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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특집1-구산선문을 찾아서(6) - 창원 봉림사지
    기획여행기 2006. 5. 8. 23:59


    기획특집1-구산선문을 찾아서(6) - 창원 봉림사지
    2003-12-06 오후 10:10:14

     


    반디불의 똥꼬 블로그 기획특집1

     


    구산선문을 찾아서(6)

     


    봉림산문 창원 봉림사

     

     


    반디불의 똥고 기획특집 첫번째..구산선문을 찾아서도 이제 5번째 절을 찾게 되었다.
    이번에는 마침 창원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출장으로 들러볼 기회를 얻었다.


    창원의 여관에서 출장 두번째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 하였으나 어제 남해의 기억이
    너무 많은 자리를 차지 하였었던지 상쾌하지는 않았다.


    아침도 먹지 않고 지도에 표시조차 되어있지 않은 봉림사지를 찾아 나선다.
    11시에 회의가 있으므로 그때까지는 아침까지 해결해야 하므로 그다지 많은 시간이
    아니다. 괜스레 나그네의 발걸음만 급해진다.


    이정표도 없는 목표점을 몇번의 헤메임끝에 찾아냈다.


    이번 여행은 구산선문중 봉림산문(鳳林山門) 봉림사(鳳林寺)이다.
    현재의 경남 창원시 봉림동 봉림산 봉림사지(鳳林寺址)로 터만 남아있고 재건을 위한
    공사가 어렵사리 진행되고 있었다.

     

     


    봉림산 선문 개조는 원감국사 현욱 대선사(서기 787년 ~ 서기 868년)인데 신라 제38대
    원성왕 3년 5월 5일에 출생하였는데 속성은 강릉김씨 휘는 현욱대사이고 시호는 원감
    (圓鑑)국사다.


    23세에 스님이 되어 신라 제40대 애장왕 9년에 비구게를 받고 신라 제41대 헌덕왕
    16년에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조계산 六조 대감혜능대사의 문하 마조대사의 높은
    법손인 장경회휘선사에게서 정법안장 심인을 받고 본국 신라의 김의종 왕자를 따라
    제43대 희강왕 2년 9월12일에 귀국하여 지금의 남원 실상사에 안거하다가 신라 제46대
    문성왕 2년 여주혜목산 고달사 위에 초암을 짓고 수선(修禪)하였다.


    신라 효공왕 시대에 원감현욱 대선사의 수제자 진경심희 대선사는 가야불교의 옛 가람터에
    봉림사를 이룩하고 선풍종지를 크게 선양함으로부터 구산선문인 봉림산선문의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봉림산선문 개산조 진경심희 대선사는(서기 853 ~ 서기 923년) 가야의 왕족으로
    속성은 김씨이고 신라 제46대 문성왕 16년에 출생했다. 9세에 여주 혜목산에서 출가하여
    원감현욱대선사의 문하에서 수련하고 14세시에 대선사의 정법안장선법을 이어받았다.


    효공왕의 추앙을 받아 가야 불교의 초전 볍륜성지인 가락국에 최초의 가야불교 초전
    법륜성지인 봉림산 그 자리에다가 진례성 봉림산 봉림사로 개창하고 봉림산선문을
    형성하였다. 원감현욱대선사를 개조로 추대하여 선문종풍을 크게 선양하였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봉림산문의 창시자는 진경심희 대선사라고 하는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어렵사리 찾아간 봉림사지에는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만이 잠시머물다가는
    황량한 옛터만이 남아있었다.

     

    봉림사의 옛터에 있었던 각종 보물급 문화재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경복궁으로
    옮기고 일부는 창원의 여기 저기로 흩어져서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길을 못찾아서 헤메임끝에 찾아낸 진입로..눈으로 대중해보니 충분히
    차로 갈 수 있을 듯 해서 주차해두었던 차를 다시 가져와 올라 갔다.

     

     


    겨우 차하나가 지날 수 있는 저 길을 위태 위태하며 올라왔다.
    급경사에다 길은 좁고 옆으로 나무들이 긁어대서 불안한 마음으로 조마조마
    겨우겨우 올라온길..

     

     


    대숲을 뚫어서 진입로를 만들어 놓았다.
    과수원의 나무들 사이로 걸러서 통과하면 만나는 길이다.


     

     


    절터가 보인다. 대숲에서 부는 바람에서 세월의 냄새가 묻어난다.

     

     


    인공의 힘이 가해졌던 돌..지금은 아무렇게나 버려져있는 저돌도
    실상 한때는 당당한 가람의 일원이였으리라...


     

     

    동그마니 혼자 남아있는 주춧돌..비로소 건물이 있었음을 알수있다.
    나는 몇백의 세월이 흘러 저렇게 주춧돌이었던 돌처럼 사람으로 살다간 흔적을
    보여줄 수 있을까?


    천년전..구백년전...팔백년전...몇십년전...
    이렇게 이곳과 인연 맺었던 수많은 그 사람들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또 훗일 누가와서 흔적을 남겨놓지 않은 누구를 그리워할지 모르는 일이다.


    그것이 삶이다.

     

     


    댓돌로 쓰였을까? 아니면 기둥을 받치는데 쓰였을까?
    저 돌만이 알일인데 괜스리 부질없는 생각을 풀어놓고 간다.

     

     


    구산선문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팻말과

     

     


    표석들...


    평생 영원할 것 같이 살다가 겨우 묘비하나를 남기고 가는 우리의 삶을
    표현해주는 자연의 행위예술...

     

     

     

    천년전 이땅에 따뜻하게 비쳤을 태양을 온기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을 것 같은
    기와조각....
    앉아서 하염없이 대화의 염(念)을 보내보지만 역시 말이없다.
    아마도 나의 내공이 많이 부족한 탓이리라.

     

     

     


    봉림사진경대사 보월능공탑 비복제기
    (鳳林寺眞鏡大師 寶月凌空搭 碑複製記)

     

    원래의 탑비(塔碑)는 신라(新羅) 구산선문중(九山禪門中)의 봉림사(鳳林寺)를
    개산(開山)한 진경대사(眞鏡大師)의 탑(塔)과 비(碑)로 탑(塔)은 경명왕(景明王)
    7년(923)에 비(碑)는 경애왕(景哀王) 1년(924)에 창원시(昌原市) 봉림동(鳳林洞)
    176번지 봉림사(鳳林寺)에 안치(安置)되었던 것을 1919년 3월 일인(日人)들이
    서울 경복궁(景福宮) 경내로 이건(移建)하였다.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 봉림사지에 있던 3층석탑.(鳳林寺址 三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이탑은 현재 상북초등학교 정문 오른쪽 정원에
    중창되어있다.
    창원군지,전통등에 의하면 원래 이탑은 봉림사지내에 있었던 것이나, 일제시대에
    부산으로 팔려갔던 것을 되찾아와 1960년 창원시 교육청에서 현재의 위치에 중창해
    놓은것이라 한다.

     

     

     

    지난 특집보러가기

     


    구산선문 이란?

     

     

    구산선문을 찾아(1)-곡성 태안사

     


    구산선문을 찾아(2)-보령 성주사

     

     

    구산선문을 찾아(3)-장흥 보림사

     

     

    구산선문을 찾아서(4)-남원 실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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