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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카수필- 선암사[仙巖寺]에서 /김대근
    디카隨筆 2009. 9. 7. 14:09

    디카수필; 선암사[仙巖寺]에서

     

     

     

    선암사로 가는 길은 섬진강 지류를 따라 이어진 한적한 지방도로를 따라 드라이브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봄은 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나름의 풍치로 못을 갈아입는 이 길을 좋아한다. 오랫동안 숨겨놓고 싶은 길이기도 하다. 선암사가 있는 조계산은 조계종의 승보사찰로 불리는 송광사도 함께 품어 안고 있다. 수년전 가을에 송광사를 출발해서 조계산을 넘어 선암사로 이어진 산길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이름이 알려진 송광, 선암 두 거찰을 찾는 사람에 비해 산을 찾는 사람은 비교적 적어서 자연을 느낄만 했고, 숲길은 때가 덜타서 걷는 중에도 자성을 돌아볼 만 하였다. 마치 어릴적 외가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수년전에 비하여 주차장이 잘 정비되어 편안하다. 문명의 이기인 차도 가끔은 번뇌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오늘은 평일의 탓도 있겠지만 잘 정비된 주차장이 있어서 그 번뇌 하나는 덜어버린 셈이다. 주차장에서 선암사로 오르는 길에는 초파일에 달아 놓은 연등들이 조금씩 공덕을 바람에 풀어놓고 있다. 다시금 생각해 본다. 나는 내 마음에 등불하나 켜고 있는가? 의지가 약한 탓일까? 늘 켜졌다가 이내 꺼지고 마는 불……

     

     

     


    선암사 입구에서 가장 먼저 보물 400호 승선교를 만난다.
    선암사 입구의 승선교는 늘 가슴에 그리던 곳이다. 몇 번을 이곳에 서도 역시 가슴이 설레인다. 수평과 수직의 세상살이에서 내 삶이 원이 되기를 기원한다. 조용히 내 마음을 조망해보면 늘 수직과 수평의 연속이다. 어떤 건 모가나고, 어떤 것은 방사상으로 뾰족한 가시를 가지고 있다. 원의 세계로 가고다 하는 욕망도 이렇게 산문에 설때 잠깐 스쳤다가는 뇌전雷電이 되고 말뿐이다. 마음 하나 돌리기가 만만하지 않다.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경계가 늘 말끝에 있음에도 그 한발을 디뎌 나가기가 힘에 부친다.


    승선교의 반원은 내가 그나마 발견해 드러내려하는 가치이지만, 숨겨진 반영의 반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남에게 보여지는 반원에 그저 사람들은 환호하기도 하고, 격려해주기도 한다. 내가 잘 살아왔다는 위안을 스스로 하기도 한다.

     

     

     
    금산사에서 였던가. 고요한 밤 잠깐 틀어 앉았다가 내 마음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몇 마리의 뱀, 직선들, 사방으로 가시를 펼친 성게의 무리들을 찾아내곤 흠칫 놀라고 말았다. 기대했고 또는 자부하기도 했던 원은 전혀 없었다. 보기 좋은 가면속에 숨어 살았던 것이다. 절을 오르다 개울을 타고 오르내리는 뱀을 두마리 만났다. 내 속에 있엇던 녀석들인가 싶어 내심 반갑다. 내속에 또아리를 튼 녀석들에게도 자유를 주고 싶지만 늘 바람일 뿐, 끄집어 내어 버리기가 어렵다. 아마도 그릇의 차이리라.

     

     

     

    선암사에 갔다가


                        김대근


    선암사 승선교 아래
    피안彼岸의 골짝을 씻어 내린 물
    시리게 고였다 가는 沼 앞에 서서
    세상이 반원인 까닭 찾아보다가
    흐리게 감추어진 나머지 반원에
    가슴이 저렸다
    원안으로 걸어가 보지만 그림 속 풍경처럼
    아득히 멀기만 한 그 길에
    가마니에 고구마 문대듯 마음만 닳다가
    돌아오고야 마는 길
    그 길이 시작되는 발끝
    끊겼다 이어지고 이어진 자국마다
    푸른 물이 언뜻언뜻
    삶을 감추었다 내보이는
    얼룩진 세상 쓴웃음 한 줌
    나는 여기에 왔었던가
    어디쯤에서였던 것일까
    그 어디쯤의 마디가
    지금 발끝에 밟혀 질러대는
    얼룩 한 점일까


    원에서 벗어나 다시 지평에 선다

    < 2009. 8. 28. 선암사 승선교 아래에서>

     

     

     

    선암사의 일주문은 여의 절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일주문들과 달리 양쪽으로 담장이 연결되어 있고 돌계단으로 층계를 놓았다. 산문을 들어간다는 느낌보다 대갓집을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나만의 느낌인 것일까?
    일주문 현판의 앞에는 "조계산선암사(曹溪山仙巖寺)", 후면에는 "고청량산해천사(古淸?山海川寺)"가 걸려 있어서 선암사의 옛 이름이 해천사임을 알수 있다. 바다와는 멀리 떨어진 내륙임에도 굳이 바다 海를 쓴 것은 모를 일이다.

