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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아남은 것들의 이유
    디카隨筆 2008. 4. 9. 13:03

    살아남은 것들의 이유

     

    벌써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회사에서 일부 부서 조정이 있었고 사무실 정리를 하면서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임원용 책상이 남았다. 고풍스런 대형 책상은 내 몫으로 배정이 되었다. 책상은 서랍이 넓고 많았던 탓에 이것 저것 버리지 못하는 내 성정과 잘 맞아서 중앙서랍 하나를 정리하는데 반나절이 걸렸다. 무엇이든지 손에 잡히면 그냥 서랍으로 쓸어 넣고 보는 터라 쓰레기통을 발 밑에 두고 하나하나 확인해보며 버릴 것 살릴 것을 고르는데 이 또한 대단한 스트레스다.

     

     

     

    일단 살아남은 것의 일부다. 아로나민 골드는 적게 잡아도 3년 이상은 된 것 같다. 오래된 약을 먹기는 아무래도 찜찜해서 버리려는데 눈이 피곤하고 목덜미도 뻐근하다. “그렇지! 이런데 먹는 약이지. 진공포장인데~”, “아냐! 그래도 오래된 건 좋지 않아.”

     

    녀석은 갈등의 골짜기를 기어올라 기어코 살아 남았다. 게다가 그 중의 한 알은 제 본연의 임무를 다하기까지 했다. 내가 스스로 약을 사는 일은 거의 없으므로 아마도 아내가 사다 준 영양제일 것이다. 근데 저 녀석은 늘 먹은 티를 내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이다. 드링크를 먹었을 때처럼 오줌이 노랗게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저 녀석을 볼 때 마다 원재료가 치자인가 싶기도 하다. 밀가루 반죽에 풀리면 가장 맛있는 부침이 되곤 하던 치자열매~

     

    3년 동안 한번도 사용한 일이 없는 플로피디스크도 살아 남았다. 여기저기 사이트의 인증서가 백업(Back Up)되어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 중에 하나는 이미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것인데 혹시 필요한 일이 있을 때 구하지 못하면 어쩌나 해서 살아 남았다. 얼마 전에 막내가 학교에서 받아온 숙제가 파일을 플로피디스크에 담아가는 것이어서 그 덕에 한바탕 집안을 뒤지는 소동을 겪었다. 그 이후로는 퇴물이 된 플로피디스크가 위대해 보이는 것이다. 햇수를 꼽아보니 정년이 8년 남았다. 두 손으로 꼽으니 두 손가락이나 남는다. 네임 스티커가 벗겨진 플로피디스크에 노을에 길게 드리워지던 내 그림자가 비쳐 보인다.

     

    플래쉬 메모리는 아무래도 버려야 할 것 같다. DSLR 카메라를 사용하게 되면서 사진 한 장이 몇 메가(Mega)에 이르니 32MB 64MB로는 코끼리 코에 붙이는 비스켓이다. 살 때는 비싸게 주었던 탓에 버리려니 자꾸 본전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버리지도 못하고 살려 놓으니 쓸모가 없다. 이런 것을 일러 삼국지에서는 계륵(鷄肋)이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며칠만 더 두고 볼 요량이다.

     

    미니 SD도 같은 처지다. 전에 사용하던 핸드폰에서 떼어 둔 것인데 핸드폰을 중고로 처분하면서 남게 되었다. 남길 때는 사용할 곳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1년을 넘게 서랍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컴퓨터에 연결을 하고 보니 1년 전의 사진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아날로그적으로 흘러가며 낡아가는 나의 세월들이 디지털의 힘을 빌어 바래지 않는 빛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의 130만 화소의 화질에 비해 떨어지는 사진이지만 암실 같은 서랍 속에서 1년을 견디어 준 게 너무 고마웠다. 혹시 아직도 이런 미니 SD가 필요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옥션에 올려보아야 겠다. 아무래도 다시 서랍에서 기약하지 못할 세월을 보내게 하느니 새 주인을 찾아주는 일도 좋으리라.

     

    하트모양의 열쇠고리도 나왔다. 때가 묻어 꼬질 해졌지만 사람에 대한 추억이 묻어 있는 이런 류들은 더욱 버리기 힘들다. 이것도 그런 이유로 살아 남았다. 예전에 BLOGN이라는 블로그 전문 사이트가 있었고 오강산이라는 닉네임의 진주에 사는 아무개가 있었다. 내 블로그의 글이 1,000개를 넘어선 날, 축하를 해준다며 또 다른 진주분과 야밤을 도와 올라왔다. 멀리서 오는 손님을 아산까지 오게 하기가 뭐해서 대전에서 만났고 밤을 발로 뭉개어 아침을 열었다. 다음날 아침에 그는 주차장에서 차 키를 백업해 주었고 그때 같이 끼워준 열쇠고리다. 일전에 같은 블로거 한 분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이동을 했다.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난 그에게 새로 바꾼 차의 키를 백업해달라고 부탁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열쇠업 접었단다. 오랫동안 기획해왔던 미국연방은행을 터는 일은 이로써 물 건너 가고 말았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버릴까 하다가 그의 강한 향취가 풍겨 나와 버리지 못했다.

