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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빛 스민 보퉁이
    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10. 6. 7. 16:55

    달빛 스민 보퉁이


    오늘 잠깐의 외출에서 두번이나 영구차를 지나쳤다. 운전을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왼발을 구르며 "나무지장보살"을 염했다. 사람이 죽으면 망자라 하고 그 망자의 새로운 영역을 관장하는 이는 불교에서 지장보살이다. 물론 세상의 모든 종교가 인간의 눈으로 재단되고 바느질되어 형태를 갖춘 것이어서 그런지 사후의 세상에 대한 관점도 종교마다, 지역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내가 이런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은 청년 시절에 나를 가르켜준 스승으로 부터 배운 것이다. 우리는 보통 나와 상관없는 사람은 인연이 없다고 여기기 쉽지만 따지고 보면 같은 시점과 공간에 태어났다는 것도 큰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그러니 오늘 나를 스쳐간 두 사람의 망자도 깊은 인연으로 맺혀 있는 사람들이다. 그 망자의 평안과 영면을 빌어주는 나의 작은 행위가 실없는 짓은 아닌 것이다.


    유년 시절의 일이다. 이슥한 저녁 아버지가 정장을 차려입고 길을 나선다. 어제 대문에 꽂히어 있었던 여우고개 아래 미장이 박씨 아재의 상사에 가시는 길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상사를 장례식장에서 치루어 왁자한 분위기가 없지만 그 시절에는 상갓댁에서 상사를 치루었고 잔치와 별 다르지 않는 분위기 였다. 여기저기 무리지어 화툿판이 벌어지고 문상객들은 밤새 떠들썩 하고 거나하게 보냈다. 상사를 당해 밤을 보내기 무서운 상주들에게 이 왁자함은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망자의 영면을 빌어주는 마음은 모두 같았다.


    아버지는 상가집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드물었다. 다음날 생업에 나가야 하니 대부분 통금 싸이렌이 울리기전에 오시곤 했다. 5남매는 밤이 늦도록 아버지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빨리 자라는 엄마의 채근에 몸을 뉘이긴 했지만 귀는 대문을 향해 늘어졌다. 그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덜컹 대문이 열리면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아버지를 맞이했다. 아버지의 옆구리에는 하얀 백지를 둘둘 말아 싼 보퉁이 하나가 있었다. 그 종이 보퉁이에는 아버지가 밤길을 갈지자로 더듬어 오며 담아온 달 빛이 은은하게 베어났다.

     

     

     


    꺼졌던 30촉 백열등이 다시 밝혀지고 흔들리는 불빛 아래 오남매의 눈빛이 족히 100촉 정도는 되는 가운데 종이 보퉁이가 펼쳐졌다. 고래고기 다섯 점, 노랑색 콩고물을 뭍인 떡 두 조각, 복(福)가 둥글게 눌러진 찰 떡 세 조각, 박하사탕 다섯개, 그리고 풍성하게 베인 달빛…


    먹을 것이 귀하던 그 시절에 잔치집이나 상가에서는 혼객이나 문상 온 이에게 답례로 몇 가지 음식들을 종이에 싸서 들려 보내었다. 집에 있던 사람들도 잔치나 상가의 음식을 맛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입 안에 들어간 고래고기는 그야말로 살살 녹아내려 풍미가 며칠씩 입안을 돌았다. 콩고물 떡은 고소했고, 찰떡은 쫄깃하고 부드럽게 목을 넘었다. 게다가 박하사탕은 입안에서 다 녹을 내내 한줄기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 온 몸속 혈관을 고루 돌아다녔다. 그렇기는 하지만 고래고기는 한 입만 더 먹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고, 콩고물 떡은 왜 그리 작은지 불만이었다. 기름을 발라 미끈한 찰떡은 오히려 허기를 촉발시키기도 했다.


    지난 주에는 지인의 혼사에 다녀왔다. 부조의 양을 두고 적잖이 고민을 했다. 3만원을 하자니 요즈음 시세에 비하여 적은 것 같다. 5만원을 하자니 혼주와 내가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것이어서 많은 듯 느껴진다. 결국 5만원을 넣어 봉투를 만들었다. 봉투에 내 이름은 특히 정성을 기울여 썼다. 혹여 치부책에 잘못 기록되지 않도록 기원하며 썼다고 해야 옳은 말일 것이다. 식권을 한 장 받았다. 자리를 잡고 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데 같이 간 이가 밥 먹으러 가자고 채근이다. 식을 마치고 가면 너무 번잡스럽다는 것이다. 일행에 이끌려 식당에 들러서 왔다. 정작 결혼식은 구경도 못한 셈이다. 식당에는 이미 절반이나 자리를 차지 하고 있다. 결혼식 축하를 생략하고 식당으로 직행한 이들이 절반 이상이 된다는 이야기다. 축하를 해주러 가는 게 아니라 일종의 품앗이를 하러 가는 셈이다. 내가 무슨일이 있을 때 오늘 이 혼주가 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고, 일종의 저축과 같은 것이다. 이쯤되면 축하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인 인증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청첩이 오면 우리집 대소사에 왔던 집안인지 아닌지를 먼저 따져 보게 되는 것이다. 상사도 마찬가지다. 얼마전에 지인의 상사가 있어서 갔다가 12시가 되니 상주들도 휴식을 해야 된다하여 밀려 나왔다. 서울에서 제법 이름 있는 병원 부설의 이 장례식장에서는 화투도 금기였다. 실내에서는 담배도 피울 수 없다고 한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길 가에서 차들의 배기가스와 섞어 피워야 했다. 이쯤되면 망자에 대한 기원과 상주에 대한 위로라기 보다는 그저 눈도장을 찍는 행위에 불과하다.


    유년의 시절, 아버지가 밤 새 담아 온 달빛 가득 스민 보퉁이를 펼치며 나도 그런 아버지가 되었으면 했다. 달빛도 없는 황량한 사막같은 도회의 생활은 갈지자 걸음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늘도 한 장의 부고를 받았다. 문상에는 겨우 30여분이면 족하리라. 집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이렇게 한 마디하면 우리 아버지처럼 멋 있어 보일라나 모르겠다.


    "닭 한 마리 시켜! 아빠가 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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