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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카수필> 사라져 가는 것들 /김대근
    디카隨筆 2007. 12. 24. 13:56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라져 가는 것들

                                               김 대 근


     산다는 것은 마치 기차를 타고 역진행 방향으로 놓여 진 의자에 앉아 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종착역을 알 수 있지만 거리를 짐작하지 못하고 지나간 행로는 내 시야를 거쳐 저만치 멀어져 종내는 드문 한 기억의 편린이 되는 그런 여행을 하는 것이리라. 가끔은 중간에서 내려버린 사람도 있다. 정해진 노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출세를 했다거나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인생이라는 기차에서 앞 칸으로 옮기거나 뒤 칸으로 잠시 옮긴 것의 착각일 뿐 유한한 인생의 여정임을 누가 있어서 부정할 수 있을까.


     기억의 편린으로 남겨지고 사라져 가는 것들은 수없이 많다. 오늘 아침에 문을 열고나오니 지난밤에도 누군가가 몇 장의 전단을 철문에 붙여 놓았고 열쇠장수의 자그마한 스티커도 손잡이 위에 새로 한 장이 자리를 잡았다. 작년에 집집이 추렴하여 새로 칠한 벽에 작년에 붙였던 스티커는 올해도 붙어 겨울임을 다시 한 번 일깨우고 있다.


    “솜틀집”

    해마다 겨울철이면 붙는 이 스티커는 과연 얼마나 더 볼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요즈음이야 대부분 아파트 생활을 하고 그 덕에 두터운 솜이불의 무거움에서 해방되어 얇은 시트 같은 홑이불로 겨울을 나는데 과연 아직도 솜을 타는 집이 있는가 싶은 것이다.


    “뚫어~ 뚫어~” 외치며 기다란 대나무를 둥글게 말고 그 끝에 헝겊을 뭉실뭉실하게 붙인 연장을 어깨에 메고 다니던 굴뚝쟁이, 말쑥한 양복에 윤이 나는 가죽가방을 겨드랑이에 끼고 “시계나 보석~ 채권 삽니다~”를 외치며 골목을 누비던 신사, 아이들을 잡아 등에 진 망태에 넣어가서 문둥이들에게 판다던 넝마주이, 새벽이면 교회당 종소리처럼 종을 울리며 “두부사려~ "를 외치며 잠을 깨우곤 하던 두부장수, 아버지가 술을 드신 다음날이면 엄마가 늘 종지로 한 그릇씩 사던 ”재치꾹(재첩국) 재치꾹~“을 외치던 아지매, 시도 때도 없이 열린 대문을 밀고 들어와 무궁화표 빨래 사분(비누)을 내밀던 후크선장의 갈고리를 빛내던 상이군인 아저씨, 쨍그랑 쨍그랑 박자를 맞추며 아이들을 불러 모으던 엿장수…… 이런 것들이 이제는 기억의 편린으로 남겨진 것들이다.


    “솜~ 솜~ 솜 타요!”

    삼천리 짐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솜 공장 아저씨도 사라진 풍경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 아저씨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었다. 성대를 거세당한 채 한 장의 작은 스티커로 벽에 바짝 붙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해마다 겨울이면 보았던 스티커였는데 올해는 다시 보는 솜 타는 아저씨의 얇디얇은 모습이 유난히 눈을 파고 들어온 것일까.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어 내려밟는 계단의 숫자가 다른 날보다 많아 보인다.


     저녁이면 군불을 때어두지만 열기는 잠시뿐이고 양철지붕으로 블록 담으로 새어 나갔고 조금이라도 열기를 잡아 두려면 두터운 이불로 꼭꼭 눌러놓아야 했다. 어깨까지 덮은 이불의 무거움은 공책에 쓰는 글씨를 더욱 깊게 자국을 남기게 했고 이불 한 장을 중심으로 빙 둘러 발만 데우고는 했다. 만만찮은 무게의 솜이불은 저녁에 늦게 돌아온 아버지의 밥그릇에 열기를 지키기도 했고 콩나물 가는 다리와 배 즙과 꿀을 버무린 엄마표 특제 감기약의 온도를 알맞게 올리고 숙성시키기도 했다. 몇 년을 거푸 사용한 이불은 솜이 납작해지면서 군데군데 뭉치기도 했고 딱딱해지면서 무게가 더 무거워 졌다. 그러면 엄마는 이불 홑청을 벗기고 발가벗은 솜을 솜 공장으로 이고 가서 솜을 새로 타왔다. 솜 공장에서 새로 솜을 타는 과정에서 행여 조금이라도 빼돌릴까 싶어 솜이 다 타질 때까지 지키고 섰다가 타진 솜을 새로 받아서 돌아 왔다. 깨끗하게 빨려진 홑청을 펴놓고 가지런히 솜을 놓고 균일한 두께로 조정하는 일은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엄마는 당신이 만족할 때까지 두터운 쪽의 솜을 뜯어다가 얕은 쪽에 붙이고 다시 눈대중으로 전체적인 두께를 가늠하고는 했다. 그렇게 조정 작업이 끝나면 바느질로 뽀송해진 솜에 다시 홑청 옷을 입히곤 했다. 그런 날에는 엄마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치자물을 넣어 부침개를 붙여 주시곤 했다. 두해에 한번 솜을 타던 것도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돈 몇 푼에 솜 공장 자전거에 실려 간 뒤로 다시없었고 가벼운 합성 솜이 들어간 가벼운 이불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가볍고 열을 더 잘 품는 인조 솜들이 나오면서 자연 솜 공장을 찾는 일이 적어졌고 솜 타는 공장마다 자전거나 삼륜차를 끌고 골목을 누비면서 솜 공장까지 오는 수고를 줄여주겠다며 “솜~ 솜~ 솜 타요”를 외치고 다녔다. 아파트 생활이 보편화되고 24시간 가동되는 보일러가 집집마다 구비되면서 이제는 두터운 솜이불이 소용없게 되었다. 이불도 이제는 얇고 가벼운 것을 찾다보니 예전처럼 두터운 솜이불을 사라져 가는 것들 중의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어젯밤에는 오랜만에 “메밀묵~”을 외치는 목소리를 들었다. 고학생이 담당하던 그 몫을 지금은 유흥비에 목말라하는 젊은이들의 차지가 되었다고 들었다. 그저 향수를 자극하여 한 푼이라도 더 벌려는 얄팍한 상술로 변질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사라지지 않고 우리 곁에 남아서 배회하는 그 목소리가 눈물겹다.


     한 동안 따습던 겨울날씨가 오늘은 유난히 매워 한 곁에 치워 두었던 가죽장갑을 끼고 나왔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몰아쳐 들어와 귓불을 식힌다. 이제 어두워 져야 다시 솜이불 같은 집으로 들어 올 것이다. 아랫목이 따로 없는 심심한 방에 엉덩이를 붙이고 발가벗긴 솜을 머리에 이고 장으로 가신던 엄마를 추억하게 될 것이다. 산다는 것이 엄마의 자리도 솜틀집 작은 스티커로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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