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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행시- 원두막(고추농사) /김대근삼행詩 2010. 7. 30. 17:21
고추농사
원행(遠行)길에 친우(親友)의 농사 부러워
두엄 주어 잘 키운 고추 모종 다섯 포기
막자갈 고르고 다져 화분에 옮겨 왔다
원래 햇살 아래 몸을 구워야 하지만
두메도 아닌 도회에선 가당치도 않아
막둥이 어루더듬듯 들며 나며 눈에 쟁였다
원뿔 과육 몇 개가 꽃 진 자리에 열렸다
두어서 더 익히자는 아내와 싱강이 끝에
막걸리 안줏거리로 풋고추 2개를 수확하다
원치않는 일들에 목 매여 산 오늘
두어 장면은 아직도 남아 후덥게 한다
막사발 그득히 채워 식혀보는 하루
삼행시: 원두막 (고추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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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를 농투성이들 사이에서 보냈던 탓인지 농사는 오래된 옷을 입는 것처럼 편안하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논 농사를 지어서 온 식구가 입에 풀칠을 했다. 초등학교 때도 나는 물꼬를 보러 다니거나 피를 뽑거나 보리 타작, 나락 타작을 도왔다. 이쯤되면 태생이 농부라해도 됨직하다. 장성하면서 농사와는 영 담을 쌓게 되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농사는 다시 꿈이 되었다. 마치 은어가 본능에 따라 회귀하듯 내 피 속에 고요히 머물던 농부의 본능이 꿈틀대는 것이다. 출장으로 멀리 원행을 다녀왔다. 짬을 내어 친구를 찾았더니 시골 밥상이 차려지고 뜰에 심어 놓은 고추에서 몇 개의 풋고추를 따서 상에 올렸다. 무더운 여름 식욕도 얼추 감해져 있는 판에 물에 만 밥에다 된장에 찍어 먹는 맛이 알싸하면서도 꽤나 상큼하다.
마침 토요일에 장이 맞추어 졌다. 아내와 장 나들이를 하다가 고추 모종 다섯 포기를 사왔다. 두엄까지 주며 잘 길렀다는 장사의 말을 믿고 싶었다. 고추를 심어 기르기에는 너무 늦기는 했지만 길쭉한 플라스틱 화분을 구해 심었다. 삭막한 아파트에서 농사를 짓는것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주변에 간간히 상추 두 어 포기 심어 두고 길러 먹는 다는 사람도 있고 보면 고추 몇 포기 기르는게 대수랴 싶었다. 그러나 고추 5포기는 결국 베란다에서도 쫓겨나게 되었다. 덩치 때문이다. 새로 옮기게 된 곳이 계단이다. 어느 정도 자라자 받침목을 대 주어야 하는데 도회에서는 그 재료를 구하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다. 활 터에서 부러진 카본 활 2개와 길에서 줏은 가는 나무 막대 하나로 버팀목을 해 주었다. 무더위가 막 시작되는 때 하얀 꽃들이 피어났다. 꽃은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하기를 거듭해도 정작 열매를 맺지 않았다. 나비나 벌들이 꽃가루를 옮기지 않아 그런가, 모종을 잘못 사서 그런가 했지만 생각해보니 햇살이 부족한 것이 이유인듯 싶다.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 들고 나며 어루어댄 보답인지 얼추 대 여섯 개의 원뿔같은 고추가 열렸다. 열악한 환경임에도 꽃 피워 주고 게다가 열매까지 선사하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덥다. 일년에 서너번 스위치를 올리던 에어콘도 참고 참다가 결국 틀고 말았다. 이렇게 더운 날 부대끼는 일들이 많았다. 언성도 높이게 되었고 몇 가지 일은 종일 뇌리에서 떠나 보내지 못하여 열이 오른다. 시원한 막걸리 한 병을 슈퍼에서 사들고 퇴근했다. 아내가 안주를 장만했지만 얼마전에 다녀온 친구집 밥상 위에 올려졌던 풋고추 생각이 간절하여 채 여물지도 않은 것을 두개나 땄다. 아내는 더 익혀야 하는데 딴다고 난리였지만 이미 수확해 버린 것을 어쩌겠는가. 풋고추는 덜 여물어 그야말로 풋내가 모깃불 퍼지듯 코를 간지럽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본능속에 농꾼의 피가 잠재해 있다는 말은 취소해야 할 것 같다. 진정한 농꾼은 기다릴줄 알아야 한다. 자연이 곡식을 적당히 익혀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줄 알아야 하는 것인데 나의 조급증은 도회인의 전유물이다. 결국 이번 농사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도회인이라는 증거만 발췌한 셈이다. 남은 서 너 개의 고추는 제대로 익혀볼 생각이다. 우선은 막걸리를 끊어야 겠다.'삼행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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