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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늘 속의 도박
    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10. 8. 4. 12:12

    그늘 속의 도박


    전철을 타면 2시간 거리임에도 수업이 있는 날 아침에는 항상 바빠서 KTX로 이동하게 된다. 새벽에 일어나 허덕대야 하는 면에서 보면 가깝거나 멀거나 촌에서 사는 설움을 톡톡히 치룬다. 갈수록 서울 편중이 심해져서 교육, 문화, 금융 같은 필수적 인프라가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촌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지난 수업에는 오르내리기 귀찮아서 강남의 모 찜질방에서 유숙했다. 살풋 잠이 들었다 싶었는데 핸드폰 진동에 깨어나 시간을 보니 내가 인지했던 하루는 이미 날짜변경선의 저쪽으로 사라지고 새로 맞는 새벽 2시.


    "논문 표지 파일이 어딨는지 몰겠어요.. 아침에 일어나시면 좀~"


    방송통신대학교 졸업반인 아내의 문자다. 졸업논문 준비하느라 끙끙대는데 전공이 다르니 도와주지도 못한다. 나 역시 방송통신대 출신이라 논문표지 양식을 가지고 있는지라 내게 요청한 문자메세지다. 그게 어디있었지? 기억의 편린들을 더듬다가 휴대용 하드에 있음을 생각해내고 로카에서 꺼내 왔다. 해야 할 일은 그때 그때 하는 습관을 들이려 노력중이라 바로 행동에 돌입하여 한 것이다.


    찜질방에는 10여대의 PC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고장난 것 두개 빼고 8대에 모두 사람이 붙어 있다. 그 중에 아이 둘을 빼고는 대부분 게임에 빠져 있다. 요즈음은 10시 이후에는 미성년의 찜질방 출입이 제한 되어 있는데도 이들이 보이는 것은 어찌된 일인지.... 세이 고스톱 화면이 두개 ... 나머지 네사람은 돈으로 충전하고 게임을 해서 서로의 포인트로 노름을 하는 사이트 화면이다. 내 휴대폰의 문자 메세지로 수없이 홍보 문구를 보내는 사이트다. 서로 말을 주고 받는 뽄새로 보아 일행인듯 하다. 1시간이 넘게 대기석에서 기다렸으나 자리가 나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정보의 총아여야 할 인터넷 공간도 이제 검색보다는 게임이 주류가 되어 간다. IT 공화국... 대한민국의 새벽은 늘 이렇게 시작된다.


    월요일 아침이다. 출근을 하니 옆 부서  X부장이 똥씹은 표정이다.
    "월요일에 8월 첫 출근에 왠 인상이야? 뭔 일 있었어?"
    "말도 마. 어제 오랫만에 필드 나갔다가 죽 쒔어. XX 산업 X이사... 그 새끼 아무래도 핸디를 속인거 같애."
    "얼마나 잃었는데 그래?"
    "30정도...."


    하루 운동에 30만원을 잃었으면 열 받을 만도 하다. 더 문제는 이처럼 골프를 빙자한 노름이 더 문제다. 우리나라에서 골프는 대중적이지 않다. 소위 말하는 부로조아적 운동으로 인식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인 내게는 너무 높은 벽으로 쌓인 운동이다. 사회에서 제법 상류에 속하는 이들이 필드에서 운동을 핑계 삼아 벌이는 이런 류의 도박은 그 현황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운동에 조금의 경쟁의식이 부추김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내가 퇴근후에 들리는 곳이 활터다. 활은 개인과 과녁의 싸움이다. 그럼에도 가끔씩 편을 갈라서 '편사'라는 게임을 한다. 주로 젊은 궁사와 나이든 궁사로 편이 갈리는데 탕수육, 짜장면 같은 것을 사람수 대로 시켜두고 배달을 기다리는 동안 활을 쏘아 승부를 가리고 진 쪽에서 음식값을 부담한다. 그러니 음식값이랬자 5만원을 넘는 경우는 드물다. 회사에서는 점심시간에 항상 젊은 직원들이 족구를 한다. 족구판도 분명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인데 한판에 만원을 건다. 한 팀에 4명이므로 1인당 2500원 꼴이다. 그나마 엇 비슷한 실력이니 하루는 이팀이 하루는 저 팀이... 이렇게 왔다 갔다 하다보면 모아서 저녁술이라도 먹자는 그들의 계획은 몇 달이 가도 이루어 지지 않는다.


