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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마스크가 그리운 날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09. 12. 9. 17:10
유난히 힘든 날이 있다. 어제는 정말 힘든 하루였다. 새벽길을 나선 출장길도 멀었지만 육체적 피로보다 정신적 피로가 산소 소모를 더 많이 하는지 종일 머리가 띵하다. 마치 산소마스크도 없이 에베레스트를 오른 것 같다. 새벽길은 안개가 사람을 힘들게 하는데다가 몇 번이나 불쑥 끼어드는 차에 놀라 브레이크를 잡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여기저기 실린 책이며 가방이며 물병이 제 맘대로 굴렀다.
회사일은 늘 그렇듯 별 어려움 없이 처리했다.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일에서 풀려나 개인일을 볼 수 있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를 찾아 가는 길은 네비게이션이 가르쳐준 길을 따라 뱅뱅 돌고 돌아 힘들었다. 그는 팔지못하고 전세로 주고 있던 집의 세입자였다. 11년전 이사오고 몇번의 세입자가 바뀌다가 그가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잡았었다. 5년을 세입자와 집주인의 관계가 유지되었었다. 그런데 두달전 그가 이사를 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 참에 팔아야 겠다하고 부동산, 지인들에게 부탁을 해서 다소 싸게 팔고 말았다. 주변에서는 조금있으면 시세가 오를것이라 장담을 했지만, 멀어서 관리하기도 힘들고 전세금 정리도 빨리 해주어야 해서 매수자가 나서길래 얼른 팔고 말았다.
그를 만난 순간 무어라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사실 그는 1년전에 큰 사고를 당했다. 차에 처와 친구들을 태우고 여행을 다녀오다가 큰 사고를 당해 혼자 살아 남았다. 6개월만에 그의 몸은 정상이 되기는 했지만 마음이 여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그가 전세를 사는 동안 파손된 문, 싱크대, 목욕탕 수리비를 어느 정도는 협의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가긴 했지만 말도 꺼내지 못했다. 5년 동안 한푼도 올리지 않았던 전세금을 건네고 영수증만 받고 돌아오고 말았다. 떠나기 전에 아내가 말을 하기는 했지만, 이사 나가고 두달이 넘도록 집이 팔리도록 기다려준 값이라 생각하라고 오금을 박아둔 터여서 차리리 홀가분했다. 그는 나를 보는 것 만으로도 사고 생각이 나는지 울먹였다. 불고깃집을 했었는데 꽤 손님이 많아 돈도 잘 번다며 가끔 갈때마다 집이 복이 있는 곳이라 했다. 순간의 사고가 한 사람의 삶을 180도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불고기집도 시세의 절반에 팔아버리고 잊기 위해 그 동네를 떠난것이란다. 우리들 삶에서 좋은 일들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일까?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돼는 일도 있는 법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우울했다. 날씨마저 을씨년 쓰러웠고, 하늘은 우중충했다. 목부분이 오늘은 유난히 뻐근하다. 얼마전에 겪은 위염의 고통이 생각났지만 자판기 커피 한잔을 빼 마셨다. 커피향과 설탕의 단 기운이 몸으로 스며들자 그나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바쁘다. 올해 학점은행으로 수업을 듣는 대구사이버대학의 기말고사가 시작되는 날이다. 14일까지 일주일간의 시험기간이 있기는 하지만 목요일, 금요일 출장에다 토요일은 직원 결혼식과 산업카운슬러협회 송년식이 있어 서울을 다녀와야 한다. 일요일은 일찍 청탁받은 원고를 쓰기위해 전라도 고창까지 다녀와야 한다. 그러니 주어진 시간이라곤 오늘과 내일 뿐이다. 그래도 무리를 한 탓에 집에 도착하니 8시다. 손발만 씻고 노트북을 켜고 시험 준비를 했다. 정말 재미있게 들었던 생리심리학을 처음으로 쳤다. 다른 교수님들은 60분인데 시험시간으로 50분을 주신데다가 영어를 섞어낸 문제는 얽힌 실타래처럼 좀체 풀리지 않는 가운데 시간을 흘려보냈다. 다치고 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두 과목을 더 치루었는데 시간이 부족해 주관식 한문제를 쓰지 못한 과목도 있다. 사이버의 시간제 학생이라도 평가는 상대평가이다보니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인생은 강물이다. 흘러간 물은 되돌아 오는 법이 없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잡는다고 잡아지지도 않는다. 청계천처럼 흘러가버린 강물을 펌프로 다시 끌어와 흘리니 순행의 기운이 없는 것이다. 밤11시가 넘어서야 3과목 시험을 마치고 아내가 사다준 맥주 한 잔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만다. 내일 마지막 한과목이라도 잘 쳐야지. 내일은 소속된 단체에 감사도 봐주어야 한다. 그러니 조금 늦어야 집에 들어 올 것이다. 그래서 오늘 무리를 했더니 산소를 소모해버린 뇌가 압력을 높인다.
고지가 바로 앞인데 숨쉬기가 힘들다. 오늘 하루는 산소마스크 같은 것이 정말 그리워 진다.'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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