     

    열쇠고리와 메모리들의 밑에 깔린 작은 쪽지는 삐라. 어릴 때 이런 삐라를 습득하면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고 배웠던 그런 삐라. 나는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터라 교육은 받았지만 실제로 본적은 없었다. 몇 년 전에 우연히 길에서 주었다. “! 이것이 그 유명하던 삐라~ 진짜 삐라구나나는 진짜 삐라와의 인연에 환호했다. 앞쪽에는 자주통일~” 어쩌고 하는 문구와 행사사진이 있고 뒤쪽에는 곱슬머리 배불뚝이 니북 아저씨와 우리 언론사 대표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건 진품이라는 이유로 살아 남았다.

     

    그 밑에 깔린 몇 장의 분홍과 하양의 투톤 용지는 표적지標的紙. 고속도로를 자주 다니는 나는 1년을 결산해보면 교통순경들의 사격연습에 자주 표적이 되곤 한다. 저 딱지들은 규정된 속도의 10~ 20킬로 정도 넘었을 때 레이저 총에 명중되었다는 증빙이다. 20킬로를 넘어 명중된 증빙은 버티고 버틴 후에 1만원을 덤으로 얻어주고 받는다. 얼마 전에 차를 바꾸면서 등록을 하려니 20만원이 체납되어 있다고 한다. 다 내었다고 했더니 영수증을 가져오란다. 그래서 알아보니 저런 증빙은 5년은 보관해두어야 한단다. 대부분 버렸는데 몇 장은 서랍의 제일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 아직 2년 정도 유효기간이 남아있는 것 들이다. 그래서 이들도 살아 남았다.

     

    아내와 어느 절엔가 갔을 때 커플로 구입한 열쇠고리였는데 윗부분이 떨어졌는데도 버리지 못한 것 중의 하나다. 마침 또 다른 열쇠고리를 버리면서 링을 떼어내 다시 구멍을 뚫고 끼우니 아직 쓸만해 졌다. 앞으로 좀 더 세월이 흘러 우연을 가장하고 내어 놓을 심산이다. 무지하게 다급한 일이 생길 때 얇은 방어막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 쫌생이는 할 수 없다니까.

     

      

     

    서랍 안은 더 난장판이다. 전체 체적의 80%를 정리하고도 남은 것이 이 모양이다. 이런 풍경은 산만한 내 심리 상태를 보여준다. 애정결핍증세에 기인한 산만한 정신세계

     

    펠리칸이라는 상표의 만년필은 사무실용이다. 이건 살아남은 종류가 아니라 서랍 안의 가장 확실한 주인이다. 휴대용은 몽블랑과 파커 소네트를 번갈아 사용하므로 거의 사무실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USB 메모리 리더와 함께 서랍 안에서 최고의 권위를 누리고 있는 녀석이다. 그 옆에 조금 긴 몸체의 만년필은 요즘 방영되는 사극 이산에서 홍국영이 같은 처지의 만년필이다. 고등학교 때 늘 쓰던 영웅이라는 상표가 생각나 최근의 영웅이라는 중국제를 구했는데 한 동안 잘 사용했다. 그런데 이게 너무 잘 나와 탈이었다. 잉크의 배출이 고르게 나와야 하고 뚜껑을 닫아놓으면 굳지 않아야 하는데 쓸 때는 과하게 안 쓸 때는 굳어버리는 것이다. 권력을 남용하다 결국 정조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홍국영이처럼 결국 퇴물이 되고 말았다. 역시 만년필만은 아직 중국도 제대로 짝퉁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역시 버리지는 못했다. 십대의 청춘 시절에 나를 즐겁게 해준 추억을 아직 버리지 못했으므로……

     

    제일 아래쪽에 하얀 USB 메모리가 보인다. 512MB 용량이니 요즈음 유행하는 2MB같은 사람은 256명이나 수용이 가능하다. 최근에 2GB 메모리를 구하면서 소용이 없게 되었다. 회사 일을 하다 보면 다른 부서의 자료를 받아 올 때나 줄 때가 있는데 플로피디스크가 사리지고 한 개의 파일이 최소 몇 MB정도에 이르는 요즈음에는 그저 파일이동용으로 사용한다. 그래도 아직은 자신의 할 일이 있다는 측면에서는 미니 SD나 저용량의 플래쉬 메모리보다 나은 편이다. 우리 회사도 작년에 촉탁제도를 도입했다. 정년이 된 직원을 계속 근무하게 하되 급여는 절반 정도로 지급하는 것이다. 회사로서는 전임 직원의 연륜을 활용할 수 있어서 좋고 본인은 퇴직 후 일자리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어서 좋다. 정년이 열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범위로 들어오니 전에 하지 않던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나이를 먹어 소심해진 탓인지 아이들 말대로 여성호르몬이 많이 나와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대각선으로 자리한 공중전화 카드 2장과 우표 몇 장