    '놀음'과 '노름'의 경계선은 어디일까? 우리는 그것을 정확하게 구분 짓기도 힘들고 애써 구분지으려 하지도 않는다. 나 역시도 이 경계를 구분짓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다만 '놀음'은 유희고 '노름'은 도박이라는 정의 정도... 같이 즐겨서 다 같이 흥겹다면 '놀음'에 속할 것이다. 명절날 가족끼리의 고스톱 한 판, 상갓집에서 밤을 세워주며 오가는 화투나 카드 한 판 등등...


    월요일 오후에 급한 출장이 있었다. 포항으로 달려갔다. 포항으로 출장갈때 항상 머물러 가는 와촌휴게소. 열에 들뜬 무릎을 식히고 있는데 37인승 관광버스가 눈에 뜨인다. 어중간한 크기라고 생각되겠지만 나도 동급의 버스에 실려본 적이 있다. 37인승이란 45인승 버스의 뒤쪽 공간의 의자를 줄이고 탁자를 들여 놓은 버스다. 일행끼리 오손도손 담소나 나누며 가면 좋으련만 그 뒷자석의 진정한 용도는 고스톱이나 카드용이다. 몇 년 전에 지역 산악회 산행에 참석했는데 그때 이 37인승 버스를 타게 되었다. 오가는 동안 왁자한 화투판의 소음으로 모처럼 휴식에의 꿈은 여지 없이 날아가고 말았다. 아뭏던 그 추억의 버스를 여기서 다시 보니 반갑기도 하다.


    가능한 1박 2일 출장은 잘 안 잡는 편인데 휴가철이라 부족한 인원으로 어쩔 수 없이 잡힌 출장이다. 여관과 찜질방을 두고 고심을 거듭한 끝에 며칠전에 구입해서 읽고 있는 책을 오늘은 기필코 덮고 말겠다는 일념에 여관을 택했다. 또 다음날 아침 거래처에 제출해야 할 각종 서류들을 만들어야 해서 독립적인 공간이 필요했던 탓도 있었다.


    다음날 아침 밤새 작업한 서류를 프린트 하기 위해 피시방에 들렀다. 아침 시간임에도 피시방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겨우 한자리 차지하고 작업을 했다. 8시 30분이 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몇 사람이 나누는 소리가 피시방을 울린다.
    "얼마나 잃었어?"
    "12만원"
    "일당 날아갔네... 나는 겨우 2만원 땃어"
    "형님은 좋겠소. 나도 새벽에 겨우 만회 좀 해서 8만원 날렸소"


    8시 30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이들은 십중팔구는 트레일러 기사들이다. 왜냐하면 포항하면 짐작할 만한 제철소에 물품반입이 시작되는 9시에 맞추기 위해 지난밤 도착하여 골목에 차를 대고 기다렸을 것이다. 과거에 그들은 도박과 여자에 빠지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요즈음 지방을 자주 다니는 화물차에는 부인이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다. 8시 30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으면 하역시간을 놓치게 되어 낭패를 보기 때문이다. 요즈음 나처럼 서류 프린트를 하러 오거나 순수하게 인터넷 검색만을 위해 피시방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게임을 하러 오는 것이다. 그 중 대다수는 인터넷 도박을 한다. 그럼에도 이런 류의 도박에 대한 자료나 연구가 없음은 아쉽다. 이런 도박들은 모두 그늘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 그늘을 헤짚고 싶다. 그 그늘에 밝은 투광등을 비추고 싶다. 그러나 아직은 마음만 있을 뿐~


    <2010년 8월 4일 이틀간의 포항 출장에서 돌아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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