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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관순례- 조태일 시 문학관
    여행기 2008. 11. 26. 10:26

    <문학관 순례>
         조태일 시문학관
                                     김  대  근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 일본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중에서도 선불교는 한국만이 유일하게 원형에 가깝게 보존해 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당에 선불교가 뿌리내리게 한 가장 큰 역할을 신라시대 9산 선문일 것이다. 지리산의 넓은 자락중의 하나를 점하고 있는 전라남도 곡성의 태안사는 그런 의미에서 한국불교의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하촌에서 태안사에 이르는 계곡은 깊고 청량해서 세파를 씻기에는 그저 그만인 곳이기도 하다. 태안사 입구에는 『죽형 조태일 시문학관』이 자리 잡고 있다.


    죽형 조태일(1941~1999)에게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붙어 있다. 육척거구, 두주불사斗酒不辭, 국토와 식칼의 시인, 고집불통, 반골과 강골의 광주시인 등이 그것들이다. 서슬퍼른 군사독재 시절에 감옥에 갇힌 후배의 가솔들을 찾아 쌀과 연탄을 사주기도 하고, 야밤에 술에 취해 장독대에 올라가 ‘독재자 물러가라’를 삼창했던 시인, 모친 별세 후에도 5년이나 해마다 모친의 통장에 용돈을 송금했다는 시인이 조태일이다.


    우리나라에 대처승 제도가 도입된 것은 일제 때 일본에 의해서였는데 1200년 고찰 태안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주지를 대처승이 맡고 있었다. 조태일은 태안사 주지이며 대처승이었던 조봉호와 모친 신정임 사이의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불성은 시인의 이러한 배경이 영향을 미친 것일 것이다. 그의 형제들의 항렬이 ‘기基’인데도 그의 부친은 그에게 태안사의 첫 자인 ‘태泰’를 따서 이름을 지어주었다. 시인과 태안사는 남다른 인연으로 엮어있음을 알 수 있다. 태안사는 여순반란사건과 6.25 전쟁의 주요무대가 되었는데 시인의 인생 역시 거듭된 연행과 구금, 투옥 등으로 질곡의 삶으로 점철되어 이 땅의 현대사를 보는 듯하다.


    시인은 경희대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아침 선박>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 후 <식칼론,1970>, <국토,1975>,<가거도,1983> 등 8권의 시집과 시론집 <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등을 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식칼론>과 <국토>는 연작시로 1970년대 우리 시에서의 저항성에 큰 획을 그었다는 평가다. 그가 28세에 쓴 <간추린 일기>라는 시에서 “내가 죽는 날은 99년 9월 9일 이전” 이라고 썼는데 실제로 시인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날이 1999년 9월 7일이었으니 자신에 대한 미래에 대한 예언이 전율스럽다.


    그의 시에 대한 경향을 잠깐 언급하면 초기시의 경우 1969년대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난해함에 일정 부분 노출되어 있으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다.

     

    피묻은 피묻은 처녀막을 나부끼며
    아프고 피비린 냄새를 풍기며
    광화문 네거리 한복판에
    내가 섰다 내가 섰어.


    삼천만 개의 쌍눈을 번뜩이며
    삼천만 개의 쌍귀를 세우고
    삼천만 개의 가슴을 비벼 불꽃 튀는
    불꽃 튀는 단일화된 외침을 가지고
    삼천만의 기념비처럼
    내가 섰다 내가 섰어.


    ― 「나의 처녀막 3」 중 (『식칼論』1970 )

     

    이 작품은 조태일 시학이 지향하는 바를 두루 보여준다고 하겠다. 시적주제로 다루기 어려운 처녀막이라는 우화적 설정을 통하여 현실적 억압으로 훼손된 소중한 가치, 정신적 불모성의 초래를 상정하고, ‘쌍눈’, ‘쌍귀’, ‘불꽃 튀는’ 시적 주체의 결연한 의지로 극복하고자 한다. ‘자유’와 ‘민주’가 말살된 시대상황을 이 한편의 시편으로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다.


    시인의 중기 작품들은 막연한 현실부정에서 좀 더 심화되고 농익은 역사의식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조국의 분단 현실과 독재 체제의 극복이라는 구체적인 목표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 시편들이 피판적 주체의 목소리가 강했던 반면 중기의 작품들은 주체의 목소리 보다는 타자의 몫을 배려하면서 시의 구체성을 확보했다.


