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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정스님의 무소유 속에서~
    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10. 3. 24. 11:26

    법정스님의 무소유 속에서~


    법정스님이 열반에 드신지도 어느듯 2주가 흘러 49재중 초재를 지났다. 스님의 마지막 남긴 당부에 의해 스님 이름으로 된 모든 출판물을 절판 한다고 한다. 말빚을 가지고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말빚"이라는 말이 가슴을 찔러 2주동안 한 줄의 글도 적을 수 없었다. 받아 놓았던 원고청탁도 해결할 수 없었다. 나 역시 그동안 글을 쓴다는 핑계로 얼마나 많은 말빚을 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퍼낸 많은 글들도 대부분 진실의 우물에 두레박을 드리웠던 것도 아니다. 포장하고 덧대고 미사여구로 치장한 글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이런 것들이 모두 결국은 말빚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스님의 책이 절판된다고 하니 시중의 서점에서는 완전히 바닥이 났고, 중고책방에서 조차 이미 자취를 감춘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급기야 스님의 출판물들은 경매라는 것을 통해 몇천원짜리 책이 적게는 몇만원에서 몇십만원 이야기가 흘러나오더니 며칠전에는 옥션에서 억대를 호가로 내세웠다고 한다. 물론 장난처럼 올린 사람의 소행으로 보고 사이트 운영자 측에서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무소유를 소유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만들어 낸 난장판이다.


    생각난김에 서재를 일제히 정리했다. 문학 잡지류들은 내 글이나 지인의 글이 실린것을 제외하고 모두 버렸다. 기술서적도 시대를 감안하여 옛것은 모두 버렸다. 대학교재도 상담과 관여된 것을 제하고 모두 들어냈다. 이렇게 버린 책이 200여권이나 되었다. 셈을 놓아보니 가진 책의 4분지 1일나 되었다. 반대로 아직 버리지 못한 책이 600여권이나 된다는 이야기니 아직도 마음에 욕심이 다글다글하다는 이야기다. 언제나 완전히 버릴 수 있는 경지에 닿을수 있을까. 어쩌면 나 같은 속인이 목표로 삼기에 무소유는 너무 무거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법정스님이 열반에 드시기 이틀전에 핸드폰을 바꾸었다. 1년도 채 못쓴 핸드폰을 바꾼데 대한 아내와 딸들의 비난이 쏟아 졌지만 2년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를 대비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말았다. 스마트 폰은 컴퓨터를 기반으로 만들어 들고 다니는 컴퓨터나 진배없다. 그러나 한정된 사양으로 기능은 훨씬 복잡하다. 벨소리 하나를 내맘대로 바꾸는데만 꼬박 이틀이 소모되었다. 소프트웨어를 사고 파는 엡스토어를 통해 다운 받은 프로그램들은 저마다 하나의 아이콘을 가지고 있다. 핸드폰 화면에 깔린 아이콘들이 3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이 숨막히는 소유의 무게들~~


    책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법정스님의 책만 따로 모아보니 모두 일곱권이나 되었다. 마침 텔레비젼에서 법정스님의 책이 중고서점, 인터넷 경매등에서 상종가를 치고 있다고 하고 있는데 모아논 법정스님의 책 일곱권에 대한 딸들의 반응은 이랬다. 작은딸 "대박!!", 막내딸 "내가 옥션에 올려줄까?"

     

     

     
    그 중에서 범우사에서 출간한 '무소유'를 다시 펼친다. 줄이 쳐진 몇 줄이 다시 가슴을 적신다.


    우리가 만족함을 모르고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마음이 불안하고
    늘 갈등상태에서 만족할줄 모른다면
    그것은 내가 살고있는 이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주위에 있는 모든것의 한부분이다.
    저마다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전체의 한 부분이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세상의 한 부분이다.


    세상이란 말과 사회란 말은 추상적인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살고있는 개개인의
    구체적인 사회이고 현실이다.


    우리는 보이든 보이지않든
    혈연이든 혈연이 아니든 관계 속에서
    서로 얽히고 설켜서 이루러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다. - 법정스님의 무소유 중에서-

     

    내가 만족을 모르고 아직 앞으로 달리기만 하는 것은 어쩌면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불안과 불합리를 해결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세상이라는 추상적 개념속에서 나 라는 현실의 괴리를 자각하려고 애쓰는 중일 것이다. 나는 1984년에 수계를 받았다. 그때 수계 은사는 부산의 조정관 스님이었는데 화두로 "이뭣고?"를 주셨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이 화두로 싸워온지 2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풀지 못한 숙제 같은 것이다. 그나마 세파에 흔들려 세상의 멀미속에 있는 십여년 동안의 어쩌다 잠시잠깐 잡아보는 화두로 전락했다. 법정스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빚"이라는 말이 가슴을 불로 지진듯 뜨금하게 와 닿은 요즈음은 이 말빚을 수시로 생각하는 중이다. 시를 쓴다면서, 은유를 한답시고, 아름다움을 표현한다는 미명 아래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말빚을 지고 있는 것인가.


    언제쯤이면 나는 진실의 우물을 찾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삶을 영위하는 한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열심히 찾아야 하리라. 진실의 우물을 찾아서 헤매어야 하리란 것을 안다. 또한 희망을 가져본다. 사막여행자가 오아시스를 갈구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진실의 우물이 내 앞에 나타나게 되리란 것을 믿고 싶다.

     

     

     


    몇 페이지를 더 넘기자 언제 갈무리 해두었는지 기억 나지 않는 클로버 하나가 박제된 시간을 몸으로 보여준다. 상면이라는 글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나는 오히려 다른 글보다 이 글을 좋아 한다. 이렇게 스님과 상면하게 된다. 네잎 클로버는 행운을 뜻하지 않는가. 행운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니 당연히 앞으로 도래할 무었이고 이것은 곧 희망이다. 무소유 속에 갈무리된 소유의 희망은 사실은 모순이다. 어쩌랴 삶 자체가 모순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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