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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특집1-구산선문을 찾아서(5) - 남원 실상사
    기획여행기 2006. 5. 8. 23:32

     

    기획특집1-구산선문을 찾아서(5) - 남원 실상사
    2003-11-05 오후 2:00:39


    반디불의 똥꼬 블로그 기획특집1

     

    구산선문을 찾아서(5)

     

    실상산문 구례 실상사

     

     

     

    여기 저기 발에 채이는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뒹구는 작은 돌
    그런 작은 돌에서도
    나는
    지리산의 전음(傳音)을 들었네.

     


    천년의 세월을
    승천하지 못한 그대로
    보광전 댓돌에
    하늘을 받친 석탑에
    세월을 밝히는 석등에
    연못에 비치는 나무에
    늘러 붙어 있는 돌이끼들이 깨친
    세월의 득음(得音)을
    나는
    실상사에서 들었네.

     


    지리산을 무겁게 등에 지고 섰는
    돌장승이 전해준
    가을의 소식한자락을
    나는
    서러운 세월의 돌담에 떨어지는
    따가운 햇살에 전해들었네.

     


    다만
    코스모스 몇송이 뜨락을 지키는
    약사전의 약사여래불...
    그 미소가 전해주는
    뜻 하나를 끝내 알지 못했네.

     


    ----(2003년 11월 4일 실상사에서...)

     

     

     

    광양에서 일보고 스치는 바람에서도 가을의 냄새가 나는 섬진강을 거슬러 지리산의
    한자락 성삼재를 넘어왔다. 달궁계곡과 피아골을 지나서 만나는 동네가 산내면인데
    대개의 사찰들이 산중에 있는데 반해서 실상사는 평지에 위치한 절이다. 제법 넓은
    냇가옆의 완전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그래도 손목의 고도게를 보면 400에 가까우니 충청도쯤에 비교하면 높은 산에 있는
    셈이다.

     

     

     

     

    실상사로 들어가는 초입은 석장승이 반겨준다. 몇집안돼는 가게와 매표소를 지나면
    왼쪽에 석장승이 하나 외롭게 서있다.
    짝을 이루던 장승은 오래전 홍수에 떠내려 가서 찾을수가 없다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느낌인지 건너편 장승보다는 어두워보이는 표정이다.

    장승은 원래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의 수문신, 수호신, 사찰이나 지역간의
    경계표, 이정표등의 구실을 하며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장승의 명칭은 장승,벅수등 다양하나 최세진의 훈몽자회에 장승을
    `댱승` 이라 한 것으로 미루어 16세기 이후 일반적으로 쓰여진 것 같다는것이 통설이다.


    실상사 입구에 세워진 석장승은 도갑사, 보림사, 통도사, 봉은사 등 우리나라 사찰
    입구에 세워진 장승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장승은 보통 남녀 한 쌍으로 세우게 되는데 실상사 장승은 외모나 몸에 새겨진 문자로
    어느 것이 여성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다.
    실상사의 장승은 해탈교를 건너기전 1기와 건너서 2기 이렇게 3기가 남아있다.


    실상사의 역사는 우리한국불교의 최대특징이라 할수 있는 선불교의 시작이였다.
    구산선문중에서도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선종사찰이 바로 실상사다.


    한국불교는 신라이래 선교(禪敎)가 양립하면서 전개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선은 불교
    수행자들이 구도의 길로 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수행의 방법으로 자리잡고 있다.
    선의 가르침이 이 땅에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곳이 바로 지리산 실상사이다.


    실상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이절의 사적기
    (寺蹟記)에 따르면 창건은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 3) 홍척(洪陟)이 구산선문
    (九山禪門)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데서 비롯된다.


    선종(禪宗)이 처음 전래된 것은 신라 제36대 혜공왕(惠恭王) 때인데, 발전을 못하다가
    도의(道義:道儀)와 함께 입당(入唐), 수학하고 귀국한 증각대사(證覺大師) 홍척이
    흥덕왕의 초청으로 법을 강론함으로써 구산선문 중 으뜸 사찰로 발전하였다.

