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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특집1-구산선문을 찾아(3) -보령 성주사
    기획여행기 2006. 5. 8. 21:41


    기획특집1-구산선문을 찾아(3) -보령 성주사
    2003-10-10 오후 2:55:33


    반디불의 똥꼬 블로그 기획특집1

     

    구산선문을 찾아서..

     

     

    보령 성주산문 성주사

     

     

     

    보령이라는 동네이름에서 우선 나는 두가지를 연상한다. 하나는 벼루이다.
    그동안 남포벼루로 알려진 보령의 벼루는 전국적으로 아주 유명하다. 지금이야
    어디 벼루를 쓰는 사람이 있나 싶다. 유명한 서예가들도 플라스틱 통에 담긴
    먹물을 사다 쓴다고 하니 벼루는 사실 지금의 만년필과 같은 신세가 되어 버렸다.


    또 다른 하나는 머드인데 무창포의 진흙은 머드팩의 소재로서 그 성가를 날리고 있다.
    그리고 5년전 충청도로 이사오기 전까지 석탄하면 강원도를 떠올렸는데 여기와서
    돌아 다니다 보니 보령에 떡하니 버티고 섰는 석탄박물관을 보았을때 신기함이
    앞섰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보령부근은 석탄 또한 풍부했다는 것이다.

     

     

     

    이 보령의 성주읍 소재지에 오늘 가볼 성주사지가 있다.
    반디불의 동꼬 이벤트 두번째인 성주산문 聖住山門의 흔적을 더듬는다.
    성주사는 신라 말기 구산선문 중 하나로 이름 높았던 곳으로 아주 번성했던 사찰이다.


    2,000여 명이라는 당대 최대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제자로 대통(大通)·심광(深光)·
    자인(慈忍)·여엄(麗嚴)이 있고, 심광의 제자에 현휘(玄暉)가 있다. 뒤에 산 이름이 산문
    이름이 되어 숭엄산문(崇嚴山門)으로, 다시 숭암산(崇巖山)으로, 숭암산에서 성주산으로
    되었다. 왕위 쟁탈전에서 패한 왕자 김흔(金昕)의 시주를 받아 백제 오합사(烏合寺) 터에
    성주사를 세운 무염은 충북 영동군 영각산사의 심광, 도담선원의 자인, 경기도 양평군
    사나선원의 여엄, 충청북도 월악산월광사의 대통을 배출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주사는 백제 법왕에 의해 오합사(烏合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법왕이 왕자일 때 삼국 전쟁으로 희생된 이들 의 영혼을 위령하는 뜻으로 세웠다고 한다.
    성주사로 개명된 것은 통일 신라 말이다. 성인이 거하는 절이라는 뜻인데, 성인은 신라
    말기의 명승 무염국사를 일컫는다. 무염국사가 성주사의 주지로 있을 당시 성주사는 불전
    80칸, 수각 7칸, 고사 50여 칸 등 천여 칸에 이르는 큰 규모였다. 이때 성주사에서 정진하는
    수도승만 2,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백제 시대에서 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역사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사적 307호로 지정된 성주사지에는 현재 국보 8호 낭혜화상백월보광탑 비, 보물19호 오층
    석탑, 보물20호 중앙삼층 석탑, 보물 47호 서삼층 석탑 , 지방문화재인 동삼층 석탑과 석계
    단과 석등이 있다.


    그간 발굴 조사에 의해 금당지, 삼천불전지, 회랑지, 중문지 등의 건물터가 드러났다. 절터
    서북쪽에는 제법 멋을 부려 세운 전각이 있는데, 그 안에 부도비 가 있다. 무염국사 입적
    두해 뒤에 세운 부도비로 신라의 대문장가 고 운 최치원 선생이 글을 짓고 그의 조카
    최인연이 글씨를 썼다. 낭혜는 무염국사의 시호이며, 신라 태종 무열왕의 8대손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


    열세살의 나이에 입문한 낭혜는 21세에 당나라로 유학 길을 떠나 그곳에서 선종을 익혔다.
    귀국하여 성주사의 주지가 되어 신라의 선종을 크게 융성시킨 낭혜는 88세의 나이로 입적
    하였으며, 진성여왕이 낭혜를 기리기 위해 시호와 함께 부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 부도비는 전해오는 신라의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높이 4.5미터, 폭1.5미터,
    두께42센티미터로 거의 원형모습을 잃지 않 고 있다. 또한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 역시
    조각이 화려하고 뚜렷하여 신라의 부도비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비신의 재질은
    성주산이 주산지인 남포오석이다. 재질이 강하고 아름다워 세월이 지날 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는 남포 오석의 비신에는 5천여자의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심연동 계곡을 등지고 성주사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5층석탑이다.
    미끈한 키의 오츨석탑은 상당히 단아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보물 제 19호인 5층 석탑과 바로 앞에는 지방문화제로 지정된 석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주사의 금당터이다..다시 말하면 지금의 대웅전과 같이 부처님을 모시는 사찰의
    주 건물인 셈인데 지금은 터만 남았다. 부처님뒤를 대좌옆 기둥의 흔적으로 남은
    주춧돌만이 옛 흔적을 전해주고 있다.

