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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마귀 考
    이런저런 이야기 2006. 6. 11. 12:49


    까마귀 考

     

     

     

     

    최근 독일 함부르크에서 수백 마리의 두꺼비가 몸이 부풀어오른 뒤 터져버리는
    기괴한 현상이 나타나 원인을 놓고 추측이 분분한 가운데 독일의 한 동물 학자가
    굶주린 까마귀들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나섰다.


    함부르크와 덴마크의 호숫가에서 최근 이렇게 죽은 두꺼비는 1천 마리가 넘는데
    호수의 수질 검사 결과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죽은 두꺼비들이
    바이러스나 세균에 집단 감염되지도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무추만은 그러나 두꺼비들의 몸에 난 상처를 자세히 관찰한 결과 모두 간이 없고
    몸에 구멍이 난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까마귀에게 간을 파 먹힌 두꺼비들이 방어를 위해 몸을 부풀리지만 간이 없고
    몸에 구멍이 나 있기 때문에 혈관과 폐가 터지고 장기들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면서 무시무시하게 들리지만 동물 세계에서는 드물지 않은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상이 연합뉴스를 통해서 전해받은 외국의 이야기이다.


    까마귀와 까치는 따지면 사촌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까치는 특정한 곳에 한마리나
    두마리 정도가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는 정주형인 반면 까마귀는 우루루 몰려서
    이곳 저곳 떠도는 이동형이다.


    또 하나의 다른 점은 인간의 인식영역에 비친 모습일텐데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으로
    우리눈에 비치는 게 사실이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 까치가 울면 "어허~ 오늘은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하고 이야기를
    하고 까마귀가 울면 "어~~ 어디 초상이 났는가?..'하게 마련이다.


    깍깍깍~~~
    아주 짧은 단발성으로 경쾌하게 우는게 까치의 특성인데 이 짧고 경쾌함이 주는
    느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까아악~ 까아악~
    까마귀의 울음은 사실 길게 늘어진다. 이 길게 늘어짐이 까마귀가 가장 많이 보이는
    겨울에는 사람이 느끼기에는 슬프고 애절히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항상 사람들이 사는 곳 주변에 사는 까치와는 달리 까마귀는 사람과는 조금의
    거리를 두고 살다보니 동네의 공동묘지 부근에 주로 많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북망산천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새로 까마귀를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모두들 꺼려하는 까마귀도 한때는 우리민족의 사랑을 그야말로 듬뿍받고
    살았던 새였다. 그 위치를 시대에 따라 까치에게 물려준 것일 뿐이다.
    지금은 역사학계의 누구나가 인정하는 부분이 한반도에 살고 있던 남방계민족을
    북방의 기마민족이 정복하여 흡수 통합되어 오늘의 우리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남방계는 농사를 경영하여 삶을 영위하는 전형적인 정주형 삶인 반면 북방계는
    이곳 저곳 장소를 옮겨가며 목축을 하거나 정복으로 삶을 영위하는 이동형이다.


    우리민족의 고대는 정복자인 북방계가 상층부를 형성하고 피정복자인 남방계가
    하위계층을 형성하는 사회적 시스템을 형성했는데 북방계 민족은 특히 까마귀를
    좋아했다. 어쩌면 조장(鳥葬)의 풍습이 있었던 유목습관에서 중요한 역활을
    까마귀가 담당을 했기에 누구나 죽음을 맞으면 저승으로 인도하는 새로써 까마귀를
    좋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구려의 고분들에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는 대부분 삼족오라 불리우는 발이 3개달린
    까마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의 단군신화에서 보듯이 우리민족의 최초통일은 태양족과 곰족의 연합이였다.
    그러나 주도적인 역활은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이 맡았으므로 상징적인 부분은
    대부분 태양족의 것이 주류가 되었다.
    사람들은 태양속에 있는 흑점의 모습을 보고 까마귀가 산다고 생각을 했고 태양의
    흑점을 찍은 사진을 자세히 보면 마치 발이 3개 달린 까마귀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 일본의 축구국가대표팀의 문장이 삼족오인데 이는 일본민족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기마민족의 후손이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는 강력한 증거인 것이다.


