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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리목월문학관
    여행기 2008. 7. 28. 11:26

    문학관을 찾아서
         동리목월문학관
                                                        김대근


    경주로 가는 길은 꽃이 지천이었다. 길을 애둘러 동해 감포 해안에서 토함산을 넘어 경주에 이르는 길을 잡았다. 오래전 바다 건너 도적들이 뭍에서 내려 물산이 그득한 신라를 향하던 길이었으리라. 아스팔트로 잘 닦여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구절양장의 토함산 넘는 길은 힘이 들었다. 이 높고도 긴 토함산은 신라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으리라. 석굴암을 앞에 둔 갈림길에서 불국사로 가는 내리막길을 가야한다. 관광버스들이 마치 기차처럼 서로의 몸을 잇대고 꾸불거리며 올라왔다. 들숨과 날숨의 호흡처럼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내리막길은 불국사 주차장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동리목월문학관은 불국사 정문 건너편에 있었지만 주차장 진입을 놓쳐 불국사 주차장까지 길을 잇대었다.


    불국사 주차장에서 불국사 일주문까지는 벚꽃들이 하늘을 가린 꽃터널을 지나야 했다. 이곳은 이분법의 분명한 선을 긋고 있는 곳이다. 절반 위쪽은 벚꽃이 순백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고 아래쪽에는 갖가지 색의 옷을 걸친 관광객들이 또 다른 총천연색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있어서 꽃을 찾는 사람들의 춘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불국사 정문 앞 길 건너에는 또 다른 꽃 세계가 열려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위가 마치 차원의 경계를 넘는 착각이 들었다. 목련꽃과 벚꽃이 길 하나를 두고 전혀 다른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동리목월문학관』으로 들어가는 아치형 돌다리는 목련꽃이 지천이었다. 두툼하면서 넓은 목련꽃잎은 바닥에 떨어져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행인의 신발자국을 제 몸에 선명히 새기고 있는 목련꽃잎이 깔린 길에 산새 울음에 실린 햇살이 후두두 떨어졌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둔 꽃에 의한 경계는 김동리의 “황토기”에 나오는 금오산 자락의 황토골에서 서로의 완력을 다투던 억쇠와 득보의 행사를 보는 듯하다. 마침 가운데를 관통하며 꾸불거리는 아스팔트는 토함산 자락을 타고 오르며 승천하는 용 같은 느낌이 들어 문학관의 자리가 참으로 잘 잡히었다 생각해본다.


    고도 경주는 깊은 역사만큼이나 여러 분야에 있어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고장이다. 그 중에서 문단의 인물로는 소설가로서의 김동리와 시인으로서의 박목월은 가장 대표적 인물일 것이다. 소설가 김동리 선생은 해방과 전쟁의 격변기에 순수문학을 지향해 왔고 , 인생의 구경(究竟)을 탐구하는 문학정신을 주창하여 해방 후 새로운 휴머니즘문학의 근간을 이루어 내었다. 선생은 1982년 노벨문학상 5위 이내에 선정되기도 한 세계적인 작가이다. 시인 박목월 선생은 자연 속에서 고향의 안온함을 내포한 토착정서와 민요의 가락을 시와 음악으로 승화하여, 모든 세대로부터 추앙받는 ‘국민시인’의 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문학관들이 한 개인의 작품세계를 알리기 위한 목적이지만 소설과 시인, 두 사람의 공동 문학관으로는 아마 이곳이 유일한 곳일 것이다.


    우리의 전통 건축방식인 기와로 지어진 문학관은 1층에 있는 영상실에서 김동리와 박목월의 작품세계와 일생에 대한 영화를 먼저 보고 2층의 전시관을 보는 게 그들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2층 전시관은 출입문을 기준으로 왼쪽에 김동리, 오른쪽에 박목월의 전시관이 있다. 어느 쪽이던 전시관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작가의 흉상을 만나게 된다.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물크기의 흉상을 대하니 전해지는 느낌이 다르다. 김동리 선생은 꼼꼼한 학자풍이 박목월 선생은 시원한 풍류남의 모습이 느껴졌다. 연보, 중요작품에 대한 해설, 육필원고, 집필실, 사용하던 문구, 주고받은 서신까지 골고루 전시가 되어 있어서 두 분의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알뜰히 꾸며 놓았다. 김동리 선생의 전시실에는 특히 선생께서 사용하시던 낙관들이 많았고 직접 사용하시던 손때 묻은 유품들이 많았고 박목월 선생의 전시실에는 그의 습작노트들이 눈길을 잡았다.


