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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내기 하는 날
    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10. 6. 4. 17:12

    모내기 하는 날


    누구집 부엌 숫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부락중심 농경에서 벗어 나지 못한 때가 있었다. 부락중심 농경 사회에서 개발붐을 붐을 타고 산업사회로 말을 갈아타던 시기였던 60년대 말에 나는 유년을 보내고 있었다. 4마지기 논은 근동에서는 소문 난 상답이었다.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작은 개울의 중간쯤에 있어서 물대기도 좋았다. 그러나 4마지기의 소출로는 5남매의 배를 다 채워주기에는 부족했다. 아버지는 근검과 노력이 몸에 배어 밀가루 공장에 다니시면서 농사일도 더불어 했다. 요샛말로 하면 투잡쯤 될 것이다. 엄마도 마찬가지 였다. 5월 쯤에는 김해 뜰로 다니며 보리 이삭을 주었고 늦 여름 쯤에는 감자 이삭을 줏으러 다녔다. 장남이었던 나는 학교를 파하고 오면 구멍이 숭숭한 소쿠리를 들고 경부선 철로를 넘어 낙동강으로 가서 재첩을 잡거나 소주댓병을 들고 논으로 가서 메뚜기를 잡았다. 잡아온 메뚜기는 소금을 뿌려 볶아서 반찬으로 요긴했다. 여름에는 대나무 끝을 부수어 대못을 꺼꾸로 박아 고무줄로 동여맨 창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다녔다. 잡은 개구리의 뒷 다리를 잡고 힘을 주면 점프할 때 처럼 몸을 꼿꼿히 편다. 냇가의 돌 위에 놓고 다른 돌로 허릿께를 잘근잘근 쳐대어 하체와 상체를 분리하여 상체는 물에 띄워보내고 남은 하체의 껍질을 벗겨 불에 구우면 세상 어느것보다 영양가있고 맛 있는 먹거리가 되었다. 동생들은 개구리를 좋아했다. 온 식구들이 움직일 수 있는 한 먹을 것을 찾아 헤매었다. 마치 먹기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식구들의 관심은 늘 우리 논에 가 있었다.


    아버지는 낮에 논일을 하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밀가루 공장에 야간을 들어갔다. 아버지가 주간 근무를 할때는 엄마가 대신 논일을 했다. 가뭄은 자주 찾아와서 사람들을 짓밟으려 했으나 사람들의 반항도 만만하지 않았다. 보리타작이 끝나고 이내 모심기 준비를 한다. 겨우내 말라 푸석해진 논에 물을 대고 초벌갈이로 무삶이를 해야 한다. 그래야 표층에서 깊이 물이 스며들어 벼가 자라기 좋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모판을 만들고 논 전체에 물을 넉넉히 대어 모내기 준비를 해야 한다. 그때쯤 단골손님처럼 가뭄이 찾아 오고 동네에서는 간간히 물싸움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두레의 삶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차례를 전해 물을 대기로 한다. 그 시간이 밤이 되면 누군가가 자기 논의 물꼬를 지켜야 했다. 물이 넉넉하지 않으니 차례가 늦으면 자연히 마음은 조바심을 치게 된다. 낮에는 안면이 받치는 일도 밤이면 가면을 쓰기 좋은게 사람의 양심이 아니던가. 남의 논으로 들어가는 물꼬를 자기 논으로 돌려놓거나 물 대고 있는 논의 두렁을 슬금 허물어 놓아 옆구리로 새어 나오는 물을 자기 논으로 대려는 얌체도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차례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물꼬를 지켜야 했다. 가끔 아버지가 야간근무를 가시고 젓먹이 막내와 넷째를 돌보아야 하는 엄마를 대신해 장남인 내가 야밤에 벌판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때 나는 열 두살이었다.


    고생스런 과정을 지나고 마침내 모심기를 하던 날의 감격은 1년을 통털어 최고의 날이었다. 1년에 딱 두 번 온전히 쌀밥을 먹을 수 있는 날 중의 하루 였다. 조부님의 기제사와 명절에는 제삿밥만 쌀밥일뿐이고 나머지는 어김없이 보리쌀이 썪였었다. 그런데 모를 심는 날과 거두는 타작을 하는 날, 이렇게만 쌀밥을 온전히 먹었다. 게다가 빨간 소고기 기름이 둥둥 떠있어 마치 온갖 유성 물감을 풀어 휘젓어 종이에 찍어내는 미술작품같은 소고기 국까지 있었다. 이런 날은 입속에 다른 맛이 베일까 저어해서 김치도 먹지 않았다. 며칠 동안을 입 안을 떠돌던 그 기분좋은 기름진 냄새는 아직도 남아서 모심는 들판을 지날때마다 후각을 자극해 침샘까지 타고 흐르게 한다.