     

     


    일주문을 지나 절마당에 들어서면 보물 제 395호인 3츨 석탑 2기가 대웅전 앞을 지킨다.  크기나 모양이 쌍둥이로 아마도 같은 장인의 솜씨이리라.  비록 3층의 낮은 탑이지만 위와 아래의 비율이 참 잘 맞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고 기단 가운데 기둥 조각이 두줄에서 한줄로 줄어들고, 지붕돌의 받침수도 각4층으로 줄어 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보인다.

     

     

     


    보물 제 1311호로 뒤늦게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은 이 절의 주불전이다. 대웅전은 선암사 역사의 격랑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정유재란때 불타 소실되어 현종 원년인 1660년에 중수하였고, 1759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그 이듬해 다시 지었다. 그후 1823년에 다시 화마로 소실되었다가 1824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암사의 창건에는 두가지 설이 전해진다. 첫째는 신라 진평왕 3년인 542년에 아도화상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것이고, 둘쩨는 사적기에 의한 기록으로 헌강왕 1년 도선국사가 남방비보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비보裨補란 땅의 지기를 부족한 부분을 인공적으로 채우는 우리나라 특유의 풍수사상이다. 도선국사道詵國師는 우리나라 풍수사상의 효시로 추앙받는다. 도선국사의 비보사상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는 경남 진주 영봉산의 용암사(龍巖寺),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의 운암사(雲巖寺), 그리고 여기 선암사이다. 특히 광양의 백운산 옥룡사는 도선국사가 30년 넘게 주석하면서 지기를 보하기 위해 심었다는 동백림이 있어서 동백꽃이 피는 철이면 장관을 이룬다. 아뭍튼 전자의 설은 창건연대를 높게 보고자 하는 바람일뿐, 사적기에 남아 전하는 년대가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선암사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절에 있는 세가지가 없다. 이른바 삼무三無인데,


    첫번째는 사천왕문이 없다. 대개의 사찰들에는 가람을 외호外護하는 신장으로 사천왕문을 가지고 있는데 선암사에세는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이라 굳이 사천왕상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대웅전 바깥기둥에 걸려있는 주련이 없다. 사찰의 주련은 법구法句나 고승들의 깨달음의 말들이 나무판에 새겨지거나 판각되어 걸리는데 여기서는 개구즉착(開口卽錯, 깨달으면 말이 필요없으므로 입을 열면 틀리다)라고 하여서 주련을 달지 않는다.


    세번째는 어간문이 없다. 어간문이란 대웅전 같은 전각의 가운데 문으로, 일반 사찰에서는 스님만 드나들 수 있는 문이다. 선암사에서는 깨달은 사람만이 이 어간문을 통하여 드나들 수 있다는 철학으로 어간문을 만들지 않았다. 일반 사찰에서는 스님과 신도가 드나드는 문의 차별이 있지만 여기서는 그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 사실 부처님은 승가라하여 4부대중(남자 스님, 여자 스님, 남자 신도, 여자 신도)이 평등하고 가르쳤지만 중국을 통해 정착되는 동안 4부 대중의 절대적 불평등이 생겼다. 이런 점에서 선암사 대웅전이 주는 가르침은 의미가 깊다.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것 보다 더 큰 가르침을 준다.

     

     

     


    선암사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건물이 해우소解憂所이다. 그 형식이 특이하여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뒤깐이라는 현판이 더 마음에 든다. 해우소解憂所라는 말은 비교적 근대에 쓰여졌다. 인간은 누구나 배설을 한다. 문제는 배설을 제때 하지 못하는 것인데 사실 그것만한 걱정거리도 없다. 가장 행복한 삶이란게 원초적으로 파헤쳐 들면 잘먹고 잘싸는게 아니겠는가. 그러니 걱정거리를 풀고가라는 뜻이다. 통도사의 경봉스님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가던 길에 잠깐 자투리 시간이 아까워 들린 터라 몇 가지는 또 숙제로 남겨놓는다. 해결해도 시원찮을 판에 또 숙제를 퍼질러야 하는 것이 영 마뜩하지 않지만, 뭐 어쩌겠는가? 삶이 그런 것임을……


    <다음 숙제>
    대각국사진영(보물 제1044호), 대각암부도(보물 제1117호), 북부도(보물 제1184호), 동부도(보물 제1185호), 금동향로(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 화산대사사리탑, 순조가 친필로 쓴 '대복전'(大福田)과 '천인'(天人)이라는 편액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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