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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나리 흔들리던 밤
    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10. 4. 11. 22:25

     

     

    개나리 흔들리던 밤


    회사와 박씨네 사과 밭은 담을 잇대어 있다. 봄에는 회사 쪽 담에서 꽃 소식을 사과 밭으로 밀어 붙이는 반면 여름이나 가을에는 박씨네 사과 밭에서 사과 익는 내음을 회사 쪽으로 내몰아 댄다. 회사와 사과 밭을 경계는 철망이 가로막고 있다. 사과밭쪽의 숲길을 따라 고라니가 호수에 물을 먹으러 다니는 모양이다. 제법 규모가 있는 호수는 박씨네 사과 밭과 우리 회사가 절반씩 나누어 길을 건너 자리하고 있다. 여름이면 아침 안개를 피워내는 호수 덕에 여간 운전이 조심스러운 게 아니긴 하지만 운치도 또한 넉넉하다.

     

    여름이면 가끔씩 고라니의 로드킬이 걸음을 무겁게 만든다. 그 주검은 늘 박씨네 사과 밭이거나 우리 회사의 담 옆이다. 한번은 여름 비에 배수로가 넘쳤다. 회사의 모든 직원들이 나서서 배수로를 청소하던 중에 제법 큰 덩치의 고라니의 주검이 배수로를 막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고라니는 자신의 경계를 지키는데 아주 맹렬한 녀석이다. 아마도 그 녀석도 달이 훤한 밤 자신의 영역을 순찰하러 나섰다가 두 눈에 불을 훤히 밝히고 날쌔게 달려오는 녀석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일 게다. 우리 회사와 박씨네 사과 밭, 그리고 최씨가 시청에 임대료를 내고 운영하는 낚시터가 죄다 그 녀석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인간들처럼 등기해놓지 않아도 자신의 영역과 남의 영역을 잘 구분하는 것이 동물들이다. 그 녀석이 밤이면 순찰을 놓던 둘레는 이제 다른 고라니 녀석이 차지했을 것이다. 여전히 오늘도 밤이면 마른 풀잎을 조심스레 밟으며 순찰을 돌 것이고 육신에서 벗어난 전 주인은 유난히 몸이 가벼워진 원인을 알지 못해 전전긍긍할 것이다.

     

    고라니가 다니는 회사와 박씨네 사과 밭 경계 뜸 숲길은 지금 노랗게 개나리가 피었다. 한 줄의 노란 띠가 담처럼 이어져 있다. 꽃으로 구획을 짓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편한 대로 구획을 짓고 마음대로 자신의 구미에 맞추어 바꾸어야 직성이 풀린다. 자연을 그대로 두고 보는 여유가 왜 우리에게는 없는 것일까.

     

    지난 밤에도 고라니는 이번 봄에 불린 식구들을 다리고 물을 마시러 오갔을 것이다. 오가는 길에 노랗게 핀 개나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에 취하기도 했을 것이다. 고라니들은 모두들 코를 벌렁벌렁 대며 한마디씩 했을 것이다.

     

    “이 밤에 이리 흔들리니 내일은 비가 제법 올 거 같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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