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삼행시- 소나기(구룡사에서...) /김대근
    삼행詩 2010. 7. 28. 09:22

    구룡사에서...


    소슬한 옛 시간 올올이 풀려서
    나선으로 꼬여져 구비마다 맺히고
    기슭에 기대어 흠칫, 세월 참 빠르기도...


    소나무 등걸 아래 여래(如來)의 미소 하나
    나리꽃 피어나 제 몸을 공양하고
    기다란 산 그림자 바람끝에 서다


    소리 몇 조각 후두둑 발 끝에 떨어졌다
    나는 풀쩍 놀라서 하늘을 좁혀 본다
    기우뚱 석탑위에 주련처럼 걸린 구름


    소념(所念)이 무었이었나?, 불현듯 멍해져
    나를 잠그려 눌러 보는 가부좌
    기별은 저만치 숨어 주장자 세우다

     

    **소념(所念): 마음 먹은 일
    **주장자(柱杖子): 불교에서 선사(禪師)들이 설법할때 사용하는 지팡이


    ---------------------------------------------------------------------
    오늘은 조부의 기제사다. 부친이나 모친이나 모두 세월에 육신을 갉히고 풍파에 정신이 마멸되어 제사 준비를 못하시게 되었다. 토요일, 일요일 아내와 둘이서 마트며 재래시장이며를 돌고 돌아 제수꺼리를 마련하고 장만해서 행여 지체되면 음식이 상할까 해서 일찍 길을 나서 본가에 닿았다. 음식을 모두 내려서 갈무리 하고 나니 시간이 많이 남는다.


    최근에 구입한 '캔윌버'의 "Eye to Eye"를 읽으며 소일하다가 워낙 무거운 책이라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고 기껏 넘긴 책장의 저 편은 이미 한 밤중이다. 책을 덮고 산책을 나섰다. 하루 휴가가 제법 길다는 느낌이다. 맥 없이 시간을 소일하는 이런 류의 휴가에 익숙하지 않은 탓일 것이다.


    본가 뒷편 야트마한 산을 올라 낙동강을 굽어보니 옛 추억들이 콧등에 솟는 땀처럼 송글송글 맺친다. 이 산은 소나무가 듬성하고 금잔디가 고르게 자란 평지가 많은 곳이었다. 잔디밭에 앉으면 시원하게 낙동강이 조망되는 곳이었다. 봄에는 '삐리' 같은 먹을 거리를 찾아 해매어 다녔다. 그때는 오토바이가 유행했는데 그들이 주로 데이트를 나오는 곳이기도 했다. 그 아베크 족들이 머플러를 잔디에 깔고 부둥켜 안고 있는 곳을 '삐리'를 뽑는다며 얼쩡대면 오붓한 데이트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몇 푼의 잔돈을 주고는 했다. 그 돈은 대부분 2프로를 상영해주고 5원을 받던 극장에 가져다 바쳤다. 먹을 꺼리가 궁했던 시절이었음에도 무척 영화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먹는 것에 투자를 했더라면 내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작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때 그 추억의 자리는 지금은 빙상장이 들어서 있다. 상상도 못할 일이다. 밤 11시가 되었어도 여전히 얼음을 지치는 열혈 매니아들이 많았다. 제2의 김연아가 내 유년의 추억이 서린 이 장소에서 나오기를 염원해 본다.


    남해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조금 더 높은 산성이 하나 있다. 가야시대에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공원이었고 신라시대때는 물금지역의 철광석을 지키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때는 낙동강 하구에서 삼랑진, 김해까지의 모든 수로를 훤히 조망되는 이곳에 왜군들이 산성을 쌓았다.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는 왜성은 우리 전통의 산성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고대에서 중 근대까지 낙동강은 모든 물류의 통로였다. 군사력도 강을 타고 이동되었기에 강이 잘 조망되는 곳은 군사적 요충지로서 가치가 있었다. 가야는 무역에 의존하던 국가였다. 따라서 강과 바다를 끼고 있는 김해가 발전할 수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외적의 침입에 더 많이 노출되었다. 그런 면에서 신라의 경주나 백제의 부여에 비해 취약했고 그것은 결국 가야의 발목을 잡았다.


    불과 몇 달 만에 바뀐 풍경이 남해고속도로 상공으로 다리를 놓아 두 산을 연결한 것이다. 다리와 연결된 끝에 구룡사가 있다. 고등학교때부터 해마다 연등을 밝혔던 곳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수 많은 번민들을 가져다 풀어두고 오곤 했던 곳이다. 지금은 이 절의 풍경도 너무 많이 변하였지만 대웅전 앞에서서 조망하는 낙동강의 시원한 풍광은 그대로다. 물론 낙동강의 풍경도 이 절의 변화된 풍경만큼이나 많이 변했다. 불전 앞 천정에 용 그림등으로 치장된 다른 절들과 달리 날개옷을 입은 선재동자들이 노니는 모습이 특이한 절이다. 그 그림에 반해서 법당안에서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예의도 무시해가며 사진으로 남겼던 적이 있었는데 이미 그 세월도 20년을 넘겼다. 오랫만에 법당에 들러보니 아직도 환희에 차 노니는 동자들의 모습은 변화가 없다. 법당은 그때보다 2배나 넓어졌다. 좁아진 것은 내 마음 뿐이구나 싶어 가슴으로 가시랭이 하나가 새로 돋는다.


    절 뒤편으로 오르면 약사대불이 있다. 낙동강을 멀리 굽어보며 약사발을 들고 있다. 약사대불로 오르는 길 소나무 그늘이 촘촘하게 내려 앉은 곳에 나리꽃들이 피어나 저마다 공양을 다투고 있다. 배롱나무 꽃도 피고 개망초며 도라지 꽃들이 약사여래 서있는 작은 숲속을 광대무변한 도량으로 만들어 놓았다. 한 곁에 그늘에 서니 바람이 제법 선선하고 바위는 한 사람 앉을 만 하다. 잠시 좌선에 빠져 본다. 온갖 소리들과 싸우다가 마침내 길을 잃어버리고 다시 미아가 되었다. 언제나 길을 찾게 될까? 어쩌면 내 삶의 끝점까지 길을 찾지 못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난다.


    배롱나무 꺼끌한 표피를 손으로 훑어본다. 조부님 산소에 배롱나무 한 그루를 심으리라 마음먹은지 십년도 넘었다. 험난한 삶을 살았던 그는 결국 타관땅인 일본의 어느 탄광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가로 세로 두뼘도 안되는 상자에 담겨져 돌아오셨다. 조부의 작은 산소는 명절마다 마음을 무겁게 한다. 산소는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는 속설에 아직은 매여있어서 나무 하나 심기도 쉽지는 않다.


    올 기제사에서는 이미 정신을 놓아버린 부친, 기력이 다한 모친이 더 이상 봉제사하기 힘들것이니 장손이 내가 당연히 제사를 가져가겠다 했다. 숙부도 별 말씀이 없으셨다. "조카가 그리 하겠다면... " . 별다른 이의가 없다는 말씀이다. 이제 날짜를 잡는 일만 남았다. 충청도로 제사를 옮기면 평일에도 왕복 10시간이 걸려야 하는 곳까지 참례하기도 힘들 것이다. 명절에 산소를 찾기는 더 힘들어 질 것이다. 이제 일가붙이가 거리를 벌리는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세상살이가 조상, 자손, 일가들과의 정신적 거리마저 물리적 환경이 늘려 놓는다.


    올해도 이런 저런 사정을 핑계로 청명한식을 넘기고 말았다. 내년에는 조부님 산소에 자그마한 배롱나무 한 그루를 꼭 심으리라.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