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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가방]
판도라의 상자..
2004-02-16 오전 10:36:39
학교가 파하고 돌아와서 시멘트포대로 만든 튼튼한 딱지를 들고 골목길을 장악하고
삐질거리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놀고 있을때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금이나 은이나 채권삽니다..고급시계도 삽니다~~ 금이나 은~~채권삽니다~"
꼬질한 까만고무신과 대비되는 누런색깔의 딱지옆에 발을 살그머니 대고 힘껏
오른손의 딱지에 힘을 가할라치면 골목을 돌아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보입니다.
중절모에 회색의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까만 신사복 바지에 광이 번쩍나는 구두가
동네에 가끔씩 들리는 면서기 아저씨보다 훨씬 멋있다고 아이들은 느낍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내맘을 끌었던 것은 구두처럼 광약을 발랐는지 빤질빤질하게
반짝이는 누런 가방이였습니다.
왼손으로 겨드랑이에 끼고 오른손을 살짝 올린 그 누런 가방...
왜 그렇게 그 가방이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지만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학교갈때 가져가는 가방은 가방이 아니라 책보자기 였습니다.
국회의원 ***이 인쇄되어 있는 분홍빛 보자기에 책과 공책..그리고 필갑을 놓고
길이로 몇번 접은 다음에 목욕탕에 혼자 갔을때 긴 이태리타올을 잡는 방식으로
등에다 대고 앞으로 묶어면 되었습니다.
3학년이 되어서 방학때 외가에 갔을때 돌아오기전날 장보러 나가셨던 외삼촌께서
사각으로된 등에매는 가방을 사다 주셨을때 하마트면 울뻔 했었지요.
나도 이제는 시장통 아이들과 같이 등에 매는 가방을 가졌다는 그 뿌듯함으로
전율했었지요.
중학교 가던날
처음으로 부모님이 사주신 책가방을 들고 학교로 가던날 1시간이나 걸리는
버스안에서 가방만 만지작 거렸지요.
한동안은 버스안에서 누군가가 책가방을 받아준다고 해도 절대로 사양을 했지요.
6년 동안을 정들었던 가방이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는 날 낡아빠진 가방은 제 곁을 떠나갔습니다.
잉크병이 쏟아져서 내부가 까맣게 물들기도 했구요.
일년동안 무협지 400여권을 담아 나르기도 했구요.
대망이라는 잡지를 다섯권..두권..세권씩 날라주기도 했었지요.
또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소위 말하는 빨간책을 수시로 담기도 했구요.
초읍이라는 동네 골목에서 미군들이 버린 플레이보이 잡지를 담아 나르기도
했었지요.
제 가방은 판도라의 상자였습니다.
동생들이건 심지어 부모님들까지 절대로 제 가방을 열어보는 적이 없었기 때문에
들켜서 부끄러울만한 모든 것들은 가방속에 있었지요.
제 가방을 수시로 열어볼수 있는건 오로지 주인인 저하고 선생님 뿐이였지요.
그래서 고등학교때는 집에서 나와서 학교교문을 들어서기전에 꼭 들리는 곳이
할매집이라는 자그마한 식당이였습니다.
그 집에 가면 제 앞으로 배정되어 있는 조그만 소쿠리가 있는데 그곳에 빨간책..
잡지..라이터..톱날을 갈아서 만든 작은 칼등을 보관해 두고는 교문을 들어섰지요.
학교가 파하면 할매집에 가서 다시 가방에 챙겨넣고는 했는데 그집의 파전은
그 맛이 정말 죽입니다.
팔아주어도 그만 안 팔아주어도 그만인 그 마음좋은 할머니가 보고 싶군요.
사회에 나와서 처음으로 구입한 가방이 007가방이였습니다.
한 동안 잘들고 다녔는데 원래 다리가 짧아서인지 왠지 가방과 주인이 부조화를
이루는 것 같아서 지금은 오래된 서화를 넣어두고 있습니다.
그래도 비밀번호를 알아야 열수 있는 가방이였는데 말이지요.
그래도 가방이 나로 하여금 한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시켜준 적도 있습니다.
우리 큰딸..그러니까 블로그앤에서 엉망진창 아상이라는 대명을 가지고 있는
그 아이가 초등학교 입합할때 사주었던 그 가방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표현하기 힘든 느낌을 받았지요.
앞으로 가방으로 감동을 받을일이 한번정도 남아 있을라나 모르겠습니다.
우리 딸들이 시집을 가서 외손자라도 보게 되면 이쁜 가방을 사주고 싶습니다.
그때도 우리네 학교에서 가방이 필요하다면 말입니다.....'이런저런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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