    김동리 선생은 1913년 11월 24일 경상북도 성건동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창귀(昌貴)였으며 대구의 계성중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다가 서울의 경신중학교 3학년에 편입, 4학년 과정을 마친 후 자퇴하였다. 1934년 신춘문예에 시 「백로(白鷺)」로 입선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935년 신춘문예에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36년에 「무녀도」,「허들플네」,「산화(山火)」,「바위」,「산제 」등 여러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1939년 「황토기」등을 발표하였다. 1939년에는 문단의 중진이던 유진오 선생과 세대논쟁의 평론「순수이의 」를 발표하고 해방 후 김동석 등과 계급문학에 대한 논쟁으로 비평가로서의 위상을 정립하였다. 1940년대 후반기에는 「역마」,「윤회설」등을 발표하였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쟁의 아픔을 담은 「귀환장정」,「흥남철수」,「밀다원시대」,「실존무」,「사반의 십자가 」등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독자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등신불(等身佛)」,「당고개무당」,「까치소리」,「유혼설」등을 발표하면서 부터다. 1970년부터 80년대까지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영어, 일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번역되어 해외로 알려졌고 「을화 」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서라벌예술대 학장등을 역임하였으며 1995년 지병으로 영면에 들기까지 그가 한국문단에 남긴 족적은 깊고도 길다.


    박목월 선생은 1916년 1월 6일 경상북도 경주군 서면 모량리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영종(泳鐘)이었다. 그의 부친은 박목월이 태어날 즈음에 경남 고성에서 이주했다. 모량(牟梁)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에도 전해질 만큼 오래전부터 많은 인물들을 배출해온 동네이다. 신라 시대 불국사를 건설하고 석굴암을 만든 김대성과 당나라에까지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원측 법사가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특히 원측법사는 중국 흥교사에서 수행하다가 열반에 들었는데 중화의 자존심이 강한 당태종이 당나라 오성(五聖) 중의 한사람으로 손꼽기도 했다. 어린 시절을 모량리와 건천에서 보낸 선생은 대구로 진학하여 계성중학교를 졸업했다. 18세였던 1933년 개벽사에서 발행하는 잡지 <어린이>에 동시 「통딱딱 통짝짝」,「제비맞이」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후 1939년에 <문장>지에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산그늘」,「가을 어스름」등이 추천되어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자연과의 교감과 향토적 서정의 세계를 우리의 전통적 율조에 잘 녹여내어 정지용 시인으로부터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1946년 조지훈, 박두진 등과 함께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발간하면서 세칭 청록파 시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의 초기작품은 「청노루」,「나그네」,「윤사월」,「산도화」등의 서정적이었으며 「청담」등에 수록된 중기의 시들은 현실적인 삶을 소재로 하였다. 「사력질(砂礫質)」,「경상도 가랑잎」등에서 보여주는 그의 후기 작품들은 역사적 현실과 존재의 문제,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사념적 관념성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양대교수,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1978년 3월 지병인 고혈압으로 영면에 들었다.


    동리목월문학관은 유족으로부터 기증ㆍ위탁받은 김동리와 박목월의 저서를 비롯 약 7천 여종의 장서와 육필원고를 비롯한 문학자료 1천 5백여 점, 생활유품 2백 50여점, 추사ㆍ운보ㆍ월전 등의 애장품 30여 점 등 국내문학관 중 가장 많은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문학관 관람을 마치면 앞마당에 늘어서 있는 시인들의 시를 감상하는 맛도 좋다. 문학관 맞은편에 있는 경주를 빛낸 인물관도 들러 보아야 할 곳이다. 주로 신라시대의 인물이 위주인 곳으로 우리 역사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빛났던 신라를 이끌어온 선인들을 느낄 수 있다. 문학관 광장에 서있는 아사달과 아사녀를 기리는 기념비도 볼만하다. 백제 사람인 그들이 멀고먼 이국의 땅에서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만 애틋함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문학의 소재가 사랑임을 알려주고 있다.


    주변에 볼거리도 워낙 많다. 바로 지척인 불국사, 차로 5분 거리인 석굴암과 보문단지, 고개 넘어 동해바다를 끼고 기림사와 감포 감은사지, 대왕암으로 이어지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 등은 경주 관광의 백미인 코스다.


    동리목월문학관의 개관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과 1월1일, 설날과 추석날은 휴관한다. 찾아가는 길은 불국사를 기준으로 잡으면 쉽다. 문학관에도 자체 주차장이 있으나 좁고 진입이 쉽지 않으므로 불국사 주차장을 이용하면 벚나무 터널과 잔디밭을 지나 연못의 수련과 그 위를 지나는 아치 석교까지 좋은 풍경을 덤으로 챙길 수 있다. 단체관람이나 문의사항은 동리목월문학관 (054- 772- 3002)이나 홈페이지 http://www.동리목월문학관.com을 참고하면 된다.