    도의는 장흥(長興) 가지산(迦智山)에 들어가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곳에
    실상사를 세워 많은 제자를 배출, 전국에 포교하였는데 이들을 실상사파(實相寺派)라
    불렀다. 그의 제자로 수철(秀澈) ·편운(片雲) 두 대사가 나와 더욱 이 종산(宗山)을 크게
    번창시켰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폐허가 되었다가 조선 제19대 숙종대에 이르러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1882년(고종 19) 사찰 건물이 소실되는 수난을 겪고, 다시 여러 승려들의 힘으로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하니 그 수난의 역사가 우리민족의 수난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여 심란하다.


    실상사의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3층석탑, 보물 제33호인 수철화상능가
    보월탑(秀澈和尙楞伽寶月塔), 보물 제34호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보물 제36호인
    부도(浮屠), 보물 제37호인 3층석탑 2기(基), 보물 제38호인 증각대사응료탑(凝寥塔),
    보물 제39호인 증각대사응료탑비, 보물 제40호인 백장암 석등, 보물 제41호인 철제여래
    좌상(鐵製如來坐像), 보물 제420호인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靑銅銀入絲香爐), 보물
    제421호인 약수암목조탱화(藥水庵木彫幀畵)가 있다.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불국사 석가탑 상륜부 복원의 모본이 되었던 통일신라
    시대의 삼층석탑이 동서로 서 있다. 천왕문을 바로지나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그 앞에서
    보면 보광전과 석탑이 물에 비쳐서 안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일반 사대부의 집에도 사랑과 안채등의 구분이 있듯이 사찰에도 그 사찰의 중심이 되는
    전각과 부속 전각들이 있게 마련이다. 대개의 사찰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본존불로 모신
    대웅전을 중심 전각으로 하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비로자나부처님을 본존불로 모신
    대적광전이 중심 전각이 되기도 하고, 아미타부처님을 본존불로 모신 무량수전(아미타전)
    이  중심 전각이 되기도 한다.
    중심이 되는 전각에는 상단에 부처님을 모시고, 중단에 보살-신중단을 모시는데 상단과
    중단을 갖춘 법당이 하나일 경우 1법당 구조, 둘일 경우 2법당 구조라 한다.


    그런데 이곳 실상사는 예외적으로 3개의 법당(보광전, 약사전, 극락전)이 상단과 중단을
    갖추고 있어서 3법당 구조를 하고 있다.
    이런 구조는 그 동안 반디불이 수없이 많은 탐방을 했어도 다른 곳에서는 볼수 없는
    특이한 형식의 가람배치가 아닐수 없다.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
    (베트남)에서 모셔 왔다고도 한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서 대단히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
    하고 있어서 여느 절에서처럼 화려한 감이 없다.
    단청의 목적이 단지 장엄만이 아니라 목재건물의 장기보존목적도 크니 한시빨리 단청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였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
    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실상사 3층석탑 2기 탑은 원래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사원에서 가장 중요한 예배 대상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사리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차츰 경전, 작은 불상, 작은 탑을 만들어 진신사리 대신 봉안하게 되었다.
    그래서 탑들을 보수할때 여러가지 국보급 문화재가 나오는 이유이다. 탑은 크게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상사 삼층석탑은 보광전 앞에 세워져 있으며, 2층 기단위에 3층의 방형석탑으로
    신라석탑의 일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동서탑은 규모, 양식, 보존상태 등이 거의 같으며
    특히 2기 모두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먼저 기단 주위에 넓은 장대석을 둘렀고,
    기단은 2층이며, 하대석과 중석을 하나의 돌로 하층 기단을 만들었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한 개씩의 돌로 되어 있으며 각층 탑신에는 우주형이
    있다. 옥개석의 처마밑은 수평이며 옥개받침은 각층 4단씩으로 감소되었다. 상륜부에는
    3층 옥개석 위에 2단의 부연이 있는 노반, 두 줄의 횡대와 꽃모양이 장식된 편주 형 복발,
    8잎 연꽃이 있는 앙화, 꽃모양을 조각한 원에 가까운 간석을 사이에 끼면서 귀꽃이 장식된
    보개가 있다.


    서탑에는 없으나 동탑에는 다시 수연이 얹히고 정상에는 동서탑 모두 높은 찰주에 용차와
    보주가 있다. 이상과 같은 양식으로 보아 두 탑은 동시에 건립되었음이 분명하며 상륜부가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어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홍척국사의 실상사 창건이 신라 흥덕왕 3년(828)이라고 전하므로 석탑의 건립도 이 때
    쯤으 로 추정된다.