    네 마지기에 모를 심으려면 열두엇 정도 일손이 필요했는데 대부분 품앗이를 했다. 내가 도와주었으므로 그 중 한사람이 모를 내면 이번에는 그 집으로 가서 일을 해 주었다. 이른바 두레라는 것이다. 모를 심는 날 나는 예외없이 못 줄을 잡았다. 요즈음은 이앙기로 모를 심어 사라졌지만 그때는 집집마다 못줄이 있었다. 논의 폭보다 길게 노끈을 준비해서 빨간 천을 조그맣게 잘라 모를 심을 간격만큼 표시를 해둔 것이다. 노끈을 잡고 특정 부분을 꼬임과 반대로 비틀면 틈이 생기는데 그 틈으로 빨간 천을 밀어 관통시키고 힘을 풀면 노끈에는 빨간 나비 한 마리가 매달렸다. 나비들은 오월의 바람에 팔랑거렸다. 그 팔랑거림을 따라 가을이 누렇게 늠실대며 눈 앞으로 뜨거운 김처럼 후욱하고 다가왔다. 모를 심을 때는 잘 간격을 잘 보는 사람이 양끝에 선다. 세로로 못줄을 옮길 자리를 미리 벼를 심어 표시해 준다. 아직 자라 여물지 못한 나는 버거운 못줄을 앙가조촘하게 잡고 있지만 눈만은 모를 심는 손들에 가 있다가 다 심었다 싶으면 반대편 못줄잡이에게 크게 고함을 친다.


    "어이~~"
    이 날 만은 어른에게 반말이 허용되었다. 겨우 '어이~'라는 이 외마디에 한정되었지만 그것은 그날 나만의 특권이었다. 사람들은 그날만은 나에게 "작은대주"라며 크게 대우를 해주었다. 물론 여기서 '대주'는 논 주인인 아버지를 일컽는 말이었다. 나는 그런 추임에 크게 고무되어서 목청을 더 돋구어 마치 장날 수많은 암탉을 앞에 둔 장닭 마냥 "어이~~~"를 내질러곤 했다. 점심전에 새참이 날라져 온다. 점심전에 먹는 새참과 점심후 새참은 대부분 국수였으나 오후의 새참에 빠지지 않던 것은 막걸리 였다. 막걸리는 점심에도 나왔다. 사람들은 마치 막걸리의 힘으로 일을 하는 듯 했다. 어떤이는 점심에 나온 막걸리에다 밥을 말아서 후루룩 마시기도 했다. 다들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둑에 누워 쪽잠을 청했다. 둑에는 찔레가 한 무더기 있었는데 어른이 머리들 디밀기에는 너무 작은 공간이 있었다. 나도 오늘은 어엿하게 한 몫하는 작은 대주였으므로 점심후 낮잠을 잘 권리가 있었다. 문득 웽~하는 싸이렌 소리에 번쩍 눈을 뜨면 파란 하늘에 구름처럼 찔레꽃이 하늘에 둥둥 떠있곤 했다. 그 꽃과 꽃 사이를 비행접시처럼 벌들이 날아 다녔다. 손을 들어 꽃잎을 따서 입에 넣으면 전해지던 달작지근 한 유쾌함이 좋았었다.


    모내기 하는 날은 장말이요, 잔칫날이며, 축제였다. 반면에 가을에 타작을 하는 날은 기쁘고 슬픔의 부침이 심했다. 모내는 날 흉년을 생각하는사람은 없다. 잘 될거다. 암 잘되고 말고…. 올해는 풍년이 올거다. 모두들 모심는 날에는 이런 기대에 부풀어 아까운 것없이 베풀고 싶어 진다. 보리고개의 철 임에도 무리를 해서 일꾼들에게 쌀밥과 고깃국을 대접한다. 누구 하나라도 좋지 않은 마음을 품게되면 앞으로 이어질 희망의 길에 솟은 옹이가 될 판이었다. 모두가 기분좋게 모를 심이야 모도 잘 자랄 것이다. 가을에 타작을 할 때는 이미 흉, 풍년이 결말이 난 상태이다. 자연히 흥겹거나 맥이 빠졌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태풍도 많았고 물난리도 많았던 시절, 가을걷이는 우울한 노동이었다. 그래서 다들 모내기 하는 날을 축제처럼, 장날처럼, 잔칫날처럼 보냈다. 노동이 아니라 흥겨운 춤이었고 노래였다.


    점심후 잠깐 우체국에 들렀다 왔다. 회사로 들어 오는 길에 논들이 있다. 어릴적 그때처럼 찔레꽃도 만발했다. 달라진 것은 모내기하는 논에 주인인듯한 사람 둘, 털털거리는 이앙기 한대와 이앙기를 부리는 농꾼 하나가 전부다. 마침 점심시간에 끝날 무렵이라 읍내 다방의 노랑색 50cc 오토바이가 따르르 거리며 논둑을 달려가고 있다. "이 집 대주는 어데갔노? 뒷재너머 첩새이 집에 갔지"하며 노래 부르고 떠들던 소리는 이제 방송국의 수장고 깊이 들어가 버렸다. 찔레꽃을 감싸고 돌던 벌도 달작지근한 커피향을 따라 노랑 오토바이 곁을 서성일 것이다. 나는 사람도 세월따라 흐르는 것임을 새삼 느낀다.


    잠시 차를 세우고 룸미러를 본다. "어이~~~"하며 못 줄을 잡던 소년을 들추어 보지만 이내 포기하고 만다. 그대여 어디쯤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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