     

     

     

     

     

     

    오층석탑 뒤편에 세기의 석탑이 어깨를 나란히 서있다. 모두 삼층석탑으로 신라
    하대의 것으로 짐작된다.
    보물20호인 중앙삼층석탑, 보물 47호인 서삼층석탑 , 지방문화재인 동삼층석탑이
    나란히 일렬로 서있는 사이에서 성주산으로 넘어가는 해넘이가 나그네의 감흥을
    자극한다.


    성주사지는 자녀들과 둘러보기에 더더욱 좋은 곳이다. 성주산 휴양림과 석탄박물관,
    심원동계곡 등의 관광명소가 성주사지 가까운 곳에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무창포 해수욕장도 멀지 않으니 그곳 또한 들러볼만한 곳이니 족히 하루 코스는
    될것이다.

     

     

     


    탑의 뒤쪽 한켠에는 입불이 서있는데 그 고단한 표정이 다난했던 성주사의 역사같기도
    하고 고단한 우리 중생들의 삶을 표현하는듯도 해서 그 앞에서 멍하니 10분을 앉았다가
    일어났다. 막상 앉았다가 일어났는데 머리속이 텅 빈 느낌이다.
    세월 앞에 우리는 참으로 고단한 삶을 살고 있지 싶다. 저 위의 표정이 너무나 나를 대변
    하는것 같아서 자꾸만 뒤돌아 보인다.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비는 전각을 보수중이라서 아쉬웠다. 보수중에 나온듯한 토기로
    된 용기가 깨어진 채 보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내용을 보령시천 홈페이지에서 옮긴다.

     


    성주사지(聖住寺址)에 있는 낭혜화상(朗慧和尙)의 죽음에 따라 여기에 세운 그의
    공적비(功積碑)다. 낭혜(朗慧)는 속성(俗姓)이 김씨이고 골품(骨品)은 난득(難得)이며
    신라(新羅)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의 팔세손이다.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2 년
    (801)에 출생하여 법명(法名)을 무염(無染)이고 시호는 낭혜(朗慧)이며 성주대사(聖主
    大師)라고도 불렀다. 그는 일찍부터 불교에 뜻을 두고 법성선사(法性禪寺)에게 배웠으며
    헌덕왕(憲德王)말년에 입당(入唐)하여 30년간 당나라에서 불도를 닦다가 문성왕(文聖王)
    7년(845)에 귀국하여 오합사(烏合寺)에 자리하면서 불도를 이었다. 신라에서도 앞날이
    촉망되는 사람이었으므로 큰 인물이 될 것을 예견하였으나 불문을 두들김으로써 성직자
    (聖職者)가 되었는데 그가 이곳에 자리하면서 성인이란 칭호(稱號)와 함께 그가 자리한
    절도 성주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진성여왕(眞聖女王) 2년(888)에 입적(入寂)하니 그의 높은 불덕을 빛내기 위해 탑호
    (塔號)를 백월보광이라 하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라 하였다. 비석은 큰 돌로 되어 있으며
    귀부(龜趺)에 일부 손상이 있을뿐 완전하다. 높이는 4,55m 비신(碑身)높이는 2.52m 이고
    비(碑)의 폭은 1.5m 이다.
    귀부(龜趺) 및 이수(이首)는 화강암으로 되어있고 비신은 흑대리석이다. 비문(碑文)은
    최치원(崔致遠)이 찬하였고 최연항(崔연抗)이 서(書)해서 1.5cm 의 해서로 되어 있다.
    비(碑)는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의하면 진성여왕(眞聖女王) 4년(890)에 세워졌는데
    귀부(龜趺)는 귀두(龜頭)아래가 매몰되어 있어서 알수 없으나 귀두(龜頭)는 괴수형으로
    세각되어 있으며 귀갑문(龜甲文)이 있고 비좌 4면에는 곽내(郭內)에 운문(雲文)이 조각된
    안상(眼象)이 있으며 그 아래로는 큼직한 운문이 있다.
    비신은 사강의 모를 죽였으며 전면에 제액(題額)이 있으나 글씨는 마손(磨損)되었다.
    비문(碑文)의 글씨는 신라말에 유행하던 구양순체(歐陽詢체)로 되어있는 명필(名筆)이다.
    문화재(文化財) 국보(國寶) 8호로 지정되었다.

     

     

     

     


    뒤쪽에서 조망해본 전경...하도 넓어서 탑을 중심으로 찍었다.

     

     


    해는 뒤엇 뉘엇 넘어가고..골짜기라서 해가 빨리 졌다.

     

     

     


    석등과 5층석탑...

     

     

     


    삼층석탑과 민들레....

     

     

     

     


    성주사의 돌담..

     

     


    돌담옆에 있는 감나무에 감이 많이 열렸다..

     

     


    담넘어 동네 민가에서 울어대는 녀석을 위해 한 컷..사진 찍어주니 한 동안 안 울었음.
    탈렌트 기질을 타고난 녀석인듯...

     

     


    돌아오는 길..내내 쫓아오는 석양때문에 과속을 하였다는...한 30분을 따라오더니
    지쳤는지 산속으로 숨어 버리더군...

     

     

     

     

     

    현지교통 : 대천에서 먹방행까지 시내버스 수시 운행 / 성주사지 하차 / 15분 소요


    도로안내 : 서해안 고속도로- 대천 나들목- 보령-40번 국도 성주터널- 성주삼거리-

                   좌회전-성주사지


    주변명소 : 석탄박물관 (041)934-1902 성주산자연휴양림 (041)934-3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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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산선문을 찾아(1)-곡성 태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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