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삼행시-조약돌(남한산성)/김대근
    삼행詩 2014. 6. 23. 20:19

    조약돌(남한산성)


    조선 솔 지켜본 세월 피맺힌 멍울은
    약소의 설움으로 찢기고 발기어
    돌쩌귀 모서리 마다 켜켜이 쌓인 한恨


    조당朝堂까지 옮겨와 버텨도 보았지만
    약질弱質한 나라는 구배九拜로 종이 되었네
    돌틈에 사백년 이끼, 해탈할만도 하다


    ======================================


    조선朝鮮은 중기에 이르러 두가지 선택의 실수로 인해 스스로 피바람을 불러왔다. 첫번째 선택의 실수는 왜倭의 침략을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음에도 정파적 사고로 외면하고 애둘러 왜倭의 힘을 왜곡해 국토에 피바람을 불러왔다. 두번째는 폭넓은 외교를 실천했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명이라는 꺼져가는 화톳불을 선택한 인조와 사대주의자들의 선택적 실수가 불러온 병자호란이었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산성山城의 나라였다. 전쟁이 나면 산성에 들어가 항전을 했다. 산성에 익숙하지 않은 침략자들은 힘들게 산성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저 수도와 임금만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한다면 우리가 완전히 굴복한 적은 많지 않았다. 산성이 험난한 지형을 이용해 지어진 이유이다.


    남한산성은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 신라시대부터 축성된 성곽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끊임없이 수축되었다. 그래서 다양한 시대의 성곽 수축기술을 엿볼 수 있어서 아시아 성곽기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산이다. 이번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이 부분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을 통해 블랑기포라는 서양대포의 엄청난 위력에 놀라 서양무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수축하는등 국가 비상시를 대비한 성곽으로 관리되어 왔다.


    남한산성 최대의 굴욕은 역시 병자호란에서의 패배였다. 명나라와 전쟁을 앞두고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국력으로 광해군은 명과 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유지하며 슬기롭게 국정을 운용했으나 명에 대한 사대에 찌든 정파적 다툼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명과 전쟁을 준비중이던 청나라는 후일 배후의 위험을 제거할 전략적 선택으로 기습적으로 조선을 침범하게 되었다. 전쟁초기 청나라는 조선에 형제의 의를 맺는 조건을 화친을 제의했지만 국제정세에 까막눈에다 명분만 남아있던 조정의 대부분은 결사항전을 선택하고 조정을 남한산성으로 옮기게 된다. 왕비와 왕자들은 강화도로 보내 만일을 대비했다.


    모진 겨울 추위를 견디며 항전하던중 강화도가 청군에 점령되고 왕비와 왕자들이 포로로 잡히게 되자 인조는 남한산성의 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구배로 청의 신하가 되는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르게 된다.


    이때 수많은 조선의 선비와 부녀자들이 청으로 끌려갔다. 이들을 속량하기 위해서 은銀이 소요되었고 한때는 조선에 은이 씨가 말랐다. 남자들은 그렇게 속량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전쟁전과 다름없이 생활했지만 여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시가媤家와 친가親家, 모두에서 버림받았다. 그녀들은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뜻인 환향녀還鄕女로 불리워 졌다. 지금도 부정한 여자를 뜻하는 '화냥년'이라는 욕설이 있는데 그 유래가 환향녀還鄕女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이었던 현장인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다. 그날 나는 남한산성을 올랐다. 날씨도 마음도 우중충하였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