대접받았는지 모르는 일이다.
또 여자들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문장이 출중하여도 이른바 양지로
나와 햇볕을 볼수 없었다. 햇볕은 항상 남자들의 몫일 뿐이였다.
조선의 여인네들도 어쩌면 제도와 관습에 코뚜레가 꿰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인 위기에서 당연히 빛난것은 민초들과
천대받던 승려들과 뒤에서 신음하던 여인네들이였다.
당연히 지켜주어야할 남자들이 무너져버린 상황에서도 절개를 지키며
죽어간 여인네도 있고 단 하나의 적군이라도 죽이겠다는 여인네도 있었다.
행주산성의 수많은 여인네가 그랬고 진주성싸움에서 돌을 줏어나른 여인들도
또한 그랬다. 역사에 비록 남겨지지 않았지만 그네들이 진정 역사의 승자이다.
그들 중에서도 우리는 주논개(朱論介)라는 여인을 잊을수 없다.
주논개님이 순절한 진주에서는 그 여인네가 안고 떨어져 죽은 왜놈이 대장
이니 쫄병이니 말이 많다고 한다.
달을 보라고 손을 들었더니 달은 보지않고 손가락만 유심히 보는 격이다.
그 당시에 진주부의 기생이 많으면 얼마나 많았겠는가?
승전의 축하자리에서 기생을 품고 술을 먹을 정도의 권위였다면 지금 논란이
되고있는 쫄병은 아니였을 것이다.
못되어도 중견 간부쯤은 되지 않았겠는가..'충절(忠節)의 여신(女神)' 주논개(朱論介)는 조선 선조 8년(1575)에 영취산 북쪽 계곡
지금의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에서 주달문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5Km 되는 곳이다.백두대간이 덕유산의 끝맺음 육십령을 지나서 계속 전라도 장수와 경상도 함양의 지경을
따라 남하하다가 백운산(1278.6m 우리나라 백운산 중에서 가장 높음) 조금 못미쳐서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을 분기시키는 산이 영취산(1075.6m)다.
영취산에서 금남호남정맥을 따라 서쪽 500m 쯤에 해발 930m의 높은 무령고개가 있고,
여기에는 큰돌을 오목하게 파서 예쁘게 단장한 샘이 있는데 이 샘물은 북쪽으로 흘러
논개 생가(生家)가 있는 주촌마을 오동제에 갇혔다가 장계천이 되어 천천면 용광리에서
금강에 합류하여 진안의 용담댐으로 흘러든다.
생가 들어가는 입구의 의암루...
어렸을적에 논개가 뛰어놀았다고 하는 곳에 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서 단아정이라
이름을 붙였다.논개가 13세되던 해에 부친 주달문이 죽자 주색잡기에 빠져 있던 숙부 주달무가 당시
장수의 돈많고 땅 많은 토호 김풍헌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병신아들이 있었는데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아 탕진해 버리고 심지어 모녀가 살던 집도 잡혀 논개 모녀는 오갈데
없게 되었다고 한다.그러나 논개 모녀가 민며느리로 들어가는 것을 완강히 반대하였으나 집안에서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별다른 방법이 없자 논개의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하게 된다. 이에 숙부였던 주달무는 적반하장으로 김풍헌과 작당하여
장수현감에게 소장(訴狀)을 올려 논개 모녀를 고소하였다.
장수현감 최경희가 소장을 검토하고 모녀를 불러 심리해 보니 소장의 주장이 억지임이
들어 나자 주달무를 정신이 들도록 곤장을 쳐 보냈다.
그러나 이미 살집도 날아간 뒤라 오갈 데가 없는 모녀가 딱해서 모녀를 현감 집에 머물게
하면서 마침 병들어 누워있던 부인의 병 수발을 들게 하였다.
논개 모녀의 정성어린 병 수발에도 불구하고 현감 부인이 세상을 떴다.
모녀의 정성에 감동한 현감은 죽은 처가 권한 데로 논개를 후처로 맞아드려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현감 최경회는 50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실부인은 아니였고 부실이라 이름지어진 첩의 신세였고 이미 최경회의 나이는
많고 논개의 나이는 어려서 합궁이 이루어 졌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뭏던 논개의 몸에서 후사가 없어서 다만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 후 5년이 지나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차 진주성 대첩이 있은 후,
선조26년(1593)에 최경희가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되어 진주성으로 갈 때 논개도
함께 가서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다.2차 진주성싸움은 병사 최경희를 비롯하여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양산주,
충청병사 황진(黃進), 사천현감 장윤(張潤),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의병장 고종후
(高從厚),강희열(姜熙悅), 이해(李海), 김준민(金俊民) 등이 성내 수천에 불과한 군사와
6-7만의 백성으로 5만의 왜적에게 결사항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6월 20일 성이
함락되자 황진, 장윤, 김준민 등은 전사하고, 최경희는 김천일, 고종후, 양산주 등과
함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으며, 성내의 군사와 백성 6만 여명이 학살당하였다.2차 진주성전투가 끝난 직후 왜군들이 촉석루(矗石樓)에서 승전축하연을 벌릴 때
논개도 기적에 올려 기생으로 변장하여 연회장에 끼어 들었다.