    <문학미디어 2008년 여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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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로 엮는 사진과 이야기들....

     

     

    불국사 주차장에서 불국사 일주문으로 가는 길은 하늘이 한쪽도 보이지 않을 만큼 벚꽃으로 덮혀있다. 봄이 좋은 이유는 천지사방에 피는 꽃들의 왕성한 생명력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꽃이 피는 이유가 종족보존을 위한 것이니만큼 봄은 식물들의 섹스기간인 셈이다. 꽃길을 걷다가 가만히 나무에 기대어 귀를 기울여 보라. 암술과 수술이 내는 교성에 터진 수도꼭지에 물을 뿜듯 춘정이 샘 솟을 것이다. 

     

     

     

    불국사 일주문 앞 국도 건너는 한가한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불국사 쪽과 스치는 사람이 오히려 반가운 문학관을 가르는 토함산 관광도로 아스팔트는 차안과 피안의 경계같다. 번잡함과 고통의 세계에서 무념무상의 극락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간단하게 구획이 지어진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하긴 수많은 고승들이 남긴 어록을 보아도 극락과 지옥, 고통과 행복의 구분은 마음자리 하나에 달렸다니 마음속에 구획선을 찾지 못하니 중생이다.

     

     

     

    동리.목월 문학관 가는 길이다. 이 길이 운치가 있다. 토함산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문학관으로 들어가는 찻길이 있다. 주머니에 가득 채워 돌아올 양이면 이 길을 걷자.

     

     

     

    다리를 건너 문학관으로 오르는 계단 앞은 목련이 지천이다. 언젠가 쓴 글에서 목련은 50대 여인네의 꽃이라고 했던 적이 있다. 고고한 척하지만 꺾이면 순식간에 바닥까지 떨어지고 마는 성정이 그렇고 떨어지면 이내 시들어 버리는 조급함이 그렇다. 여자의 일생중에 50의 나이는 가장 떠 받들림을 받는 나이다. 남편도 이때쯤에는 그저 고양이처럼 눈치를 보며 허리를 굽히고 다닌다. 아이들도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기전 최고의 예우를 해준다. 화르륵 한 순간에 피는 것이다. 극과 극이다. 정년을 마치고 쓸쓸하게 돌아오는 가장의 어깨도 만져주어야 하고 짝을 맺어준 아이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포기가 빠른 것도 이 나이의 여인들이다. 사랑의 감정을 지피기 보다 포기하는 쪽을 택한다. 목련의 하얀색과도 인연이 깊어진다. 하얀 상복을 입는 기회도 많아지고 자신의 전부라고 여겼던 아들도 하얀 드레스의 여인이 채가고 마는 것이다. 목련은 바람에 섞인 작은 모래 알갱이만 스쳐도 상처를 잘 입는다. 50대 여인네의 마음도 작은 일에 상처를 잘 입는다.

     

     

     

    마주 스쳐 내려가는 젊은 커플의 웃음소리가 싱그럽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던가?

    아마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의 창고를 뒤져 보아도 세월의 빗물에 번져버린 추억은 희미할 뿐이다. 그랬던가? 내가 가졌던 것도 온전히 지켜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좁은 테두리, 그 속에 빳빳하게 고개든 별 볼 일 없는 부류였던가?

     

     

     

     

     

     

    동리목월 문학관 전경과 소설가 김동리 선생과 시인 박목월 선생의 흉상~

     

     

     

    낮의 가로등은 풍경이 되는 것 외에는 역활이 없다. 꽃잎들이 반사해 내는 빛깔들을 가로등은 축광할 것이다. 어스름이 찾아 오면 길 잃은 하루살이들이 허공을 헤맬것이고 가로등은 낮동안 축광시켜둔 꽃빛으로 그들의 길을 밝혀 줄 것이다. 하루살이들은 가로등 불빛 아래 모여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하룻동안 살아온 지난한 이야기를 나누며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춤을 추게 될 것이다. 아마 오늘 밤에도~~

     

     

     

    문학관 뜰에 세워진 아사달의 사랑탑이다. 탑을 사이에 두고 입맞춤하는 연인이 새겨진 탑이다.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 만날 수 있어도 벽하나로 만나지 못해 애태우는 사람들 간에 오고가는 애절한 사랑의 탑이다. 애절함이 농해질수록 가슴에 박히는 보석이 된다는데 나는 여즉 그런 애절한 사랑하나 가지지 못했으니 2% 부족한 삶을 사는 셈이다.

     

     

     

    마당가를 돌면서 시화들을 읽는 재미도 솔솔하다.

     

     

     

     

     

    꽃 들, 꽃 들, 또....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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