     

     

     

    실상사 석등


    화엄경에는 `부처님께 공양하는 공양구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것이 등`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유사에 망덕사의 선율 스님이 명부에서 살아 돌아올 때
    지옥에 빠진 중생의 부탁으로 부처님 앞에 등불을 밝혀 극락왕생케 했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등불을 켜는 불교 명절인 연등회는 고려 때 국가의 가장 큰 명절이었고, 사월
    초파일에도 등불 밝히는 행사가 중심이었다. 다시 말하면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히듯이
    중생들의 어둡고 괴로운 마음을 밝힌다는 뜻으로 그러한 행사가 열린 것이며, 그래서
    등을 광명등이라고도 한다.


    석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발달되었고, 또한 대형의 걸작품들이 많아서 세계적인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실상사에는 경내와 백장암에 각각 1기의 석등이 있다.
    실상사 석등은 보물 제35호로 8각의 지대석 위에 올려진 하대는 이중으로 되어 있다.

     

     

     

     

    약사전은 몸과 마음의 질병을 낫게 함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서원을 세운 약사여래를
    봉안하는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1883년 유생들인 양재묵과 그
    일당들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특히 중앙의 문창살은 단청이
    선명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약사전 안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철불이며, 규모가 매우 크다.
    약사전 부처님의 조성에 대해서는 이 땅의 기운이 고르지 않아 백두대간의 기운이 지리산
    천왕봉에서 일본 후지산으로 건너가므로 큰 철불을 세워 땅 기운을 고르게 해야 한다는
    도선국사의 비기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약사전 부처님은 수인을 볼 때 아미타불이며, 실상사 창건 당시 주불(主佛)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견도 분분하다. 그 크기나 그당시의 신앙의 유행등으로 보아서 타당성이 있다.


    또 하나, 약사전 부처님은 때때로 땀을 흘린다고 하는데, 공기중의 습기가 철불 표면에 맺힌
    현상이겠으나, 이러한 결로현상이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 나라 안팎의 큰 일이 있을 때와
    묘하게 겹쳐 일어나는 바람에 이를 신비롭게 여기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명부전을보자. 바로 앞에 무성한 나무때문에 아무리 앵글을 잡아보아도
    현판이 나오는 명부전의 모습을 찍을수는 없었다. 명부전은 갖가지 지옥의 장면을 그린
    시왕의 그림이나 조각을 모신 전각으로 주존은 지장보살이다.

     

     

     

     

     

    다음으로 고즈넉한 길을 다라 조금만 가면 볼수 있는 극락전이다. 극락전의 옛 이름은
    부도전(浮屠殿)으로 계오대사가 1684년(숙종 10)에 건물을 짓고 부도전 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부도전이라 한 것은 근처에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기 때문이다.


    1751년 (영조 27)에 포문비구 한심이 옛 연하당과 금당의 기와를 사용하여 요사채를
    수리하고 부도전 (扶道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788년(정조 12)에 금파 관오대사가
    대시주 이휘와 별좌 홍찬, 재민과 더불어 중수하였다.


    1832년(순조 32)에 의암대사가 기봉, 처윤과 함께 중건하여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증각대사 응료탑과 응료탑비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을 불탑이라 하고, 스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부도라 한다.
    부도는 처음에는 불탑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으나 지금은 스님의 탑을 가리는 용어로
    많이 사용 되고 있어서 차츰 종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중이다.


    증각대사 응료탑은 극락전 왼편에 있으며 실상사를 개창한 홍척국사의 부도로 조성시기는
    9 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극락전의 정문 바로 앞에는 수련이 피는 연못을 내어다보는
    응료탑비가 있다. 이 탑비는 증각대사 응료탑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이다.


    비의 몸체는 일찍이 상실되고 지금은 거북 모양의 빗돌 받침과 용을 새긴 비 머리가
    남아 있다. 귀부는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거북이를 조각한 것으로 그 모습이 매우
    사실적이다. 오랜 풍화작용에 의하여 세부의 새김을 알아보기 어려우나 이수(비석머리
    부분)의 앞면에는 응료탑비라는 네 글자가 분명하게 세겨져 있어 홍척국사의 탑비임을
    알 수 있다.