    도데체 언제부터 까마귀와 까치의 역활과 배역이 바뀌게 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삼국의 후반이나 고려초일 것으로 생각이 된다. 삼국유사에 보면 경주
    서출지로 소지왕이 행차를 했는데 앞길을 까마귀가 막고 까~악..까~악...울어대었다.
    그때 쥐가 까마귀를 따라 가보라고 해서 까마귀를 뒤쫓아 피촌이라는 곳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돼지 두마리가 싸우는 모습에 잠깐 한눈을 팔다가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는데
    이때 홀연히 한 노인이 "이 편지를 열면 한사람이 죽을 것이요..열지 않으면 두사람이
    죽을것..." 이라고 하며 편지 한통을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당연히 한사람이 죽는게 더 낫지 않겠는가?"하고 신하에게 물었는데 옆에 있던
    신하는 "한사람을 말함은 왕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두사람이라 하면 당연히.."라고 했다.
    그래서 왕은 편지를 열었더니 금갑(琴匣)을 쏘라는 글이 나왔다.


    행차에서 돌아온 왕은 방안에 세워진 거문고갑에 활을 쏘았더니 궁녀와 내통한 암살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사람이 죽었다. 궁녀와 암살자...
    이렇게 살아난 왕은 전국에 영을 내렸다.정월 상순에는 오기일(烏忌日)이라고 해서
    찰밥으로 밥을 지어 대문에 두는 풍습이 생겼다.


    이때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전해내리는 이야기들에는 늘 까마귀가 등장을 했다.
    그러나 통일을 이룬 통일 신라기는 이제 민족적 성향이 정주형으로 고착이 되는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집주변을 떠나지 않고 텃새로 사는 까치가 사람들의 인식범위를
    점차로 점유하게 되었다.


    칠월 칠석에 대한 이야기도 아마 통일신라말이나 고려초에 형성된 이야기 일텐데 이때에
    처음으로 우리 민담에 까치가 까마귀의 동반자로 등장을 한다.
    견우와 직녀의 만남의 다리역활을 까마귀와 까치가 협동으로 맡아 주는데 신기한 것은
    이 이후의 민담이나 기록들에서 더 이상 까마귀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이때쯤의 시간적 공간동안 우리민족의 삶이 크게 변화를 했다는 것을 뜻한다.
    말보다는 소를 중요시하게 되고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가문이 형성되고 OO김씨..XX박씨..
    등의 성씨가 생기게 되는 시기..바로 이동형과 정주형 삶의 혼제속에서 정주형으로 완전히
    굳어졌다는 이야기 일 것이다.


    실상 우리들이 보는 이미지와는 달리 사람에게 주는 해악의 경우는 대부분 까치의 몫이다.
    사람들 주변에 살다가 보니 과수원의 과실이나 밭의 콩이나 닥치지 않고 해악을 가하는
    녀석이 바로 까치란 놈이다.
    어떤때는 겂도 없이 앞들에 조랑거리며 다니는 노랑 병아리를 채가서 먹기도 한다.
    까마귀는 늘 사람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과수원 근처에는
    얼씬도 안하는 놈들이다. 그저 무리를 지어서 추수가 끝난 논이나 휩쓸던지 아니면
    공동묘지의 상석에 버려진 과일이나 탐낼 뿐이다.


    그런데 이 까치들이 과일을 쪼아 먹는 뽄새가 얼마나 얄미운지 모른다.
    배던 사과던 하나에 한번씩 부리로 쪼아서 깊은 흠집을 내는 그런 녀석들이다.
    배가 고프면 사과 하나를 알뜰히 먹어도 되련만 한 마리가 과수원에 나타나면 최소
    10개의 과일이 그 짝을 당하니 지켜보는 농민이야 오죽 속이 타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한때는 과수원에다가 카바이트 대포도 장치해서는 펑~펑~ 소리를 내보기도
    하고 매모양을 한 움직이는 연을 달아서 쫓아보기도 했지만 머리 좋은 까치라는 놈은
    금방 학습을 해서는 오히려 당당하게 헤집고 다니곤 한다.


    그 피해가 하도 막심하여 한창 과수가 열릴때면 나주나 예산등의 과일 주산지에서는
    까치 한마리에 3,000원에서 5,000원의 현상금이 걸리기도 한다.
    이렇게 피해와 해악을 끼치는 까치란 놈에게 빼았겨 버린 우리 민족들의 정(情)은
    대단한 것이어서 지금도 까마귀보다는 까치에게 더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는게 사실이다.


    이제 시대는 유목민 사고를 가져야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요즈음 다시금 삼족오 문양이 뜨고 있다고 한다. 주변에 까마귀 캐릭터도 많아지고...
    상고해보면 우리 민족이 까마귀와 더불었을때 가장 강성했었다. 삼족오가 우리의
    대표적 문양이였던 고조선..고구려가 그랬고 까마귀가 민중과 같이 한 신라는
    마침내 통일을 이루어 내기도 했다.


    다시 한번 까마귀의 시대가 오는 것인가..은근한 기대가 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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