    우표와 공중전화 카드는 모아온 지 세월이 제법 흘렀다. 우표는 전시회에서 상도 몇 번 받았다. 다른 수집가와 달리 나는 사용제만 모으는데 우표든 공중전화 카드이든 다름 사람과의 소통疏通을 목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본연의 임무인 소통을 이룬 후에야 진정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재화의 가치를 상실하겠지만 말이다. 요즈음은 회사로 오는 우편물에도 거의 우표가 붙어오지 않는다. 기계로 인쇄된 쪽지나 바코드등이 대신 붙어 오는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제일 먼저 찾는 곳이 공중전화 부스인데 요즈음은 아무리 기웃거려도 일년에 서너 장 줏는게 고작이다. 휴대전화 없는 사람이 없는 시대이다 보니 사용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 1년간 꼬박 모은 게 사용제 우표 6장에 공중전화 카드 2장이다. 그렇다고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소통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다. 이메일, 휴대전화 같은 새로운 소통의 방법들이 더 많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은박지에 싸여진 것은 컴퓨터 안에 들어가는 메모리이다. 회사의 컴퓨터는 자주 업그레이드가 되었고 A/S 요원이 메로리를 업그레이드 할 때마다 달라고 해서 모은 것이다. 집에서 사용하는 서브컴퓨터 낡은 메모리를 업그레이드 시키고도 2개나 남았다. 이제는 저런 류의 메모리를 더 이상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이건 완전히 살아난 게 아니다. 다만 보류 중이다. 컴퓨터안에 들어가는 메인 메모리는 휘발성 메모리라고 한다. 전원이 켜지면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정보를 읽어 들여 사용하다가 전원이 꺼지면 즉시 소멸되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에도 이런 휘발성 메모리 영역이 있었으면 좋겠다. 가끔 소멸시키고 싶은 기억들을 위해서 말이다. 메모리 같은 것들은 정전기등에 아주 취약하다. 그래서 이런 부품들은 은박지로 감싸 보관해야 한다. 버릴까 말까……

     

    은박지로 감싼 메모리 아래 USB를 닮은 것은 적외신 통신 포트다. 전에 사용하던 노트북에는 적외선 포트가 없었고 마침 적외선으로 파일을 주고받을 일이 있어 사둔 것인데 지금은 핸드폰 조차도 적외선 포트를 기본으로 달고 나오니 일종의 용도폐기에 이른 물건이다. 이건 희소가치 대문에 살아 남았다. 아마도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나면 USB포트에 꼽아 사용하는 적외선 통신 포트는 어쩌면 박물관행이 될지도 모르겠다. 석기는 만 년을 넘어야 하고 도자기는 천 년을 넘어야 골동품 취급을 받지만 이런 IT 기기류들은 십 년만 지나도 골동품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요즈음 딸들이 흥얼대는 신세대 노래를 배워보고 싶어서 며칠 전 출장 길에 고속도로 노점상에게 카세트 테잎을 하나 샀다. 듣고 들어도 도무지 박자조차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나도 점점 골동품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사진기나 부품을 인터넷으로 구매하면서 받은 무료인화권이 30여장 되었다. 그 중에서 아직 유효기간이 남아 있는 다섯 장은 그 때문에 살아 남았다. 소량을 인화했을 때 우편료가 더 들어가는 인터넷 사진현상, 이 무료인화권이 얼마나 더 살아 남을지 나도 모르겠다.

     

    몇 년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통장이다. 현금카드를 가지고 사용하니 거의 쓸 일이 없다. 예전엔 은행의 창구에 뺨에 솜털이 형광등 불빛을 마구 튕겨내는 앳띤 여행원들이 있어서 청구서에 나름 멋을 피운 한자로 금액을 쓰고 인감을 찍어 내미는 재미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맛도 사라지고 없다. 자연 돈 자판기와 친해졌고 입금도 출금도 되는 그 편리함에 빠지게 된 것이다. 지난 달부터 무통장 거래가 200건을 넘었으므로 통장정리를 하라는 문구가 뜬다. 잡생각 공간의 비대로 좁아진 기억공간이 계좌번호나 전화번호등을 잘 외우지 못하는 고로 이 통장은 살려야겠다. 그렇다고 집에 가져갈 수 있는 통장도 아니다. 비밀계좌를 함부로 내 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통장이 가진 내 계좌는 늘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이다. 내일은 창원으로 출장을 떠날 예정이다. 창원에서 로또 한 장을 사와야겠다. 배 고픈 내 계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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