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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정철 선생의 정송강사(鄭松江祠)..여행기 2006. 6. 6. 17:44
송강정철 선생의 鄭松江祠를 다녀오다..
우리가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많이 배운바 있는 사미인곡입니다.
송강 정철 선생의 유명한 글이지요.
당파로 인해서 귀양가있으면서 임금을 그리워하면서 그것을 연인에 빗대어
지은 시입니다.
언뜻 읽으면 남여상열지사의 시 같아보이지만 글 하나 하나에서 왕에 대한
충성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런 글이지요.
새롭게 맞이하는 한달도 주머니에서 꺼내 놓으니 벌써 며칠이 지나버렸습니다.
어제 멀리 출장을 다녀온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또 꼭 출장을 가서 해결을
해야만 일이 발생을 했습니다.
어쩔수 없지요..몸이야 고단하지만 업무가 우선이지요.
금왕하고도 생극이라는 동네를 가려면 진천을 거쳐서 갑니다.
봄이 와서는 국도변을 어지럽게 장식하고 있는 풍경화속을 화가의 붓끝에
찍히는 까만 점처럼 그렇게 자연속을 움직여갑니다.
진천군 문백면 삼거리...
신호를 기다리는 차들이 제법 늘어서 있습니다.
그렇지..하고는 좌측으로 핸들을 꺽었습니다.
여기서 2키로정도에 정송강사(鄭松江祠)가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점심먹을 시간을 희생한 것이지요.
결국 덕분에 점심을 굶고 저녁겸 점심을 먹었지만 前人의 흔적을 밟는 다는것은
後人으로서는 기쁜일이므로 배는 고프지 않습니다.
흠...3키로군요
차로 3키로면 금방입니다. 10리도 안되는 길이니 따지면 우리네 셈법으로
거리의 최소단위에도 미치지 못하는 거리입니다.
주차장에서 본 정송강사의 전경입니다.
신도비가 보이고 수령 350년짜리 느티나무도 보이며 옆으로 정려도 보이는 군요.
느티나무가 하도 커서 다 잡을수도 없었답니다.
송강 정철선생의 신도비입니다.
정식명칭은 鄭澈神道碑입니다.
조선 현종4년(1665)에 세웠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습니다.
적힌내용을 요약하면 송강 정철(1538~1593)의 신도비로써 선생은 기대승,김인후등에게
학문을 익혔으며 명종 17년(1562) 진사과와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이후에 여러
벼슬을 거쳤다고 합니다.
신도비의 글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고 오위도총부 부총관 김수중이 글씨를 썻다고 합니다.
나라에서 열녀나 충신에게 내려주는 최고의 상징인 정려문입니다.
조선의 상훈은 지금의 훈장과 진배없는 정려복호정책이였는데 이렇게 정려문을
내려주는 것이 최상급이였다고 합니다.
진달래와 그밑에 나무다리가 왠지 멋진 풍경이 될것 같아서 찍었는데 내공이 부족한데다가
칼도(카메라) 구린 구리칼이라서인지 제대로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다리건너 나물캐는 동내아낙들도 있는둥 마는둥 하네요.
단촛점 렌즈의 압박....
뒷면에 새겨진 선생의 시 가운데 일부분...
즉 사미인곡중에서 일부분을 추려서 새겨두었습니다.
인생은 유한한데 시름도 그지없다..무심한 세월은 물흐르듯 하는구나...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문청문(文淸門)이라는 현판이 보입니다.
문청문을 들어서며..
선생의 사당은 또 한참의 계단을 올라서야 만날수 있습니다..
계단을 오르다가 싱겁게 서있는 나무 두그루...
벌쭘하게 서서 꽃을 피우고 있는 목련과 산수유...
드디어 본 사당 앞 계단에 섰습니다.
이 계단을 오르면 선생을 만날수 있겠지요.
成人..공자님같은 聖人은 아니지만 우리는 成人이 되기에도 너무 힘이 들지요.
나이가 차고 육신이 세월을 갉아먹어도 일정한 사고의 폭이..실천의 폭이 그곳에
이러르야 비로서 이룩된 成人이라 할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분을 成人이라 한겁니다..
저는 아직 未成人입니다.
그냥 나이만 먹은 사람은 成年이라 할수는 있겠지요..
정송강사는 송강 정철선생(1536∼1593)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지방기념물
9호입니다.
선생의 묘소는 원래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 있던 것을 현종6년(1665)에
우암 송시열이 지금의 묘소로 자리를 정하고 그의 후손 정양이 이장하여 사우를
창건하였으나 규모가 작아 1979년에 전면 신축정화하였다고 합니다.