한창 흥이 올랐을 때 왜장 게다니무라로쿠스께(毛谷村六助)를 물가의 바위로
유인하여 껴안고 열흘 동안 내린 장마로 한껏 불어난 남강 강물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논개가 왜장을 유인하여 껴안고 강물에 뛰어든 바위를 사람들은 '의암(義岩)'이라 부른다.
진주성이 함락된 후 장수지역 의병들이 남강 하류를 수색하여 며칠 후 창원 지수목에서
최경희와 그 때까지도 왜장을 껴안은 채로 죽은 논개의 시신을 찾아냈다.
이들 부부의 시신을 논개의 고향 장수로 운구하는 일로 사람을 보내서 주씨 문중과 장례
문제를 상의하였으나 왜적의 보복을 두려워 한 종중은 이를 거절하였다.
일설에는 논개가 기생이기 때문에 거절하였다고도 한다.
논개 부부의 운구행렬이 육십령고개를 바라보고 오를 때 이 소식을 듣고 하는 수 없이
그 곳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돌아갔는데 이 사실은 운구행렬에 참여했던 의병의
후손들에게 전설로 전해 오다가 순절한지 382년이 지난 1975년에 논개 부부의 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생가입구...주논개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이다.
파란많은 삶이 시작 되었던 곳이다.
생가의 댓돌위에 올라서 내려다보는 경치의 스카이 라인이 너무 멋있다.
우물가...
옛날에 아침마다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떠놓으시던 엄마생각이 나게하는
정한수 한사발...
백자사발의 모양가지 너무 흡사해서 잠시 어릴적을 추억하는 시간도...
백두대간의 산들이 멀리 보이는데 저 산을 꼬불 꼬불 올라서 넘는 재가 있는데
육십령이라고 한다.
지금은 진주-대전간 고속도로때문에 인적이 뜸하여 졌지만 반디불이도 고속도로가
아직 공사중일때 무주를 거쳐와서 육십령을 몇번이나 넘었었다.
그 육십령 고개가 빤히 보이는 생가...이곳이 주논개님의 생가터임을 잊지않으려고 세운 사적불망비...
주논개님은 장수의 3절로 유명하다.여러가지 문헌들과 최경회장군의 유품등이 전시되어 있는 기념관이다.
기념관과 내부의 전시품들...동전을 던져서 항아리의 중간에 정확히 골인을 해야 음악과 춤추는 분수의 물줄기를
볼수 있는 음악분수....
백원자리 하나로 던졌는데 첫 던짐에서 음악을 들을수 있었는데 그것을 보던 관광객
둘이 다가와서 2000원이나 투입하고 못듣고 굉장히 멋적어 하면서 갔다는...
「의암부인 신안주씨」가 해주최씨의 족보에 오른 시기는 1975년부터였다.
그 당시 해주최씨 문중에서는 「의암부인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를
거쳐 다수 의견에 따라 족보에 올렸다고 한다.
논개가 최경회의 측실이라는 사실은 1905년 송병선이 지은 『동감강목』(東鑑綱目)에서도
이미 「慶會妾 論介 誘倭將 游南江中巖石上 抱倭將墮水而死」(경회의 첩 논개가 왜장을
유인하여…)라는 기록이 있는 만큼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논개와 최경회 장군이 묻힌 그 곳은 지금의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인데 성역화
사업이 어느정도 마무리 되었다고 하니 다음 발걸음을 예약해 본다.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5Km 되는 곳이다.
참으로 이상한 인연이지 않는가?
백두대간의 산을 사이에두고서 서쪽 10여리쯤에서 태어나 동쪽 10여리 쯤에 묻혔으니
삶과 죽음의 그 여정이 참으로 파란하였던 여인네다.돌아나오는 길...
들어갈대 보아둔 곳이 있어서 잠시 들렀다.
망향비가 보이는 이곳은 원래 아담한 동네가 있었으나 저수지가 크게 생기면서
수몰이 되었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실향민들이 비를 세웠다.마침 가져간 디카가 셀프 기능은 있는데 다리를 고정할 나사부가 없는 얇은
기종이라서 생각다 못해 차문을 열고 유리창을 끝까지 내리고 그 면을 이용했다.
카메라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순간.....저 옥빛의 물밑에는 아직 다 허물어지지 않았를 동네 돌담도 아직 있으리라..
동네 아이들이 자치기를 하고 비료포대로 만든 딱지로 딱지치기를 하고 고무줄을
뛰던 그 골목에는 지금 각시붕어..메기..피래미들이 차지하고 있으리라..
지나가다가 이 정자에서 어깨를 늘어뜨린 노인네를 보거던 아마도 이런 옛생각을
하면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줄 아시기를...
세월은 간다고 하지만 실상은 반복을 하고 꽃은 피었다가 지고 내년에 다시 피고
달은 또 매일 동산위로 떠올라 수면에다가 제 그림자를 찍고 가는 반복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데 다만 분주하게 세상이 변한다고 부산을 떠는건 인간들뿐....'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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