    1970년대 중반 시인은 연작시 <국토>에 열정을 쏟았다. 연작시에서 하나하나를 떼어 놓아도 하나의 시편으로서 작품 되는 일반적 의미의 연작시도 있고 이질적 요소들이 포괄적으로 함유된 복합적 연작시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흐름이 일정해서 독자가 손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너무 평면적이라는 부정적인 면도 있다. 후자는 언뜻 보면 모순인 부분이 서로 유기적으로 흘러 변화무쌍한 재미를 준다. 시인의 연작시들은 후자에 가깝다. 시인은 초기부터 일관되게 인간세계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시를 써왔다. 시인의 시에서 남성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느끼는 것은 시인만의 독특한 저항정신이나 소극적 표현보다는 거칠고 강인한 숨결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후기 작품들에서는 자연과의 교감을 통하여 완성된 자기긍정과 회귀 의식이 돋보인다. 그의 시편 전편을 흐르던 강물 같은 ‘저항성’이 많이 지워지고 ‘천진성’이 부각하게 된다. 천진성은 불교에서 선의 궁극에 이르는 선승들에게서 많이 보이는데 시인의 종교적 성향과도 결코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추는 곳
    그곳이 나의 고향,
    그곳에 묻히리.


    햇볕 하염없이 뛰노는 언덕배기면 어떻고
    소나기 쏜살같이 꽂히는 시냇가면 어떠리.
    온갖 짐승 제멋에 뛰노는 산속이면 어떻고
    노오란 미꾸라지 꾸물대는 진흙밭이면 어떠리.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출 곳 없어 언제까지나 떠다니는 길목,
    그곳이면 어떠리.
    그곳이 나의 고향,
    그곳에 묻히리.


    ― 「풀씨」(『풀꽃은 꺾이지 않는다』1995)

     

    이 시편은 질곡 많았던 자신의 생을 갈무리하려는 시인의 ‘천진성’이 돋보인다. 시인은 부정적 현실을 바꾸려는 열정의 과거와는 달리 자연으로의 회귀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고향을 생각하고 어머니의 품이 간절해지는 것처럼 시인도 역시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회귀를 꿈꾼 것이다.


    시인의 태안사와의 인연으로 태안사 입구에 그의 시문학관이 건립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태안사 계곡의 물들이 이 계곡을 떠나기 전 마지막 몸을 단장하느라 부산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단층의 넓고 길게 지어진 시문학관의 입구에서 고은 시인이 쓴 시편 하나를 만난다. “이 조가야, 그 체구엔/노동을 하는게 썩 어울리겠는데/시를 쓰다니 허허허 우습다, 조가야” 를 통해 거구였던 시인의 풍모가 엿보인다.


    시문학관의 출입구는 균형이 조금 틀어져 있다. 사각의 틀이 조금 틀어져 있다는 것은 시인의 저항정신의 상징 같은 느낌이 든다. 문학관의 내부는 특이하게 길고 다른 곳 보다 천정이 높아서 시원하다. 지반의 높낮이대로 바닥을 깔아 바닥은 계단처럼 조금씩 오르막을 가지고 있다. 문학관 내부에는 조태일 시인의 유품과 작품, 시인을 기리는 문학작품 등 2,000여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현대 한국 문학사에 대한 계통도, 시인의 집무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특히 시인이 산을 좋아 했는지 직접 사용했던 등산용구가 눈을 끈다.


    시문학관을 나오면 찻집이 있고 간단하게 차를 마시면서 시화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사무실 공간은 2층 건물인데 아래층에 있는「시집전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시집인 최남선의 <백팔번뇌>,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 등 희귀본에서 최근 작품까지 3,000여점의 시집이 전시되어 있다.

     

     

     

    ** 조태일 시 문학관이 있는 곳에서 맑은 소리가 연주하는 자연의 음악을 들으며 계곡을 오르면 빼어난 풍치를 자랑하는 태안사가 있다. 태안사는 신라시대 5교9산중의 하나였던 곳으로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다. 입구가 건물과 비대칭으로 되어 있어서 특이한 느낌을 받는다.

     

     

    ** 조태일 시인의 육필 원고들....

     

     

     ** 건물 내부는 천정이 높아서 우선 시원한 느낌을 준다. 조태일 시인이 한 덩치 한다고 소문이 났던데 역시 그의 호방한 외모와 성격이 맞춘듯 하다.

     

     

    ** 대한민국 근대사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피해가기 힘들었던 긴급조치위반~~

    미꾸리처럼 온 몸에 기름칠하고 잘 빠져다닌 문인들도 많다.

     

     

    ** 시인이 애용하던 일상용품들.... 산을 좋아했는지 산행용품이 많이 보인다.

     

     

     

    ** 조태일 시인의 연보~

     

     

    ** 곡성은 무었보다 안온한 동네다. 산도 물도 까끄라운 구석이 없다. 곡성은 그런 곳이다.

     

     

    문학미디어 2008년 가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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