송강사(1976년 지방기념물 9호로 지정) 왼쪽에는 마른 억새풀이 우거진 오솔길을
3백여m 타고 오르다보면 송강의 묘소가 나온다고 하는데 가보지는 못하고 숙제를
하나 남기고 왔습니다.
이곳의 가을..만추의 풍경이 좋은 곳이라 다음에 들릴때는 묘소에 들려보렵니다.
아쉬움이 하나쯤 있어야 다음에 들리기도 좋겠지요..정송강사의 옆모습...
송강 정철선생의 위패와 영정...
하릴없는 後人이 목례로 고상함에 흠집을 내고 가다..선생의 일기에 이렇게 적히지는
않을런지....
정철선생은 조선시대의 정치가로 좌의정을 지냈으며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자는 계함, 호는 송강, 본관은 영일로 기대승, 김인후 등의 문인으로 명종 16년 진사와
별시문과에 장원, 지평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내고 율곡과 함께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고 하니 벼슬로 치면 부러울것 없는 분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입신양명하였다고 하겠지요.
여기서 나오는 "사가독서"라고 하는 것은 조선시대 유망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와 연구에 전념하게 한 제도로 요즈음으로 치면 휴식년제와 같다고 보면됩니다.
다음(Daum)의 백과사전 검색을 통해서 잠깐 알고 가면 다음과 같습니다.
1420년(세종 2) 3월에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 중에서 재행(才行)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유급휴가를 주고 연구에 전념하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자택에서 독서를 하게 했으나 집에서는 독서에 전념하기 어렵다고 하여
1442년부터 진관사(津寬寺)라는 절에서 독서하게 했다.
때문에 이를 상사독서(上寺讀書)라고도 불렀다. 사육신 사건으로 집현전이 폐지되어
한때 중단되었으나 성종이 부활시켜 홍문관의 젊은 학사 중에서 선발하여 독서하게
했다. 동시에 용산에 있던 폐사를 수리하여 독서당으로 삼았다.
1517년(중종 12)에는 두모포(豆毛捕)에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설치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16세기까지는 사가독서제가 활발히 운영되었다. 1528년에는 독서당
규칙을 만들어 계절마다 읽은 책의 목록을 보고하고, 월별·주별로 제술시험을 보아
불합격하면 퇴거시키게 했다. 왕들은 때로 술과 악(樂), 물품을 내려 격려했다.
그러나 인조 이후에는 침체하여 명맥만 유지하다가 정조 때 규장각을 설립하면서
폐지되었다.
사가독서 기간은 1~3개월이었으나 개월을 한정하지 않고 '장가'(長暇)를 주기도 했다.
선발인원이나 시기는 특별히 정해놓지 않았다. 최고 12명을 2번으로 나누어 독서당에
상근시킨 적도 있었으나 보통 3~6명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총인원은 1426~1773년
(영조 49)까지 320명이다.
사가독서에 뽑힌 자를 사가문신이라고 불렀는데 상당한 영예로 간주되었다.
역대의 사가문신에는 남수문(南秀文)·신숙주(申叔舟)·김안국(金安國)·이이(李珥)·
이민구(李敏求) 등 학문이 뛰어난 문신이 많다.< 다음검색 -백과사전->
임진왜란때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扈從)하였고, 삼남 체찰사가 되어 임진왜란 이후에
민심을 일으켜세우는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송강이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전라,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는 동안 천부적인 문재를
발휘하여 관동별곡, 훈민가를 지었으며 그 뒤 낙향하여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많은
가사와 단가를 남겼는데 사미인곡은 대입수능에서도 가끔 출제되는 고전이지요.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송강사에서 내려본 풍경...
사당은 목조의 맞배지붕이고 유물전시관은 시멘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는데
유물전시관에는 송강선생의 은배, 옥배, 용연이라는 임금이 내린 벼루 그리고
연행일기 65일분과 친필편지 등이 보관, 전시되어 있습니다.
혹시 들리게 되면 반드시 보고 나와야 될 곳이기도 합니다.
*** 찾아가는 길
중부고속도로 진천IC에서 나와 진천읍 시내를 경유하여 청주 방면으로
운행(13km)한 뒤, 문백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3km 정도 달리면 도착
*** 주변에서 볼만한 곳정송강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김유신 장군 탄생지와 3층 목탑으로 유명한
보탑사, 그리고 고려시대의 석교로 유명한 농다리가 있다.'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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