     

     

     

     

     

    수철화상능가보월탑과 능가보월탑비

    이것은 실상사 제2조사인 수철화상의 탑으로 극락전을 바라보며 그 오른쪽에 있다.
    증각대사 응료탑보다 마멸이 심하여 그의 부도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지대석은
    사각형 이고 하대석은 팔각이며 하대석의 각 면에는 그름과 용 또는 사자상을 세기고
    있다. 중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을 조각하고 그 안에 사리함과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주악상)을 세겨 넣었다.


    대나무밭과 소나무밭의 사이에 있는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를 보자.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 및 탑을 만든 경위까지 기록되어 있다. 수철화상은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원래는 심원사 스님이어서 `심원사 국사수철화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지금은 마멸과 손상이
    심하다 비의 건립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인 효공왕대(897~912)로
    추정된다.

     

    그외에 실상사동종이 있는데 지금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서 보지 못했다.

     

     

     


    절에서 해우소하면 화장실을 뜻한다. 근세에 통도사에 계시던 선승이셨던 경봉스님께서
    처음 이말을 쓰셨다고 한다. 근심을 해소하는 곳..해우소..꽤나 근사한 말이 아닐수 없다.


    해우소는 근본적으로 똥과 오줌의 처리장이다. 우리인간이라는게 우리 몸속에 넣고
    다니는 그것을 더럽다고 한다. 자기의 몸속에 넣고 있는 자기 몸의 일부인데도....
    여기 실상사에서는 똥에도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간직한 실상사는 오늘날 새로운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다.
    즉 ‘올바른 승가상의 확립’과 ‘승풍진작’이라는 목표로 출범한 조계종 비구스님들의
    결사 모임인 <선우도량>의 근본도량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승가 전문 교육 기관인
    2년 과정의 <화엄학림>을 개설하여 한국불교의 미래를 이끌어갈 승가의 젊은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는 것이다.


    다가오는 11월 15일에는 이곳 실상사에서 생명평화 민족화해 평화통일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지리산평화결사가 열린다고 한다.
    혹여 지리산의 눈, 지리산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보자는 이 운동에 대하여 아시고자
    하는 분이 계시다면 http://www.lifepeace.org 로 접속해보기 바란다.

     

     

     

     

    실상사로 가는길 길은 참으로 무궁하고도 많다.
    다만 가고자하는 마음이 문제일뿐..


    자가용을 이용하려면 남원이나 함양 또는 지리산을 넘어오는 길도 있다.


    대중교통수단은 버스일 경우에는
    지리산에서 서울로 오가는 버스는 백무동 -(실상사)- 함양 - 동서울로 가며, 함양에서
    동서울 터미널까지는 3시간 ~ 3시간 30분이 소요된다. 하루 다섯번의 왕복편이 있는데
    서울에서 08시20분이 첫차이다.


    * 실상사 앞에서 버스는 원칙적으로 정차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리 예약한 경우 실상사
    앞에서 승차할 수 있으며, 하차할 경우 운전기사께 부탁하면 대부분 세워준다고 매표소
    아짐이 말해주었으므로 믿을만 하다.


    * 서울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버스중 19:00 버스는 함양까지만 운행하므로 실상사까지
    가려면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대중교통은 다음으로 알아보면 된다.
    **함양지리산고속 예약전화 (055)963-3745, 962-5715
    **남원역 (063)633-7788
    **남원 고속버스터미널 (063)632-2000
    **남원 시외버스터미널 (063)632-1001

     


    지난 특집보러가기

     


    구산선문 이란?

     

     

    구산선문을 찾아(1)-곡성 태안사

     


    구산선문을 찾아(2)-보령 성주사

     

     

    구산선문을 찾아(4)-장흥 보림사

     

     

     


    ******************************** 댓글 ********************************


     제다이  2003-11-05 오후 2:05:20   
    우와... 미치겠다... 정보, 자세한 사진, 약도, 구구절절한 설명... 강추! 강추! 
     
      반디불  2003-11-05 오후 6:58:32    
    제다이님~~감사.. 
     
      제다이  2003-11-05 오후 7:04:58   
    제가 더 감사하지요... ^^ 이상 반국모 회장 이었습니다. ^^ 
     
      용인용갈  2003-11-05 오후 7:05:47   
    반디불님 잘 보았습니다. 
     
      반디불  2003-11-05 오후 7:09:22    
    용갈님~ 반갑습니다... 
     
      둥글둥글  2003-11-06 오후 2:18:33   
    반디불님 덕분에 실상사 구경잘했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정겨운 절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정말 세세하게 설명해주셧네요..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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